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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8/20 21:54:53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영화공간] 봉준호 - 배우를 마음껏 유린할 줄 아는 감독
*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영화공간] 봉준호 - 배우를 마음껏 유린할 줄 아는 감독  


봉준호 감독이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배우를 다루는 그만의 방법, 이른바 [디렉터봉의 배우 조련법]의 핵심 키워드를 나는 '유린'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봉감독은 항상 배우들과의 작업을 통해 그 배우가 가진 색다른 모습, 이른바 의외성과 잠재성을 끌어내는데 주력한다. 즉, 그동안의 연기 인생을 통해 자신이 지금껏 잘해왔던 걸 그대로 잘해내는 배우가 아니라, 지금껏 보여주지 못한 의외의 모습과 본인도 미처 몰랐던 새로운 면을 끌어내는 배우의 모습에서 쾌감을 느낀 달까.

이러한 봉준호 감독의 특성은 그가 평소 강조하는 '변태성'과도 적절히 맞닿아 있다. 봉감독 스스로 "나에게 변태성이란, 창의성과 같은 의미"라며 설명하는 본인만의 독특한 시각에 비추어보면, 이른바 봉준호의 '변태성'이란 단순히 작품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창의성뿐만 아니라 배우의 색다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통해 느끼는 연출가적 희열을 포괄하는 단어라고 보인다. 결국 봉준호가 배우들을 무장해제 시키며 마음껏 유린(?)할 수 있는 데에는 그만의 고유한 천재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출가로서의 섬세하고 치밀한 연출력이 큰 몫을 하지 않을까. "봉준호 감독은 천재 중의 천재"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던 크리스 에반스의 인터뷰 내용을 떠올려보면 배우들에게 봉준호라는 브랜드는 단순한 명감독을 넘어, 일종의 경탄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싶다.

1. 봉준호와 송강호 - 거장은 명배우를, 명배우는 거장을 만든다.  


그럼 우선 봉준호의 페르소나라 불리는 배우 송강호에 대해 얘기해보자. 배우과 감독의 관계에서 감독과 호응하는 배우의 자세 혹은 성향을 거칠게 분류하자면, 우선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감독과 맞서 싸울 줄 아는 배우가 있고, 감독에게 마음껏 유린당할 줄 아는 배우가 있다고 본다. (물론 이 둘이 적절히 섞여 있는 유형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전자의 대표적 배우가 김윤석이라면, 후자의 대표적인 배우가 송강호가 아닐까. 물론 둘 중 어떤 성향이 더 낫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감독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배우의 스타일을 큰 틀에서 거칠게 구분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프로레슬링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상대 선수의 기술을 반격기로 잘 '받아치는' 선수가 있고, 좋은 합으로 잘 '받아주는' 선수가 있듯, 배우와 배우들의 관계 혹은 배우와 감독 사이의 관계에도 이러한 힘의 균형과 상대적 궁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같은 차원에서 대한민국 배우 가운데 감독이 거는 기술(?)을 가장 잘 '접수'할 줄 아는 배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송강호이다. 송강호는 작품과 캐릭터마다 본인의 아우라와 배우적 존재감을 짙게 드러내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영화 <밀양>에서 보여준 것처럼) 작품과 캐릭터에 따라 스스로를 감출 줄 알고 숨길 줄 아는 동물적 감각과 배우적 본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감독-배우간의 궁합 측면에서) 김윤석보다 송강호가 봉준호에게 더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은, 배우들이 마음껏 뛰어놀도록 판을 깔아주는 최동훈 스타일이기보다는, 디테일하고 치밀한 디렉팅으로 배우들을 철저하게 괴롭히며 조종하는 마리오네뜨 스타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배우 송강호의 가장 큰 강점은 이러한 '접수' 차원, 즉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작품 속에 녹아드는데서 그치지 않고 감독조차도 의도하지 못했던 색다른 차원의 경지를 선보인다는 데에 있다. 가까운 예로, 영화 <살인의 추억>의 클라이맥스인 터널씬을 3일 앞두고 봉감독은 송강호에게 "두만이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게 될 것 같다."라며 중요한 대사를 준비해줄 것을 주문했고 이러한 감독의 요구에 호응해 탄생된 두만의 명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배우 송강호의 클래스를 입증하는 씬이자 거장이 어떻게 명배우를 탄생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2. 봉준호와 김혜자 - <마더>, 죽어있던 그녀를 깨우다.


