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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1/29 18:33:46
Name 글곰
Subject [일반] (시와 시) 자화상, 서시 (수정됨)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젊어서는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으며, 해방 후에는 전두환에게 축시를 지어 바쳤습니다. 항상 위에다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거만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놈들이 오래 산다 하였던가요. 그는 무려 팔십오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며 그 오욕으로 범벅된 이름 석 자를 선명히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다츠시로 시즈오. 혹은, 서정주.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가장 적절한 시어를 가장 적절하게 조합했고, 그 사이사이의 결마다 자신의 심상을 녹여내어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동시에 그는 저열한 소인배였습니다. 친일행적에다 군사정권 찬양이라는 양대 업적은 한때 그를 존경했던 수많은 후배들이 그를 떠나도록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딱히 부끄러워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의 제자이자 소설가인 조정래는 한 문학지의 특집기사를 통해 친일행각을 벌인 문인들이 뒤늦게나마 사죄할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그러나 그 제안을 들은 서정주는 노발대발하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조정래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두 시간 동안의 장광설을 통해 스스로를 변명했다고 하지요. 허.  

  바로 여기, 거대한 모순의 결정체가 있습니다. 위대한 시인과 비열한 소인배의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닌 자가 남긴 걸작입니다. 어쩌면 이 시는 마치 스스로를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하고요. 그러나 이 시는 그가 창씨개명을 하기도 전인 스물세 살 때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더욱 역설적으로 느껴지지요.

  그래요. 어쩌면 스스로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기라도 했던 것처럼요.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서정주의 동년배이자, 그와 비견될 정도로 위대한 시인이며, 인간으로서는 결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입니다. 서정주가 팔십오 년을 살아온 반면, 그는 그 절반은커녕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서정주의 인생이 오욕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이 시인의 인생은 그야말로 순백의 비단처럼 빛납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시인이라 칭하지만 그의 삶은 독립운동가의 그것이었습니다. 그의 시가 출판된 것은 그가 이국의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이후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윤동주입니다.

  윤동주의 삶은 딱히 설명할 내용조차 없을 정도로 간결합니다. 그건 대체로 그의 삶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입니다.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난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고등학생 고희욱과 함께 한국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조직을 구성하다 발각되어 체포당합니다. 그는 옥중생활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1년 7개월만에 눈을 감았는데 안타깝게도 독립을 불과 반 년 앞둔 때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일제의 인체실험의 결과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짧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시는 한국어를 쓰는 이들에게 주어진 찬란한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시(序詩)]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훌륭한 시가 많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별 헤는 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굳이 가장 유명한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정주가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겠다고 뻔뻔스레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부끄러움과 치욕을 알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윤동주라는 시인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좀 저속하게 비유하자면 [자화상]이 두둥 하고 나타났을 때 그걸 가장 맛깔나게 받아쳐서 서정주를 묵사발로 만들 수 있는 시가 바로 [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시를 이토록 천박한 어휘로 설명하고 있는 제 스스로가 한심해지는지라,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그저 감상하시지요. 시대를 초월한 윤동주의 걸작입니다.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추가) 아래 OrBef 님의 댓글을 보고 감명받아 나름대로 몇 자 더 적어 봅니다.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워요. 그러면서도 탐미적이지 않고 담백하지요. 마치 대지에서 한 뼘쯤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현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감탄스럽다는 거지요. 이야. 이런 사람이 있다니. 이 세상도 살아볼 만하겠구나. 그런 느낌입니다.

반면 서정주는 격렬한 몸부림 같습니다. 진흙탕에서 적과 드잡이질하는 늑대 같다고나 할까요.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고, 적을 노려보다, 격렬한 몸싸움으로 뒤엉키며 피가 뒤섞인 진흙을 사방으로 뿌려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의 본질이라 할 만한 근원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육강식. 혹은 적자생존. 서정주가 일제나 전두환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것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자연의 법칙에 철저히 순응했거든요. 그의 시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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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29 18:53
수정 아이콘
시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지라 저 시들이 얼마나 위대한 지는 솔직히 잘 느끼지 못 하겠지만, 말씀듣고 보니 전자는 도덕 상대주의자 후자는 이상주의자가 쓴 글 같이 다가오긴 합니다. 근데 전자라고 꼭 부패하는 것도 아니고 후자라고 꼭 평생 고결하게 사는 것도 아닌 지라, 서로 반대의 시를 썼다고 해도 나름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유스티스
17/11/29 19:28
수정 아이콘
비슷한 소감입니다. 마지막 문장 그대로...
사악군
17/11/29 19:33
수정 아이콘
이럴땐 댓글추천기능 생각이 납니다.
17/11/30 09:42
수정 아이콘
그렇지요. 사실 아주 냉소적으로 보자면, 윤동주가 찬양받는 이유는 별다른 죄를 짓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가 오래 살아남았더라면 독립운동가로서 독재정권을 지지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건 그저 가능성의 영역일 뿐이니까요.

