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도 이제 슬슬 끝물입니다만... 이번에는 여기를 소개해 봐야겠다 하고 마음은 먹었는데, 웬걸 이 나라가 참... 뭐랄까 어느 측면을 중점적으로 소개해야 할까,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흥미가 있을까 진짜 고민하게 만들더군요. 이왕 이리저리 좀 주워섬긴 꼴이라도 읽은 내용이 있고 공부한 내용이 있으니 그걸로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이 에스토니아라는 나라는 아마 세계사, 어쩌면 유럽사로 한정지은 책에서도 그 이름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나라 중 하나로 손에 꼽힐 겁니다. 남유럽의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갈은 (비록 이탈리아라는 이름 자체는 등장이 드물지만) 유럽사의 메이저리거나 다름없고, 발칸 반도는 일찌감치 화약고가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터져서 제1차 세계대전을 이끌어냈죠. 사라예보 사건 세계사 시간에 들어 보셨을 테구요. 서쪽으로는 영국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대기근 내지는 감자역병 이야기로 세계사 또는 생물학 같은 시간에 언급되고는 합니다. 중유럽으로 시선을 돌리면 프랑스, 독일은 명백한 메이저리거고 스위스도 잊을 만하면 얼굴을 들이밀었으며 네덜란드는 오라니에 공 빌렘과 명예 혁명(동군연합), 벨기에는 백년 전쟁의 한 원인이었던 플랑드르. 체코슬로바키아는 예로부터 보헤미아로 통했고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름 들어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며 폴란드는 또 어떻습니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라고 해서 중세 내지는 근대 유럽사에서 빼놓기 어려운 존재죠. 그나마 북방인 덴마크나 스웨덴 정도인데 스웨덴도 30년 전쟁의 영웅인 구스타프 아돌프 2세가 또 유명하지 않습니까. 덴마크는 바이킹 이야기를 할 때 빼놓기 어려운 존재이고... 이런 식이라서, 아주 벽골짝에 박혀있거나(아이슬란드 등) 아주 조그맣거나(이전에 소개드린 안도라 등)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세계사 시간에 얼굴을 한 번은 비춥니다. 어떻게든... 근데 에스토니아는?
그러면 에스토니아가 매우 작은 나라냐? 그건 또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나라 면적의 대충 절반쯤 되는 시점에서(약 4만 5천 ㎢) 이미 가엾은지고 하며 코웃음칠 레벨의 사이즈는 아니죠. 이 정도 땅이 있으면 설령 그게 산투성이라고 해도 영토를 넓히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거늘, 에스토니아는 국토가 전반적으로 매우 평탄한 축에 속합니다. 섬나라 및 초미니국가 빼고 이야기하면 에스토니아보다 평탄한 나라는 고작 열 나라 될까말까합니다(감비아, 카타르, 덴마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기니비사우 등).
물론 에스토니아가 삼림지대기는 하죠. 하지만 삼림지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산적이라는 위험성이 있어서 그렇지 그걸 제외하면 나무 나오지 먹을 거 나오지 가끔씩 사냥감도 나와 주지... 설마 엄청난 크기의 보리밭 한가운데에서 야생 멧돼지 사냥을 하려는 분은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위도가 높아서? 근데 그렇게 놓고 보면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이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위도가 엇비슷합니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위에 있는 핀란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렇게 놓고 보면 참으로 희한한 동네죠. 대체 뭐가 어떻게 되었길래 이 나라는 세계사 책의 페이지에 얼굴 디밀기가 힘든 나라가 되었나? 또 에스토니아는 어떻게 강팀... 아니 나라가 되었는가?
에스토니아라는 이름은 아이슬란드 빼고 지금까지 소개드린 다른 여타 유럽의 나라들이 다 그렇듯이 출처가 불명확합니다.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저 유명한 로마의 타키투스 대선생이 저술한 《게르마니아》에서 "쩌~~~~~기 저 한참 북쪽으로 가면 웬 바다가 나오는데 거기 아에스티(Aesti)라는 사람이 산다더라"라고 언급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이 타키투스 선생이 언급한 아에스티가 발트 인(Baltic People, 현재의 라트비아 및 리투아니아 인)인지 현재의 에스토니아인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고 하더군요. 아니 에스토니아는 발트 해에 있는데 발트 인이 아니야? 하며 약간 아리송하실 분들을 위해 첨언하면, 에스토니아인은 핀란드인과 동족입니다(핀-우그르 계열).
