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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6/28 17:26:55
Name LucidDream
Subject [일반] [기약없는 단편] 피의 꽃 -1
옛날에 개봉했던 영화중에 그런 영화가 있었다. 대재앙으로 흔히들 얘기하는,
지구에 빙하기가 닥친다는 내용의 영화였는데,
기본적으로 특정 나라 만세의 뉘앙스가 강하긴 했지만
장면 장면은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얘기를 왜 꺼내는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조금의 친절을 베풀어 보자면,
지금 날씨가 엄청나게 춥다는 얘기다.

“도대체 이런 날씨는 왜 생기는 건지.”

혼잣말을 많이 한다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주변에서 타박을 했어도,
사람의 버릇이라는 건 어찌 보면 기계 이상으로 정확한 편이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혼잣말이 뭐 이상한 건가.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만의 버릇이 있는 법,
그걸 가지고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남들과 다른 이상한 녀석으로 낙인찍히는 건
정말 사소한 차이다. 예를 들어 인기 많은, 예쁘고 젊은 영화배우가
취미로 프라모델 수집을 하고 있다면 그건 재미있는 뉴스가 되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한다면 어른답지 못하고 칠칠치 못하다며
5년짜리 놀림감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충분히 한탄을 하고 싶고 그래도 될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재난 영화가 떠오를 만큼 멋지게 추운 날씨에 피자 배달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특 대 라지 싸이즈의 그 피자는 지금 보온함에 따뜻하게 보관되어 있지만,
정작 스쿠터를 몰고 있는 나는 이미 생물학적으로는 동사한 상태다.
물론 피자만도 못한 인생, 이라고 중얼거려 봤자 돌아오는 건 없다.
지금은 빨리 배달을 마치고 복귀해 퇴근을 해야 되는 게 우선이다.

“4층이랬지...”

스쿠터를 세우고 피자를 손에 든 채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경비실에는 전형적이다 못해 경비 아저씨 도감이란게 있다면 표지 모델로 써도 될 만한,
경비 아저씨의 귀감이 아닐까 싶은 분이 작은 TV를 보고 있었다.
경비실에 걸린 시계를 보니까 시간은 대략 열시 이십분 정도.
이정도면 정말 광속으로 배달을 온 셈이다.
그 추운 날씨 속에서도 제한시간 30분을 넘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한 셈이니까.
물론, 그런 걸 알아주는 사람은 슬프게도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뿐이겠지만.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니까 좀 따뜻해지는 것 같다. 평상시에는 배달 갈 때는
헬멧 쓰는 것을 그렇게 귀찮아했지만 지금은 헬멧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절대로 귀찮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을 때도 벗지 않는 건 아니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앞이 좀 밝았다. 이 아파트는 복도 형이 아니라
좌우에 하나씩 집이 있는 구조였는데, 사람에게 반응하는 천정의 전등과
열려 있는 왼 쪽 집의 문 너머에서 나오는 빛 때문으로 보였다.
호수를 보아하니 내가 피자 배달을 해야 할 집이었다. 가끔 그런 집이 있다.
올 시간쯤 돼서 누군가 나와서 기다리거나 문을 열어놓는 집.
나 같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안하겠지만. 문이 열려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남의 집인지라 노크하는 시늉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였다.

“배달 왔습니...어?”

차에 치이는 사람들은 차가 오는 것을 알고 있고 움직이면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못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몸이 굳어진다는 뭐 그런 얘기인 것 같은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 처음, 나는 그런 현상을 겪게 되었다.

입구에서 보이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킬 빌에서나 본 기억이 있나 없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피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닥 한 쪽에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핏자국들이
천정에까지 튀어 있었다. 물론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모두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것은 아니다.
내 눈은 그저 시각 정보를 뇌에 전달하고 있었고 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것을 처리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집 안으로 발을 들이밀고 말았다. 아마 내가 침착했더라면
그런 판단 따윈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난 무의식중에 헬멧을 벗어들고
피자를 내려둔 채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녹슨 쇳조각가루에서 나는 듯 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뭔 난리래.”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습관은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다.
섣불리 판단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정황상 살인 사건 현장 같아 보이는 곳에서,
그리고 살인범이 근처에 있는 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혼잣말을 중얼 거린다는 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니까.