순수하게 시로만 두 사람을 보자면 OrBef님의 표현이 참 적절합니다.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워요. 그러면서도 탐미적이지 않고 담백하지요. 마치 대지에서 한 뼘쯤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현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감탄스럽다는 거지요. 이야. 이런 사람이 있다니. 이 세상도 살아볼 만하겠구나. 그런 느낌입니다. 그러니 도덕적 이상주의자라는 표현이 참 좋네요. 반면 서정주는 격렬한 몸부림 같습니다. 진흙탕에서 적과 드잡이질하는 늑대 같다고나 할까요.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고, 적을 노려보다, 격렬한 몸싸움으로 뒤엉키며 피가 뒤섞인 진흙을 사방으로 뿌려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의 본질이라 할 만한 근원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육강식. 혹은 적자생존. 서정주가 일제나 전두환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것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자연의 법칙에 철저히 순응했거든요. 그의 시처럼 말입니다.
Daybreak
17/11/29 19:1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좋은 시. 감사합니다.
17/11/29 19:37
수정 아이콘
서정주는 라캉, 윤동주는 칸트 같군요. 개인적으로 사상가로서는 라캉보단 칸트를, 문학인으로서는 윤동주보단 서정주를 더 좋아합니다.
17/11/29 20:18
수정 아이콘
서정주가 친일을 시작한 건 1942년. 그의 나이 28세 때부터였는데요.. 최재서의 주선으로 친일잡지 편집을 맡았을 때부터죠. 이십대 초반의 서정주는 서울에 올라와서 정말 거지처럼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서정주가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도 거지 생활 하다가 어떤 주지 스님 눈에 띄어서 중이 되고 나서부터고...그래서 스물 세살의 서정주는
정말 개처럼 헐떡어리며 온 거고..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는 말은 뻔뻔스럽기보다는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갖은 고생 다 한 이십대 초반이 보여줄 수 있는 결기의 표현이죠. 이때까지는..이때까지는 말입니다.
유지애
17/11/29 20:23
수정 아이콘
서정주...참 애증의 이름입니다...
친척의 명예를 위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려니 드루뭉실한 말밖에 할 수 없네요
제 삶의 아득히 먼곳에 스치우듯 드리워진 인연의 끈이 느껴질때면 참 씁쓸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저격수
17/11/29 21:57
수정 아이콘
서정주의 자화상은 너무 좋아해서 외웠습니다. 현실적이고 처연한 모습과, 그에 합쳐진 미래의 친일파 서정주의 모습까지 그려지면서 감정이 묘하더라고요. 세상에 꺼내는 출사표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시민이다" 라는 선언문에 가까웠습니다. 대문학인 서정주는 이미 소시민이 아닌,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는 이였지만 그의 영혼은 소인배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TheLasid
17/11/29 22:17
수정 아이콘
작품과 저자의 삶 사이의 괴리는...참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문제인 듯해요. 너무나 멋진 글을 쓴 사람이 너무나 멋 없는 행동을 한 사람일 때 저는 놀랍니다. 가만 보면 엄청 자주 놀라요. 슬프지만, 그런 게 인간인 듯합니다.
젤나가
17/11/29 23:26
수정 아이콘
서정주는 친일만 아니었으면 한국 현대시 올타임 넘버원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았을텐데 참 재능을 보면 볼수록 너무 아깝더라구요
17/11/30 09:44
수정 아이콘
서정주의 시에서 느껴지는 힘, 자연의 근원적인 힘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하지요. 스물일곱에 시집을 내고 바로 요절했더라면 그 누구도 그를 한국 현대시의 사조로 추앙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독수리가아니라닭
17/11/29 23:27
수정 아이콘
시 자체로 보면 한국사 전체를 다 뒤져도 서정주를 따라잡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때 <문둥이>라는 시를 잃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지금 보면 영락없는 차별적 내용이지만)
진짜 인성이 필력의 10분의 1만 따라왔어도...
하다못해 입에 발린 참회의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렇게 처량한 최후를 맞고 부정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마스터충달
17/11/30 00:09
수정 아이콘
정지용.... 정지용 파 없습니까?
17/11/30 09:45
수정 아이콘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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