또는 바이킹의 사가(Saga, 서사시. 빈란드 사가의 그 사가 맞습니다)에 아이스틀란드(Eistland)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네요. 이것도 꽤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 에스토니아를 에스틀란트(Estland)로 부르거든요. 타키투스의 아에스티라는 지역이 현 에스토니아보다 조금 더 남쪽에 있다는 게 학계의 정설임을 감안하면 바이킹의 사가에서 유래된 게 맞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에스토니아가 본격적으로 유럽사에 편입되는 시점은 1199년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해에 인노켄티우스 3세가 에스토니아로 원정대를 보내거든요. 세계사 시간에 한 번쯤 들어보셨을 법한 인물인데 바로 제4차 십자군(1202)을 조직한 인물이죠. 그리고 제4차 십자군은 욕망에 눈이 멀어 콘스탄티노플을 단디 털어버리면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면, 이 때 에스토니아로 마실 나간 원정대가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입니다. 근데 얘가 독일계에요. 에스토니아의 역사에서 바이킹도 아닌 독일이 엉뚱하게 일정 부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얘가 튜튼 기사단과 합쳐지면서 리보니아 기사단(Livonian Order)이 됩니다. 크킹이나 유로파 해 보신 분들이라면 어쩌면 리보니아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을 거에요. 그게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합친 지역입니다.
십자군은 에스토니아 땅에서 꽤나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항전이 엄청나게 오래 끌었거든요. 에스토니아 전 지역을 온전히 십자군의 발 밑에 두게 된 해가 1227년이니 거의 30년을 싸운 셈입니다. 에스토니아에 뭔가 단합된 지도자가 나타나서 연합군을 이끌었던 것도 아닙니다. 가장 인상적으로 싸웠던 지도자는 있었어도...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기사단이 에스토니아 땅에 발을 들여놓기 전의 에스토니아 영토입니다. 보시다시피 열 개가 넘는 나라로 사분오열되어 있죠. 섬인 사아레마(Saaremaa)야 그렇다쳐도 본토에도 많은 나라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이걸 정복하는 데 25년이 걸린 겁니다. (앞서 30년이라 했는데 사아레마로 쳐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렸죠. 본토가 최종적으로 정리된 건 마지막 반란이 있었던 1223년 전후.) 십자군이라고 해서 꼭 예루살렘에만 쳐들어갔던 건 아닌 겁니다. 이렇게 에스토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기독교도화된 나라가 되었죠. 유럽사의 메인스트림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거죠... 대학에서 뭐 미팅도 하고 학교축제에도 참가하고 주점도 열어보고 별 짓 다 하지 않습니까. 보통 그게 대학 신입에 들어간 사람들이 노는 방식이고... 에스토니아라는 학생은 이러한 소위 "인싸" 문화에 가장 늦게 끼여든 셈입니다. 그러니 존재감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이 과정에서 좀 골때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인노켄티우스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는 다음과 같은 일을 벌이거든요...
1218년 어느 날
호노리우스 3세 : 아놔 저거 참... 에스토니아에 십자군 보내놓고 뭐 여태 정리되었다는 소식이 없어... 그렇다고 원정대를 또 보내기도 뭣하고... 옳거니! (전화기 들고 드르륵 드르륵) 여보세요? 어이 덴마크 형씨 잘 지내슈?
발데마르 2세 (당시 덴마크 국왕) : 어이쿠 교황 성하 무슨 일이십니까?
호노리우스 3세 : 야, 느그들 땅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리보니아라고 있거든. 알다시피 우리가 한 20년 전에 십자군 일으켜놓았는데 공격이 영 지지부진해. 그래서 헬프 좀 치려고.
