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6/06 19:44:56
Name 시간
Subject [일반] 돈 값 (수정됨)
어제 오전 아홉시부터 다음날 새벽 7시반까지. 장장 22시간 풀 근로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한 회의는 정말 16시간 반을 달려 새벽 6시반에 끝이 났으며,
그나마 오늘이 휴일이라는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회의가 왜 그렇게 길어졌느냐면, 이른바 명분과 실리의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즉, 제품도 서비스도) 철학이 깃들어져있으며 그 철학을 어느 정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철학은 알겠고 근데 사실 매출(돈)이 중요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그거 하나 만으로, 정말 그거 하나 만으로 장장 16시간을 넘는 회의가 이어졌다.
(물론 각각 진영의 입장을 가다듬고 논리를 곧추세우는 작업을 위해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도합 6시간 정도 있었다.)

퀭한 눈으로 집에 돌아와 자고 일어나니 이미 오후 4시.
그간 여러날 홀짝홀짝 작은 잔으로 한잔 씩 마셨더니 벌써 바닥이 잘랑잘랑 해진 글**딕 위스키가 눈에 아른거렸다.
아.. 지금 따면.. 아아 안주가 없어...
타오위안 공항도 아닌 쥐콩만한 송산공항 면세점에서, 비행기 문닫기 10분 전 부랴부랴 남은 대만달러를 탈탈 털어서 산,
우리나라 돈으로 5만원도 채 안하던 글**픽 엑스페리먼트2 위스키였는데,
근 2주일 넘게 매일 밤을 함께 해오다보니, 그 정이 누워있는 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정 중에 무서운 정이 바로 X정이라더니..

몸을 일으켜 이빨만 닦아냈다. 세수따위 어차피 머리 안감으면 똑같은 거지새끼다.
마트로 차를 몰았다. 가성비로 유명하다던 코**코 위스키를 사기 위함이었지.
더불어 안주 겸 저녁으로 먹을만한, 가격 대비 사이즈가 어마어마한 회를 사려고 했다.

코**코 술 코너에서 20만원인 코**코 커**드 XO를 집어들었다가 넣었다.
회의 결과가 나름 잘 나오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좋게 끝난것도 아니었다.
뭐 잘났다고 내가 이걸 먹을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현대카드도 없는 내 지갑을 후려쳤다.

6만 얼마인 코**코 커**드 12년 스카치 블렌디드 위스키를 들었다. 100ml 당 5,***원.
그리고 그 옆에는 글**딕 12년 싱글몰트 위스키가 있었지. 100ml 당 15,***원.
싱글몰트란 오직 맥아만을 이용하였기에, 맥아 외 당밀이라든가 옥수수라든가 여러가지를 섞은 블렌디드보다 당연히 비쌀 수 밖에 없으며 블라블라 갖가지 잡 지식이 헝클어진 머리를 훝고 넘어갔지만,
뭐가 대수냐 코**코 커**드 12년 위스키가 곧장 내 카트로 들어왔다.

그리고 코너를 돌아 맥주를 사려던 차,
년수가 적혀있지 않은 코**코 커**드 1.75L용량의 위스카가 무려 2만원대였다. 100ml 당 2***원
오, 어머니.
어차피 알콜빨, 병라벨에 큼지막히 적힌 80proof 가 내 눈을 유혹했고, 나는 바로 12년산을 집어들고 다시 매대 박스로 쳐박았고,
저렴한 뚱뚱이 위스키를 카트로 담았던 것이었다.


X바..
보안을 위해 꽁꽁 싸맨 병뚜껑을 따내어 첫 잔을 따라 마신 후, 내 머릿통을 후려친 생각이다.
이건 술이 아니다. 물이다. 술에 물을 탔다.
나**키는 구라쟁이가 아니었다.
저렴이 위스키는 그저 고도수로 뽑아낸 저렴이 원액에다가 물을 때려박았다는 것이 뻥이 아니었다.

첫 노트부터 단순한 알콜향이 글**딕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실험실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복합적인 풍미가 오래 입안을 메우지 못하고, 그저 입천장에다가만 나 알콜이얌마! 외치고 공허하게 사라질 뿐이었다.
그나마 "오크"숙성이라는 것을 애써 자격증으로 내세우려고 하는 듯,
그저 부끄러운 소심한 향이 아주 잠깐 스치울 뿐이었다.

X바.. 그 글***딕도 고작 5만원이었는데..
내가 원래대로 코**코 커**드 12년산을 집어들었으면 달랐을까?