"첫 촬영 때 똑같은 장면을 18번을 찍는데, 내가 진짜 연기를 못하나보다, 나 때문에 영화를 망치면 어떡하나, 별걱정을 다했다. 5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포기를 모르는 감독이고 그 덕분에 힘들어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영화 <마더>를 통해 봉준호 감독과 만난, 연기 경력 47년의 대배우 김혜자가 <마더> 제작보고회에서 밝힌 소회이다. 영화 <마더>를 찍기 오래 전부터 봉준호는 아무도 발견해내지 못한 배우 김혜자의 또 다른 모습(봉감독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녀의 내면에 감춰진 파괴력)에 주목했고 <마더>라는 작품을 통해 결국 이것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기는데 성공한다. 브라운관 속에 갇혀있던 대배우 김혜자가 봉준호와의 만남을 통해 변신에 성공하며 관객들에게 놀라운 전율로 다가선 것이다.

47년 연기생활의 대부분을 브라운관에서 드라마와 함께 보낸 배우 김혜자가, 천재감독이자 변태감독인 봉준호와 처음 작업하며 받았을 배우로서의 스트레스는 아마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답게 봉감독의 디렉션에 온몸을 맡기며 적극적으로 무장해제 된 채로 본인의 연기 내공을 마음껏 뿜어내고 펼쳐냈다. 바로 이러한 순간들이, 이른바 김혜자가 배우로서 평생을 쌓아온 것들을 깨끗이 비워낸 채로 <마더>의 엄마로 다시 태어나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인 순간이야말로, 배우 김혜자의 연기 인생에서 또 하나의 정점을 찍은 터닝 포인트이자 봉준호 감독의 집요한 천재성과 변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3. 봉준호와 틸다 스윈튼 - 변태 감독, 변태 배우를 만나다.


배우들은 때에 따라 감독의 무리한 요구에 부담을 느끼거나 움츠리기도 하며 또 때로는 감독보다 한 술 더 떠 공격적으로 캐릭터를 파고들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설국열차>에서의 봉준호와 틸다 스윈튼의 만남은 그야말로 최상의 궁합이자 환상의 짝꿍이 아니었을까. 틸다 스윈튼은 이른바 전형적인 '즐길 줄 아는 배우'이다. 물론 이러한 '즐김'의 바탕에 탄탄한 연기 내공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당연지사.

하지만 또 한 가지, 이러한 '즐김'의 원천에는 본인을 '프로'라고 칭하지 않는 자유로움, 그리고 영화 촬영 현장을 '놀이터'라고 표현하는 편안함과 여유가 자리 잡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녀 입장에선 한마디로, 놀이터에 왔으니 즐겁게 놀다 가면 그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배우 틸다 스윈튼은 봉감독이 제시한 열차의 2인자 메이슨이라는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흡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심지어 봉감독이 말릴 정도로 독특한 분장에까지 열을 올리며 자신의 외모를 망가뜨리는데 주저하지 않는 끝없는 열정을 선보인다.

뭐랄까, 한마디로 그녀는 연기의 재미를 아는, 두려움 없는 배우처럼 보인다. 봉감독의 (디렉팅을 가장한) 유린을 부담스러워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린당하면 유린당할수록 즐거워하며 마음껏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줄 아는 배우로서의 변태성(?)을 그녀는 지니고 있다. 이렇듯 배우를 무장해제 시킨 채로 마음껏 유린하고 헤집어놓으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 감독과 이러한 감독의 유린을 즐기며 한 술 더 떠 파고들며 재미를 느끼는 변태 배우의 만남은 결국 '메이슨'이라는 독특하고 멋진, <설국열차> 최고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마치며 - 봉준호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힘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핵심은 봉준호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힘이다. 봉준호 감독은 배우들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자신만의 그림과 프레임이 머릿속에 명확하고 확고하게 박혀있으며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무섭도록 놀라운 치밀함과 특유의 자신감은 봉테일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촬영 현장에서 힘을 발휘한다. 결국 하나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려내고 싶은지, 또한 배우들의 어떤 모습을 이끌어내고자 하는지 감독 본인만의 구체적인 목표와 그림이 명확한 봉준호에게 배우들은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신뢰는 감독의 요구를 120%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열정으로 자연스레 치환된다.