발데마르 2세 : 맨입으로요?
호노리우스 3세 : 야, 아무려면 아무 조건도 없겠냐.
거기 니가 점령하는 땅은 다 니 꺼다.
발데마르 2세 : 오케이 콜. 알겠습니다. 확실한 거죠? 이만 끊습니다. (뚝) 아그들아 뭐하냐 전투준비 안 하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 어렵쇼... 뭐여 이거 꼬라지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겨? 우리가 여기서 흘린 피가 얼마인데... (핸드폰 들고 삑삑삑삑) 아 여보세요? 덴마크 국왕 폐하 되십니까?
발데마르 2세 : 야, 나 바빠 죽겠는데 뭔 일이야? 용건만 말해.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 교황 성하께 들었습니다. 리보니아 쳐들어가신다면서요.
발데마르 2세 : 그런데? 뭐? 니들이 다 처리하겠다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우리가 남쪽에서 밀고 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배 타실 건데 북쪽에서 공략하시죠. 저희도 폐하가 접수한 땅은 손 안 대겠습니다.
발데마르 2세 : (이거 괜히 싸움나기 싫다는 거구만...) 오케이 콜. 알아서 잘들 해보라고. 이만 끊는다. (뚝)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에스토니아가 점령되었는데... 보통 사람 일이 그렇듯이 이런 식의 영토분할은 무조건 분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지금도 구글 어스 등에서 제시한 선이라며 자기 영토를 주장하는 케이스가 있는 판인데(진짜로 있었습니다.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의 분쟁인 산 후안 강 분쟁, Costa Rica–Nicaragua San Juan River border dispute이 그것) 뭐 정확한 측량기술도 변변찮았던 당시라고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둘이 대판 싸워서 처음에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덴마크령까지 모조리 접수했는데,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에서 문자 그대로 개박살이 나 버리는 바람에 이 지역의 통치권을 상실할 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튜튼 기사단과 합쳐 리보니아 기사단이 되면서 북부 통치권을 다시 덴마크에 넘겨줍니다.
그래서 그 경계선이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냐? 그런 거였으면 더 글을 쓸 일이 없었겠습니다만...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뭐 보시다시피 이딴 꼴이라... 여기에서 어떻게 현대적인 에스토니아 국경이 나왔는지는 상상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입니다. 남쪽의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경계는 굉장히 명확한 편인데 말이죠. 그리고 앞서 언급했다시피 대부분의 지역을 리보니아 기사단이 석권했는데 얘들이 독일계다 보니 이 지역에 뜬금없이 독일식 지명이 여기저기 붙어 있게 됩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현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을 레발(Reval)로 불렀고, 패르누(Pärnu)는 페르나우(Pernau), 합살루(Haapsalu)는 합살(Hapsal) 등등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지도에 보면 리가 대주교령(Riga Archbishopric)도 있는데 이건 라트비아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죠. 지금 이야기하기에도 너무 난잡하지 않습니까.
이후 1346년에 덴마크령 에스토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덴마크가 이 지역의 관리를 기사단에게 팔아치우고 손 뗍니다. 그래서 리보니아 연합(Livonian Confederation)으로 한동안 튜튼 기사단에 딸린 영지로 지내게 되죠. 이게 또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국가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고 자치령으로 두기도 좀 그렇고... 유럽의 봉건시대를 잘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철저하게 계약을 바탕으로 한 관계라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따로 노는... 바로 그런 거죠.
그러다가 1500년대에 그 유명한 이반 4세, 일명 뇌제가 쳐들와 이 일대를 단디 휘젓고 갑니다. 이게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인데, 리보니아 기사단 측이 이기긴 이겼습니다만 이 때 기사단이 엄청나게 피해를 봐서 결국 기사단 편을 든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덴마크가 각각 전리품으로 리보니아를 나눠 갖는 모양새가 됩니다. 국경은 어떻게? 아까 그 덴마크와 리보니아 기사단이 갈라놓은 선과 비슷하게. 요렇게 말입니다...