남 몰래 소리 안나는 방구를 뀌고선 고상한 척 하려던 나는,
나조차도 예상못한 물컹한 기운을 엉덩이로 느낀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Hammuzzi
19/06/06 20:02
수정 아이콘
안그래도 코**코에서 그 위스키볼때마다 갈등했었는데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위대한캣츠비
19/06/06 23:17
수정 아이콘
별좀 없애주세여 흐흐
소소한 일상 잘봤습니다
펠릭스30세(무직)
19/06/07 02:56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

뭔가 죄송한말이지만 별거 아닌 글이긴 한데...

진짜 잘 읽었습니다. X밤 인생 뭐 있나요.
19/06/07 08:23
수정 아이콘
저 위스키 집에 있는데 걱정이네요 크크크
참돔회
19/06/07 08:50
수정 아이콘
사실 술맛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맥주도 이게 라건지 에일인지 밀맥주인지 정도는 구별하겠지만 라거끼리 구별은 못하겠고요

그래도 어려웠을 때 본 만화에서 '글렌피딕' 한잔 마시려고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게 로망이었는데

원하는 곳에 취직한 날에 사서 혼자 2/3병 비운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 다 가진 기분에 신났는데 확실히 다음날 숙취는 ㅠㅠ..
어쨌든 제겐 그래서 글렌피딕이 특별한 술입니다

물론 여전히, 글렌피딕과 다른 비슷한 술들을 구별할 능력은 안됩니다
그래도 좋은 소소한 일상글에, 반가운 이름이 보이니 좋아요

암튼, 우리 인생에 치어스~
우리아들뭐하니
19/06/07 15:53
수정 아이콘
싼건 역시 이유가 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1426 [일반] (스포) 엑스맨의 시리즈의 피날레로 보기에 너무 아쉬웠던 피닉스 [32] 삭제됨7287 19/06/08 7287 1
81425 [일반] 고전영화 감상문 [12] chldkrdmlwodkd5762 19/06/08 5762 2
81424 [일반] 검증이 필요한 현 정부의 역사관. [389] HVN18460 19/06/08 18460 71
81423 [일반] 구글 스태디아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까? [110] 아케이드11731 19/06/07 11731 2
81422 [일반] 건보공단 "경찰대 성평등 교육에 불만 제기한 직원 조치하겠다" [218] AKbizs17654 19/06/07 17654 47
81421 [일반] [이것은 정모글] 번개글은 뜬금없이 올려야 제맛 (in 부산) : 최종 공지글 [7] 은하관제5653 19/06/07 5653 0
81420 [일반] 6차원에서 온 기생충 리뷰 [14] 삭제됨6593 19/06/07 6593 4
81419 [일반] 美 국방부, 대만을 ‘국가’로 지칭…‘하나의 중국’ 원칙 또 흔들었다 [124] 카루오스18437 19/06/07 18437 7
81418 [일반]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김원봉 언급 논란 [621] 아유27554 19/06/07 27554 51
81417 [일반] [스포일러] 기생충 보고 와서 쓰는 생각들 [27] 새님10048 19/06/07 10048 16
81416 [일반] <라스트 킹덤> 영국의 탄생 신화 [15] 일각여삼추11106 19/06/07 11106 1
81415 [일반] 지나치게 과도한 한국의 부동산 규제 [136] LunaseA18532 19/06/06 18532 24
81414 [일반] 시오니스트 세속 극우 VS 초정통파 종교 극우 [35] 나디아 연대기7849 19/06/06 7849 5
81413 [일반] 스윙스가 트랩바 데드리프트를 해야하는 이유 [33] 카롱카롱17951 19/06/06 17951 3
81412 [일반] [리뷰] 기생충(2019) - 생환은 관객의 몫이다 (스포있음) [13] Eternity9869 19/06/06 9869 37
81410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열다섯째 날, 마지막 [21] 글곰5286 19/06/06 5286 17
81409 [일반] 돈 값 [6] 시간4929 19/06/06 4929 9
81408 [일반] 美中무역전쟁, 美반도체 산업에도 직격탄..과연 중국이 이길수있을까요? [117] 나른13092 19/06/06 13092 3
81406 [일반] 문재인이 사실상 순국유가족 농락하네요. [578] 차오루38794 19/06/06 38794 116
81405 [일반] 우리나라 군복무기간 변동사 [25] style9899 19/06/06 9899 3
81404 [일반] 앞으로 중소 제약 업계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35] goEngland11834 19/06/06 11834 3
81403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열네째 날, 별 헤는 밤 [11] 글곰4908 19/06/06 4908 16
81402 [일반] 그 사이 만든 비즈들 [18] 及時雨15727 19/06/06 15727 1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