서서히 몸이 현실을 자각하는 듯 떨려오기 시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의 기척 같은 건 느껴지진 않았다. 핏자국은 거실 바닥에서 시작되어
한 번 뿌려진 듯 한 모습으로, 안방으로 생각되어지는 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지만,
도저히 거기까지 가서 들여다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 하기는 해야 했다. 경찰에 신고를? 아니, 경비 아저씨한테 먼저 알려야 되나?
피자는 어쩌지?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아니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피자 배달 생각도 나긴 했다. 사실 나는 피자 배달하는 게 목적이었지,
이런 광경을 보러 오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목적?’

순간 멈칫했다.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어서 돌아보니 왠 여자가 서 있었다.

“뭐, 뭐야 당신...? 누구세요? 이...이건 무슨 일...?”

머리가 거의 무릎까지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긴, 내 나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방 안의 광경이 보였는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동공이 커진 게 매우 놀란 눈치였다.
입을 틀어막은 채라 발음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눈에 띄게 헐떡거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를 것 만 같았다. 아무래도 그건 곤란하겠다 싶어서 일단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일단, 일단은 나가서 신고부터 하죠. 아 전 피자 배달부입니다.”

“아, 아? 예? 아...”

나보다도 정신이 없어 보이는 여자를 보자 오히려 내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일단 우리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방 안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현장 보존이니 이런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들어갈 생각도 나지 않았으니까.
일단 경비 아저씨에게는 말하지 않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아, 물론 가게에는
전화를 해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점장은 어차피 막 배달 시간이었고 하니
상관없다면서 추운데 빨리 끝내고 들어가라고까지 해줬다. 평소 같았으면
피자 값 날렸다고 나한테 짜증을 부렸을 건데, 어째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까지
고마워 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여자는 그 때 까지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약간 불분명하게 들렸다.

“근데 저기...”

“네?”

“저 집에는 무슨 볼 일이셨죠?”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아까 무슨 일이냐고 물었었지. 이 집을 알고 있었다는 투였는데.
좀 길다 싶은 시간이 흐른 후에 여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약간은 엉뚱한 것이었다.

“저, 전 그냥 그 시간에 그 집으로 오라고 현정이가 전화를 해서...그래서 갔는데.”

“현정이? 그 집에 사는 사람인가요?”

“네. 그런데 그런...잠깐만요, 그럼 그...”

꽤나 미인이긴 했지만, 그 여자의 얼굴에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걸 보는 건
별로 유쾌한 기분이 들게 하는 장면은 아니었다. 아마 내 표정도 저럴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나 이 여자나 둘 다, 그 안을 보진 않았었으니까.
여기에는 현정이라는 여자가 살았다고 했고, 그 집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피의 주인은 아마도...




아무래도 이상한 일에 말려든 게 분명했다.
나는 내일이 가게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인 걸 고맙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안을 들어가 보진 않았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요. 전 안 들어 갔다구요.”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경찰한테 취조를 당하고 있다. 이건 참고인 조사가 아니라
명백히 인권 침해에 가까운 취조다 취조. 하지만 경찰이 이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놀랍게도 그 안방에는 시체가 없었다.
피만 가득하게 널려 있었을 뿐, 증거라고 할 수 있을 만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얘기다.
나와 같이 불려온 주연이라는 여자가 전화를 걸었지만 될 턱이 있나.
핏 자국은 있지만 시체는 없는 기묘한 실종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사건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목격한 것은 나와 주연이라는 여자가 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본 것은 엄청난 양의 피 뿐이었다고 한다.
주연이라는 여자가 그 시각에, 그 장소에 오게끔 한 현정이라는 여자가 없으니 (게다가 그 집에서 살았다고 하고)
그 여자의 피가 맞다고 봐야할 것 같긴 하지만, 시체가 없다는 점에서 살인사건이라고 결론짓기에는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뭐 그런 피의 양이라면 사람이 아니라 고래라도 확실히 죽을 것 같다고
생각 되었지만,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니 일단 실종 사건 쪽으로 가닥을 잡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시체가 없으니 일이 있었던 시간대의 추정도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기묘한 사건. 피는 있으나 시체는 없다.
가해자가 있는지? 피해자는 있는지? 애초에 윤곽이 잘 잡히지 않는 기묘한 사건.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 돌았다.