이 전쟁도 한 25년 끌었습니다(1558 ~ 1583). 북부 에스토니아는 스웨덴령, 남부 리보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령, 그리고 바다 건너 섬인 사아마라(Saamaraa)는 덴마크령.
근데 여기서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1600년에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스웨덴이 선빵을 날려서 스웨덴-폴란드 전쟁이 터집니다(1600 ~ 1629). 시기를 보면 눈치채신 분들도 있을 텐데 당시 유럽은 30년 전쟁 발발 직전 시기. 그래서 이 전쟁을 30년 전쟁의 한 축에 끼워넣기도 합니다. 서로 오지게도 휘젓고 다닌 모양이에요. 그래서 에스토니아 인구가 말 그대로 반짝이 났습니다(전쟁 전 25만, 전쟁 후 12만). 이 전쟁의 승자는 스웨덴이었고 스웨덴은 남부 에스토니아와 북부 라트비아(...)를 스웨덴령 리보니아로 만들어 편입시키고, 남부 라트비아는 쿠를란트 공국으로 둡니다. 거 그놈의 국경선 참...
여전히 현대 국경선과는 동쪽을 제외하면 하나도 맞지 않는 위엄...
그리고 북유럽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대북방전쟁(Great Northern war, 1700 ~ 1721)이 터지면서 이번에는 스웨덴이 개박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러시아의 자치령이 됩니다. 이 당시 러시아를 이끌던 것이 그 유명한 표트르 대제입니다. 경계선은 어떻게? 당연히 스웨덴이 설정해 놓았던 행정구역대로. 그리고 이게 로마노프 왕조 내내 쭈~욱 이어지다가 2월 혁명으로 러시아가 폭싹 망하면서 에스토니아 자치령이 드디어 현재와 같은 국경선을 가지게 됩니다. 이상할 건 없던 게 당시 에스토니아 민족주의가 이미 1850년대부터 퍼져 있던 상황이었고 리보니아 북부는 주로 에스토니아 인들이 살고 있었거든요.
이 때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납니다. 소비에트 혁명군은 당연히 에스토니아 자치령 의회를 해산하는데 이걸 반가워할 에스토니아 인들은 없었겠죠. 그리고 때가 때다 보니 러시아 소비에트군은 독일군에게 개박살이 나서 줄줄 밀려났고, 이 짧은 틈에 - 그러니까 소비에트군이 철수하고 독일군이 진군해 오기 직전의 아주 짧은 틈 -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 날짜가 1918년 2월 24일이기 때문에 에스토니아에서는 아직도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기립니다. 마치 우리가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헌법에 박아놓았듯이 말이죠.
독립을 위한 대가는 엄청나게 컸습니다. 우선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독일군의 군홧발에 나라가 밟혔고, 독일이 1차 대전의 패전으로 물러가자 니들 땅은 여전히 내 꺼라고 주장하는 소비에트군에 맞서서 많은 피를 흘려야 했죠. 이게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입니다. 여기에 에스토니아에서의 독일계의 권리를 주장하는 병력(발트 향토방위군, Baltische Landeswehr)까지 겹쳐서 굉장히 힘든 싸움을 했는데, 어쨌든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 발트 향토방위군이 박살난 이후 해체를 감독한 게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에서 로멜의 아프리카 군단에 맞서는 총사령관 역을 맡은 해럴드 알렉산더 육군원수(Harold Alexander, 이 당시는 대령)입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콘스탄틴 패츠(Konstantin Päts)는 독재자로 변하여 아예 '침묵의 시기'(Era of Silence)를 만들어버릴 정도로 파시즘에 경도된 극우 독재 정권이 되었고, 소련은 에스토니아를 포기할 생각 따위 애초에 없었습니다. 저 유명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대가로 폴란드를 나눠갖고 소련이 발트 3국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으면서(누구 맘대로!?) 1940년 6월에 소련군이 발트 3국에 전격적으로 들이닥쳤죠. 이 때 발트 3국의 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이 투옥되고, 시베리아로 보내지고, 처형됩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이 지역을 단디 휘저으면서 에스토니아 역시 전쟁의 마수를 피해 가지 못했죠. 전후 에스토니아에 남아 있던 오랜 독일계고 뭐고 독일과 관련된 인물은 싸그리 추방되고, 에스토니아는 소련령이 되었다가...
