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9/03 14:20:26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남자는 며칠 후에 입대한다고 말했다.


 남자는 며칠 후에 입대한다고 말했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제대한 남자들이 입대를 목전에 둔 남자들에게 던지곤 하는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농담들을 건넸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입대는 유쾌한 일이 아니겠지만 젊음이란 유쾌한 것이다. 나도 입대와 젊음을 거쳐 왔으니 잘 알고 있다. 물론 거쳐 왔다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겠지만.
 여자가 웃었다. 눈에 익지 않은 얼굴이었다. 얘, 훈련소까지 데려다주기로 약속했는데 이거 어쩌죠, 얼마 전에 얘랑 헤어졌는데. 그날 얘 부모님 차를 얻어 타고 가게 되었네요. 갈 때는 그렇다 쳐도 올 때는 어쩐다? 올 때 혼자서 얘 부모님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려나요. 헤어졌다고 말하면 내리라고 하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만약에 대비해서 올 때 차비를 들고 가세요.
 나는 실없는 농담과 술잔을 건넸다. 모든 바텐더들이 실없는 농담을 건네지는 않지만, 나는 그러는 편을 선호한다. 할 말이 없을 때는 더욱. 그렇게 우리는 진담과 농담을 섞었다.
 ‘사실 얼마 전에 댁의 아드님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댁의 아드님의 잘못으로. 이렇게 말할까요?’ 여자가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반 정도는 농담일 것이고 반 정도는 진담일 것이다. 진담이 반을 좀 넘을지도 모르고 농담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 일인가. 그렇게 나는 술을 건넸고 그들은 술을 마셨다. 나는 잠시 다른 주문을 처리하고 바로 돌아왔다.

 여기서 데이트를 해 보고 싶었다네요.
 여자가 말했다.
 ‘얘, 저랑 사귈 때도 혼자 여기 자주 왔다는데. 저도 몇 번 따로 왔었고. 그러다가 얘가 여기서 데이트 한번 하자고 몇 번 말했는데. 어쩌다 보니 사귀고 있는 동안에는 같이 올 기회가 안 났네요. 그러다가 헤어져버렸고. 입대하면 언제 다시 볼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얘가 입대하기 전에 이렇게 같이 오게 되었답니다.’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들을 좋게 받아들일 줄 아는 긍정적인 친구로군.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와 미뤄둔 데이트를 하는 것도, 그 헤어진 여자친구와 훈련소에 함께 가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래도 웃으며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사귐과 헤어짐의 경계와 상관없이 남아 있는 어떤 아름다운 감정들의 힘일까. 혹은 그저 입대를 앞두고 정신줄을 아예 놔 버린 걸까. 모르겠다. 구체적인 사정을 탐구하는 것은 바텐더의 일이 아닐 것이다.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다. 바쁜 주말이로군. 나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주문을 처리했다. 한 차례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유쾌한 이야기로군요. 가끔씩 바에서 일어난 유쾌한 일들을 에세이 비슷하게 정리해서 여기저기 쓰기도 합니다. 혹시 이 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여자는 웃으며 손으로 OK사인을 보였고,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동의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만 이런 제안을 한다. 아, 그들이 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제안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유쾌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동의하리라 생각한 거지. 그래서 이렇게 지나간 이야기를 쓴다.

 그들은 유쾌하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다가 적당한 시간에 나갔다. 물론 그들은 바에서 좀 더 유쾌하고 좋은 다른 일들도 했지만,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는 둘만을 위한 비밀로 남겨두도록 하자.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지나가던선비
16/09/03 15:58
수정 아이콘
밀린 데이트를 헤어지고 나서 한다.. 정말 간절히 그래보고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ridewitme
16/09/03 17:03
수정 아이콘
읏 잼잇어요
16/09/03 21:22
수정 아이콘
오지랖좀 떨자면 이상한 관계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재미있는 관계네요. 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7417 [일반]  돌아온 윤창중, 이 시점에 “조선일보 기득권 혁파” [32] 어강됴리8452 16/09/04 8452 3
67416 [일반] [의학] 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은 정말 ADHD를 유발하는가? [28] 토니토니쵸파8005 16/09/04 8005 22
67415 [일반] 리버풀감독 위르겐 클롭의 인터뷰 발언이 파이어났군요. [78] naruto05112970 16/09/04 12970 1
67414 [일반] 어느 역무원의 하루 ㅡ 땜빵맨 [15] 부끄러운줄알아야지5087 16/09/04 5087 8
67413 [일반] 악어떼 [1] 쎌라비2874 16/09/04 2874 0
67412 [일반] [스포츠] 군복무에서 돌아온 그들 변수가 될 수 있을까 #1. 경찰청 [37] 인사이더5900 16/09/04 5900 0
67411 [일반] 안녕하세요 가입인사 드립니다 [33] 보들보들해요4603 16/09/04 4603 11
67409 [일반] 스포츠/연예 게시판(가칭) 관리자를 뽑습니다. (지원 현황 2/7) [31] OrBef6041 16/09/04 6041 4
67408 [일반] [데이터 약주의] 바르바로사 작전 (10) - 중부 집단군 (2) [11] 이치죠 호타루5879 16/09/03 5879 6
67406 [일반] 구글의 프로젝트 "아라(Ara)"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네요... [34] Neanderthal11860 16/09/03 11860 2
67405 [일반] 북경대 교수 "사드 배치의 근본적인 원인은 북한의 핵개발" [25] 군디츠마라6938 16/09/03 6938 8
67404 [일반] 오늘 발표한 정의당 당내논쟁과 관련한 특별 결의문 [211] 아리마스15276 16/09/03 15276 5
67402 [일반] 음악은 아나? [10] 시지프스4189 16/09/03 4189 1
67401 [일반] [MLB] 올시즌 아시아인 타자들 현재까지 성적 [44] 비타10008315 16/09/03 8315 2
67400 [일반] 댓글은 소통인가? [37] 어강됴리7018 16/09/03 7018 7
67399 [일반] 메갈리안 이슈는 왜 유독 이렇게 크게 폭발했는가 [58] 연환전신각9789 16/09/03 9789 22
67398 [일반] 남자는 며칠 후에 입대한다고 말했다. [3] 헥스밤4462 16/09/03 4462 18
67397 [일반] 고양이와 두꺼비는 왜 밤눈이 밝은가? [19] Neanderthal7683 16/09/03 7683 24
67396 [일반]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독후감) [18] 너른마당7554 16/09/02 7554 2
67395 [일반] 결혼합니다. [175] 열혈둥이12579 16/09/02 12579 161
67394 [일반] 내가 요즘 꽂힌 미국 오디션 프로 , 더 보이스 us ( 스포 ) [6] Survivor7850 16/09/02 7850 0
67393 [일반]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 [17] 삭제됨8818 16/09/02 8818 1
67391 [일반] 짜장 나눔합니다.(종료) [79] stoo7074 16/09/02 7074 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