그런 사건인 덕분인지, 배달을 자주 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본 내가 보기에, 경찰들의 표정에서 썩
좋은 분위기는 읽어낼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 건지 슬슬 지겨움이 밀려왔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주연이란 여자는 몰라도 이제 나의 증언은 크게 필요가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음, 일단은 가 보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혹시 생각나시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정 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가도 좋다고 말을 걸어왔다. 형사라고는 하지만
나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보이진 않는 젊은 사람이다. 많이 봐줘야 경력 2,3년차 느낌이다.

“아...그럼 저 분은?”

“아 저 분요, 뭐 참고인이니까요. 이것저것 몇 가지 더 물어보고 돌려보낼 겁니다.”

넌 신경 쓰지 마라, 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것 치고는 너무 서투르잖아 형씨.
아무래도 이 정 형사라는 사람은 경력은 빼고서라도 이 일에 있어서 아직은 미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긴, 이 일은 내가 목격자였다는 것 빼고는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인사하고 일어서는데 누가 말을 걸어왔다.

“목격자라고 하셨던가요? 조심하세요.”

아까 오가는 대화에서 강형사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형사라는 직업 치고는 작은 것 아닌가 싶은 체구였지만
어깨가 각지고 입매가 다부진 게 언뜻 봐도 정형사보다 훨씬 강인하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별 건 아니지만, 심상치 않다 싶은 사건을 일으킨 범인들은 보통 완전범죄를 꿈꾸죠. 단순히 이 일을
어떻게 모면 할 까의 차원이 아닌, 완성도를 향한 집착이랄까요.“

저기, 듣는 사람의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시죠. 갑자기 그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면
누가 쉽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라고 불평하고 싶었지만 강형사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범인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모르고, 그가 목격자의 존재를 아는지도 의문입니다만
이런 경우에는 범인은 목격자에게 접근해서 해코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해가 된다고 생각해서죠. 실제로 목격자의 증언이 도움이 되는가는 별도로 놓구요.“

“그럼 단순히 제가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절 노린단 말입니까?
전 아무런 관계도 없고, 심지어 제 증언은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들 뿐 일 텐데요?“

“그건 범인 외에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강형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왠지 뒤에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로서도 이 이상의 말은 지나친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하여간 조심하라는데 나쁘게 생각할 건 없지 하면서 그러마 하고 일어섰다.
그 때,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그 주연이라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처음 봤을 때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틀어막았던 것 보다는 많이 침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경황이 없기도 했고 아까는 입을 막고 있어서 자세히 못 봤기도 했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무서운 일을 당했으니,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안녕히 가세요.”

어느새 나는 경찰서를 빠져 나와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최근 1주일 들어 영하 20도가 넘게 내려가는 이런 한파가 계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는 안 오던 눈마저 내리고 있다. 이 지방은 이런 날씨가 계속되는 게
겨울에는 보통이긴 하지만.

“으휴 추워. 빨리 들어가야지.”




강형사는 현장에 들어가기 전 담배를 태우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잠깐 적성에 맞지도 않는 보험회사를 다닐 때에도 있었던 습관이었다.
사실 형사 일도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뭔가 자신만의 싸움을 시작해야 하기 전에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답답한 빌딩에 들어가기 전에도, 경찰차에서 내리면서도,
원하지 않는 곳을 들어간다는 생각을 숨기기라도 하듯이 그는 담배를 물었다.

“아 강형사님.”

“피해자는?”

“그 기억나시죠? 지난번에 보셨던 그 남잡니다.”

“...그래.”

형사들 사이에서 일명 ‘피의 꽃’이라 불리는 사건의 목격자로 조사를 받던 남자다. 이름은 김명훈.
피자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남자였는데, 사망 시각은 새벽 4시 20분 경이라는 게 감식반의
판단 결과였다. 사인은 교살이었다. 목에 폭이 좁고 단단한 끈 같은 것으로 조른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정황상 경찰은 타살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사인은?”

“정황을 봐선 아무래도 자고 있을 때 조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하게 반항을 했을텐데
발버둥 친 흔적이 다소 적었거든요. 약을 먹었는지는 검시를 해야 알 수 있겠습니다만. 단지...“

“뭔데?”

“피해자가 평상복 차림이었다는 게 좀 걸린다고 했습니다.”

“평상복? 새벽 4시에?”