발트 3국이 페레스토레이카를 기반으로 독립 선언을 하면서 드디어 독립국의 지위를 되찾습니다. 이 때 소위 말하는 '발트의 길'(Baltic Way)이라는 이슈가 있었는데요,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에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까지 이어지는 무려 700 km에 육박하는(675.5 km) 인간띠를 만든 것이죠. 당시 동원된 인구는 약 2백만 명 가량. 8월 23일 - 그러고 보니 다음주로군요 - 에 있던 이 행사로 이 날은 후에 발트 3국은 물론이고 전 유럽이 기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의 희생자를 기리는 날이 된 거죠. 이걸 노래 혁명(Singing Revolution, 에스토니아어 : Laulev revolutsioon)이라 합니다. 이렇게 1991년 8월 20일에 에스토니아는 완전히 독립하였고, 당연히 이 날도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의 국경일 중에는 다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스토니아 건국기념일(iseseisvuspäev) - 2월 24일.
에스토니아 광복절(taasiseseisvumispäev) - 8월 20일.
그리고 휴일은 아니지만 나치와 스탈린의 희생자를 기리는 날(kommunismi ja natsismi ohvrite mälestuspäev) - 8월 23일. 공교롭게도 이 날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성사된 날이기도 합니다. 아마 인간띠 행사를 하는 주최측에서는 분명히 노렸을 거에요. 그 해가 1989년이었는데 1989년 8월 23일은 몰로토프-리벤프로트 조약 50주년이었거든요.
역사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어떻게 된 게 에스토니아라는 나라는... 우리 나라로 치면 통일신라 - 한반도의 발해 모양을 수백년 동안 유지하다가 지금의 남/북한 경계선으로 독립한 꼴이죠. 그만큼 이 나라 저 나라 패권에 치인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극히 최근까지도 그랬죠. 우리 나라와는 어쩌면 비교할 수도 없는 오랜 기간을 이 나라 저 나라 - 독일,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그리고 러시아와 소련 - 손에 운명이 맡겨지는 역사를 살다가 드디어 현대에 와서야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지을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에스토니아 인들에게 있어서 광복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할까요?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에스토니아에 남아 있는 유적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 3가지만 추린 거에요.
유럽의 역사적인 도시들이 다 그렇다고는 합니다만 탈린 역시 중세적인 도시의 풍경이 잘 남아 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위키피디아 서술로는 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도시 중 하나라나요... 그리고 제 눈에는 다 엇비슷하게 보이긴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도 도시마다 조금씩 그 특색이 다른 점이 보이는 경우가 간혹 있거든요. 탈린이 그런 도시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미지 출처 위키트래블인데 약간 화질구지네요... 어쨌든 탈린의 구 시가지입니다. 이전에 소개드렸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구 시가지나 안도라의 산 속 구 시가지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죠. 이 구 시가지는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역시 이미지 출처 위키트래블. 네브스키 성당인데, 이름에서 짐작하시겠지만 러시아 정교회에서 러시아의 영웅인 네브스키를 기리기 위하여 만든 성당입니다. 근데 러시아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보니, 일부에서는 시선이 그리 곱지많은 않아요. 음, 조선 총독부 건물 내지는, 일본식 신사가 우리 나라에 세워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느낌인 거죠. 그래서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당시 크게 박살이 난 적이 있죠. 그리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소비에트는 그걸 그대로 내버려뒀는데,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면서 다시 개수했다는군요.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이 궁전은 카드리오그 궁전(Kadriorg Palace)이라 하여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훗날 차르의 자리에 오르는 아내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하여 지은 궁전입니다. 여름 별장이었다나요.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나머지 관광지는 맨 뒤에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말씀드리죠.
에스토니아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어떤 걸 찾을 수 있을까요? 흠... 특이하게도 세금 제도가 좀 흥미롭더군요.