결국 배우들이 봉준호 앞에서 연기의 벽과 허물을 스스럼없이 벗어던질 수 있는 데에는, 봉준호라는 지휘자, 이른바 대한민국 상업영화판 최전선에 서 있는 최고의 감독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경외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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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0 22:06
수정 아이콘
오, 좋은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츄지핱
13/08/20 22:42
수정 아이콘
설국열차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감독 봉준호와 배우들의 이야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Eternity
13/08/21 09:07
수정 아이콘
<설국열차> 이야기는 차고 넘치도록 많아서 (저도 리뷰를 쓰기도 했구요 흐흐)
이제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더라구요.
王天君
13/08/20 23:31
수정 아이콘
Eternity님은 배우의 면면에 초점을 맞춰서 영화를 보시는 경향이 있으시군요. 전 연기는 해본 적도 없고 객관적으로 따지기가 어려운 부분이라 "연기 짱" 이라는 찬양일색으로 빠질 것 같아서 그런 글을 못쓰겠던데, Eternity님의 연기에 관한 과감한 평을 보면 내심 신기합니다.
모름지기 비평이라 함은 배우들의 안좋은 점을 신랄하게 까야 제맛 아닐까요? 흐흐 배우들의 약점을 파헤치는 글 또한 기대해봅니다.
Eternity
13/08/21 09:14
수정 아이콘
王天君님의 말씀을 듣고 제 지난 글들을 돌아보니 그렇네요. 대부분의 [영화공간] 주제들이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을 보면 제 관심사가 뚜렷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연기 이론이나 연출 이론에는 문외한인 평범한 문과생 출신입니다.^^; 다만 영화를 보다보면 궁금증이 많이 생기다보니 이런 저런 인터뷰나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보며 글을 쓰곤 해요. (저도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영화만 달랑 보고 감독과 배우에 대한 무언가를 분석해내기는 어렵더군요.)

참 근데, 배우들의 약점을 파헤치는 글을 저도 써보고 싶긴한데.. (종종 리뷰로는 영화를 신랄하게 혹평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제가 워낙 명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보니 딱히 약점을 파헤치기 힘들긴 하네요. 아쉬운 점은 있어도 혹평할 만큼 눈에 띄는 발연기도 거의 없어서 말이죠. 반대로 얘기하면, 신랄하게 까일만큼 구멍이 많은 배우들에 대한 얘기는 아예 언급을 잘 안하는 터라-_-;
하지만 동의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모름지기 비평은 까야 제맛이죠 흐흐
모래강
13/08/20 23:46
수정 아이콘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WhyDoWeFall?
13/08/21 00:44
수정 아이콘
설국열차를 꽤 재밌게 봤는데, 딱 한가지 아쉬운게 있다면 틸다 스윈튼과 송강호씨가 '합'을 맞추는 장면이 없는것이였습니다.
봉준호 감독 말대로 송강호씨와 틸다 스윈튼 두 사람을 무인도에만 내려다놔도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가 될꺼같은데 말이죠.

봉준호 감독이 틸다 스윈튼을 '여자 송강호'라고 표현한 것에는, 아마도 송강호씨를 통해서 맛보았던 자신의 변태성을 틸다 스윈튼이
최상으로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봉준호 감독이 배우 개개인이 찾지못했던 잠재성을 끌어내는 감독이라면, 박찬욱 감독은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쪽으로의
잠재성을 극대화 시키는 감독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폭력성' '악마적인 모습'과 같은 '어두운 영역'을요.
'스토커'의 '미아 바시코브스카' '박쥐'의 '김옥빈'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씨 등등, 어떻게 보면 박찬욱감독도 '변태성'을 가지고
있는듯 하네요. 하하.
New)Type
13/08/21 04:20
수정 아이콘
박찬욱 감독은 필모를 훑어보면 '진짜 변태'라는 생각만...
벨리어스
13/08/25 11:57
수정 아이콘
어디 인터뷰에서였던가 본 것입니다만, 안그래도 틸다 스윈튼이 봉감독에게 '영화 상에서 송강호 캐릭터와의 대화 씬을 찍고 싶다' 라고 의사를 밝혔는데 봉감독님이 정중히 거절을 했다던가, 그랬다고 하더군요.
Eternity
13/08/21 09:22
수정 아이콘
WhyDoWeFall?님과 New)Type님의 말씀에 둘다 공감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장기는 배우들의 악마성(?) 혹은 '어두운 내면'를 이끌어내는 것이죠.
동시에 New)Type님 말씀처럼 박찬욱 감독 자체가 진정한(?) 변태-_-가 아닌가 합니다.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박쥐>를 한편의 찐한 로맨스로 정의내린 것만 봐도 박찬욱의 변태성을 확인할 수 있죠. 물론 신선하고 좋은 의미에서요.

그건 그렇고 저도 <설국열차>에서 송강호와 틸다 스윈튼이 부딪치는 씬이 없어서 무척 아쉽더라구요. 무언가 굉장히 독특한 그림이 연출될 것 같은데 말이죠.
운수좋은놈
13/08/21 12:05
수정 아이콘
정말 영화보시는 눈이 저같은 평민과는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천천히 3번이나 읽었네요^^ 추천입니다~
Eternity
13/08/21 12:36
수정 아이콘
위에도 적었지만, 저도 영화만 보고서 배우들의 연기를 분석해내긴 어렵습니다. 저도 운수님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흐흐
그래서 관심이 있는 영화는, 관람 후에 열심히 이런저런 인터뷰나 다큐 영상을 찾아보곤 합니다. 요즘은 멋진 영화 한편을 보고나면,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 과정이 더 궁금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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