피해자가 발견된 곳은 그가 살고 있던 원 룸의 침실이었다. 새벽 4시 경이면
뭔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사람이라면 잘 시간이다.
그러나 평상복이라는 점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외출했다가 그 상태 그대로 자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자는게 대부분이니까.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음? 이건 뭔가?”

정형사가 내민 것은 핸드폰이었다. 통화기록이 몇 개 보였고 가장 최근의 통화중
누군가에게 걸려온 부재중 메시지가 한 건 있었다.

“이 사람은...”

“네. 이주연입니다.”




수사 회의가 열렸다.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검시한 결과, 김명훈의 몸에서는 소량의 수면제가 검출되었다.
그의 몸에 별다른 외상이나 내상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역시 사인은 교살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판명났다. 사망 전에 김명훈에 대한 행적도 수사 1과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약간의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죽기 전 날인 1월 14일, 그는 한 호프집에서
2시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고 했다. 이는 술을 마셨던 친구들과 술집 종업원의 증언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만취한 상태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것을 본 게 친구들이 본 그의 마지막이었다.
정상적으로 집에 택시가 도착했다면 약 3시에서 3시 반 경.

그리고 사망 시까지의 행적은 마땅히 알 길이 없었다.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등장했다. 친구들의 증언대로라면 그는 크게 취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그가 평상복 차림으로 있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몸에서 검출된 수면제를 설명할 길이 막막해진다.
술에 취해 잠이 들었던 사람이 자의로 수면제를 먹든,
타의로 인해 깨어나서 수면제를 먹든 모두 부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형사들 사이에서도 이것에 대해서는 쉽사리 의견 제시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사 3과 쪽에서 이주연에 대해 조사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석연치 않은 점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김명훈의 핸드폰에 부재 중 통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은 그녀가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단서였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는 그녀가 그를 살해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일단 형사들의 의견을 모은 결과
아직은 이주연에게 물어가면서 수사할 단계는 아니라는데 중지가 모아졌다.
이주연이 어째서 김명훈의 전화를 알고 있었는가, 또 왜 새벽 다섯 시 경에 (즉 김명훈이 죽고 난 다음 시점에)
전화를 걸었는가는 앞으로 알아가야 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중요성은 지난 ‘피의 꽃’사건과
이번 살인사건의 연관성이 있는가를 증명할 수 있느냐에 더 있다고 여기는 형사 쪽이 압도적이었다.
강력 2반에서도 ‘피의 꽃’ 용의선상에 그녀를 올려놓고 있었으니까.

“일단 현정이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그 집에 실제로 그런 여자가 살았던 것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다만 그 시기가 좀 미묘한 것이, ‘피의 꽃’ 사건이 있기 일주일 전 쯤 집을 비웠다는 군요.“

“비워? 뭐 여행을 간 거야 아니면 이사를 간 거야?”

문형사는 준비한 보고서를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보고서에 묻은 손때가 눈에 띄었다.

“그 아파트 경비의 증언에 따르면, 아 사건이 있던 날의 경비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아무튼 그 현정이란
여자가 나오는 건 봤는데, 마치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는 사람 같았다고 하더라구요.
그 아저씨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자 혼자 멀리 여행이라...짐은?”

“차가 있었다는 군요.”

경비의 증언에 따르면 짐의 양은 상당했다. 형사들이라 해도 들고 다니기는 무리라고 생각될 많은 짐이었다.
마침 현정이 사라지는 날, 차가 있었고 그 안에는 남자가 타고 있었다고 했다. 어둑어둑한 밤 8시 경의
일이라, 인상착의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호리호리한 남자였다고 경비는 진술했다.

“김명훈과의 대조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의 남자는 아니었다 - 라고 하더군요.”

비록 목격자로서 조사했긴 했지만, 경찰로선 당연히 김명훈도 피의 꽃 사건의 용의자 중 한 명이었다.
경비의 증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아닌 체형만 놓고 봤을 때 김명훈은 확실히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자는 아니었다.

“묘하군.”

“뭐 말입니까?”