모 언론에서(XX경제) 에스토니아가 세금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모두들 잘 사는 거 보면 기업에 부과된 세금을 없애야 결과적으로 잘 사는 거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게 있나 봅니다. 검색해 보니 바로 나옵니다만(블로그 주소 첨부합니다.
http://nasica1.tistory.com/101) 내용을 함부로 전재하는 건 좀 문제가 있으니 영문 위키피디아를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Flat tax라고 해서... 특이하게도 고정세율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살건 못 살건 세금비율은 똑같이 내라 이겁니다. 당장 생각해 보면 물론 잘 사는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내기는 하겠지만...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에스토니아의 고정세율은 20%이니 20%라고 이야기해 보죠. 일 년에 10억을 버는 사람은 2억을 세금으로 냅니다. 일 년에 1천만원을 버는 사람은 2백만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물론 고위층에서는 이것도 많다고 투덜대겠지만, 솔직히 10억 중 2억을 세금을 내도 8억이 남고, 고위층이 2억을 내서 당장 굶어죽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 년에 1천만원을 버는 저소득층은? 저 같은 월급쟁이에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10만원 20만원 급여 깎이는 건 크게 와닿는데, 저소득층에게는 얼마나 크게 와닿을지 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네요. 이런 고정세율제는 사실은 부자들을 위한 세율이죠.
그런데 어떻게 나라가 굴러가느냐? 사회보장제도의 영향으로 사실상 누진세의 모양새를 띄고 있기 때문이죠. 보육, 연금, 직업병 및 산재 등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됩니다. 세금이 공제되는 항목도 많은데 주택대출이나 교육비용, 선물(주식의 그 선물이 아니라 Gift), 기부, 실업보험 등등에서 세금이 공제되는 거죠. 그리고 당연히 여기에는 상한선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고정세율을 채택하고 있는데도 나라가 굴러가는 거라고 봐야 합니다.
땅값 세율도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땅을 가지면 그 땅의 가치에 대해서 일정 비율만큼 세금으로 내게 되는 거죠. 건물이니 뭐니 그딴 거 필요없고 오직 땅값만 가지고 평가합니다. 심지어 이건 공공기관이라도 무조건 내야 하는 세금입니다. 세율은 최저 0.1%에서 최고 2.5%. 최고 세율은 당연히 탈린이겠죠. 이건 지자체의 중요 주 수입원이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부동산 놀이를 함부로 못 하는 탓에 에스토니아의 자택 보유율은 90%가 넘는다는군요(미국은 67% 정도).
그리고 양도소득세가 없습니다. 어맛 그러면 부자들이 자기 돈을 다 양도해 버리고 거지 행세를 하면 장땡 아님!? 그런 걸 에스토니아에서 고려 안 할 리가요. 양도소득세는 없는데, 그렇게 넘겨받은 재산은 모두 수입으로 규정되어 거기서 세금을 떼 갑니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세금의 상당수는 소비세에서 충당한다는군요.
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마지막으로 식샤 이야기를 해 봅시다.
에스토니아는 여기저기에 점령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니 그 여기저기에 해당하는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 독일의 영향을 여러 모로 받은 편입니다. 주 요리 재료는 고기류와 호밀빵, 감자 그리고 유제품. 사실 발트 3국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발트 해가 바다이다 보니 좀 해산물 요리 같은 걸 떠올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에스토니아 요리는 어느 정도 대륙성이라는 거죠. 물론 바다에 면한 나라이고 제주도보다 큰 섬 하나와 제주도 절반만한 섬 하나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보니 해산물 요리가 없을 리가 없습니다만.
전채 요리로는 소시지나 고기에 감자 샐러드 또는 로솔예(Rosolje)라고 하는 샐러드가 곁들여져서 나온다 합니다. 로솔예는 감자와 비트(Beet)라고 하는 식물의 샐러드죠. 근데 이게 거의 스웨덴의 실살라드(Sillsallad)와 똑같다는군요. 그리고 피루카드(Pirukad)라 하여 페이스트리가 나오기도 하는데 속에 있는 내용물은 고기, 양배추, 당근, 쌀을 주로 하고 그 외에 이것저것 넣는 모양입니다. 찍어먹으라고 육수도 같이 나오나 봐요. 청어도 종종 나오고, 훈제 혹은 염장 장어, 바닷가재, 수입산 게와 새우 등도 별미. 아 갑자기 새우 하니까 통새우버거가 땡기네요... 야밤에... 어흑 이외에 래임(Räim)이라 하여 발트 해의 조그만 청어를 (우리가 빙어 요리해 먹듯이) 먹는 게 전통요리라고 합니다. 도더리와 농어도 자주 올라온다고 하네요. 전채 요리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서 수프는 프랑스에서는 질이 낮은 음식이라 소개했던 바 있는데 에스토니아는 그게 아닌가 봅니다. 물론 본요리 전에 나오기도 하지만 보통은 본요리로 대접이 된다 하네요. 레이바수프(Leivasupp)라 하여 검은 빵과 사과를 베이스로 하고 휘핑크림 또는 사우어 크림을 올려서 내는 요리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검은 빵을 요리에 쓰는 걸 보면 아시겠지만 에스토니아에서 검은 호밀빵은 대단히 보편적인 음식입니다.
후식으로는 과일음료나 치즈 또는 카마(Kama)라고 하여 밀가루에다가 버터나 우유 등을 이것저것 섞어서 만든 요리가 나온다고 하네요. 뭐 이것저것 후식의 종류가 있는데 대부분 크림과 밀가루가 주 소스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후식문화가 그렇게까지 발달한 건 아니에요. 워낙 북쪽이다 보니 춥고, 바다는 겨울이 되면 얼어붙는 - 이거 농담이 아닙니다. 염분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탓도 있긴 합니다만 - 당시로선 극한의 환경에서 잘 먹는 것보다는 일단 먹는 게 중요했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그리고 에스토니아 요리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거 하나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베리보르스트(Verivorst)라고 에스토니아의 선지 소시지인데 어디서 많이 보던 거 아닙니까? 딱 생긴 게 우리 나라 순대 아닙니까. 다만 우리가 쌀을 쓰는 대신 서양에서는 안에 별의별 곡물과 함께 고기, 옥수수 가루 등등을 넣는다고 하네요. 전세계적으로 선지 소시지가 없는 나라가 별로 없다지만 퍽이나 생긴 게 똑같이 생겨먹어서 여기에서 소개해 보았습니다.
아 맞다, 글 끝내기 전에 잠깐. Skype 다들 아시죠? 그 화상통화 프로그램. 그거 만든 데가 에스토니아입니다. 프리트 카세살루(Priit Kasesalu)와 얀 탈린(Jaan Tallinn)의 작품. 거 참 이름 묘하네요... 얀 탈린... 이름에서부터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들어가다니.
아까 탈린의 세 유명한 관광지를 소개했는데 여러 다른 곳의 관광지를 추가로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탈린 시의 야경입니다. 현대적인 건축물과 중세의 건축물이 섞여 있는 모양이 퍽이나 이색적이죠. 출처 위키피디아.
제2의 도시 타르투(Tartu)의 구 시가지. 출처 위키트래블. 타르투 역시 탈린만큼이나 오래 된 도시인데 이쪽은 교육도시 내지는 대학도시 쪽에 가깝습니다.
제3의 도시 나르바(Narva)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인데, 왼쪽이 나르바 성이고 오른쪽은 러시아의 이반고로드(Ivangorod) 성입니다. 나르바 성은 정확히 말하면 헤르만 성(Hermann Castle)입니다.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리보니아 기사단에 의해 세워진 성이고, 나르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는 요새가 만들어진 거죠. 나르바는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국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헤르만 성의 야경.
패르누(Pärnu)의 해변. 에스토니아 서쪽의 발트 해에 면해 있는 패르누는 여름에도 그다지 덥지 않은 온도(7~8월 평균 기온이 서울보다 무려 10도 가량 낮습니다) 덕분에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는 도시입니다...만, 올해 전세계를 강타한 폭염에는 어떻게 되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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