“사건을 정리 해 보지. 일단 김명훈 살해 사건은 제쳐두고, 피의 꽃에서 지금 떠오르는 의문점은
크게 네 가지야. 우선 첫 번째, 김명훈은 그 날 피자를 배달하기 위해 그 집으로 갔어.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현정이라는 여자는 일주일 전에 집을 비웠단 말이야.
그러면 사실상 그 집은 빈 집이나 다름없었다는 얘기가 돼. 빈 집에 피자 배달을 갈 이유는 없지않아?
누군가 고의로 그 집에 김명훈을 불러 들였다는 말이야.“

“그러면 누군가가 목격자를...만들려고 김명훈을 불렀단 말입니까?
하지만 살인 사건이라면 목격자를 굳이 부르지도 않겠죠.
설령 부른다 하더라도 그건 시체나 파손된 물건 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목적 자체가 없는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정형사가 반박했다. 확실히 그 말 대로다. 추리소설 같은 경우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가끔 목격자를 일부러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체를 확인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없거나 최소한 그 시각에 목격자와 동행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유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주문이 들어온 것은 가게에 몇 번이고 확인했고,
김명훈의 진술에서도 드러난 바 있었다. 전화기에서 들리던 목소리는 여자였다고 했지만,
목소리의 특징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주연의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나왔지만
김명훈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긴, 소설처럼 사람의 목소리를 금방 기억하고 구분하는 건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든 걸 순리대로 생각하고 싶지만 의문이 가는 건 가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그 때 김명훈이
아파트에 도착했다는 시간은 10시 20분이었지?“

“경비실에 걸린 시계를 봤다고 했었죠.”

“나중에 조사해 봤어. 그 시계는 고장 나 있었더군. 김명훈이 시간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야.”

김명훈은 진술에서 자신이 아파트에 도착했던 시각이 10시 20분 쯤이었다고 했다.
경비실 시계를 본 것은 날이 너무 추워 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할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체가 없으니 정확한 사건 발생 시점을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강형사가 밝힌 사실대로라면 사건의 시간대는 더욱 더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게 된다.

“세 번째 의문점은, 현장 자체에 있어.”

“현장요? 피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거 수상하긴 하죠.”

“아니, 내 말은 응고야.”

문형사와 정형사는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피는 금방 응고 돼. 알겠지만 혈액이 응고되는 건 공기에 노출되면서 부터지.
하지만 김명훈과 이주연은 생생한 피를 봤다고 했어. 비현실적인 것을 본 탓에
다소 착각하거나 부주의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진술에 신뢰를 둔다면...“

“시간적으로 봤을 때...“

“최소한 현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라는 얘기군요.”

정형사와 문형사가 마무리를 지었다. 강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대량의 피의 주인이 누구인 것도 물론 중요해.
그러나 그 피가 김명훈과 이주연이 당도하기 전에 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이 작업을 누가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거야.“

“범인이겠죠 뭐, 하하.”

문 형사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무거웠던 분위기를 조금은 밝게 만들었다.
강형사도 피식, 입가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아무래도.”

“그럼 마지막 의문은 뭡니까? 네 가지라고 하셨잖아요?”

“아아 그거.”

하지만 강형사는 좀체 입을 열지 않고 뜸을 들였다. 한참 후에야 강형사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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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에 대한 증명(?) 내지는 저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좀 하고자
무거운 마음으로 이 곳에 글을 올려 봅니다.

제목에 적었듯이 기약없는 2편입니다. 네...일과 병행하느라 죽겠네요 요새.

PS - 술 이야기는 잠시 보류하겠습니다. 이번 주는 완전 스파르타여서요...
재밌게 봐주셨던 분들, 거듭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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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28 17:48
수정 아이콘
엄청재밌네요
이런거 좋아요 크크크크
자주 올려주셨으면 좋겠어요!~
10/06/28 17:58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2편은 언제 올라오나요.
'한글'을 사용하는 소설이니까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나 같은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한다면 어른답지 못하고 칠칠맞다며 → 칠칠치 못하다며
경비실에는 전형적이다 못해 경비 아저씨 도감이란게 있다면 표지 모델로 써도 될 만한, 경비 아저씨의 전형이 아닐까 싶은 분이 작은 TV를 보고 있었다. → 전형 전형이 두번 반복되네요. 뒤의 '전형이 아닐까' 부분은 빼는 게 덜 어색할 것 같아요.
몇 번을 말해야 되요 → 돼요 입니다. 돼요, 됐다, 돼서, 돼버린 몽땅 '돼'입니다.
띄어쓰기 부분은 일단 패스 =_=; 이건 저도 어려워서.
10/06/28 18:06
수정 아이콘
허 재밌네요 어서 2편을 ... 이런거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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