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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4/12 22:30:09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log.naver.com/lwk1988/223831044405
Subject [일반] [서평]《출퇴근의 역사》 - 통근을 향한 낙관과 그 이면


역사는 흔히 나라, 영웅, 민족 등 거대한 공동체와 위대한 업적을 중심으로 쓰인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일상의 작은 요소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출퇴근의 역사》는 일상 속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고 반복적인 ‘통근’이라는 행위를 통해, 통근이 어떻게 근대적 시간 질서를 낳고 도시와 교외라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나아가 현대인의 일상 문화와 정체성까지 형성해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 교통 수단의 발달로 통근이 과연 사라질 수 있을지 질문하면서, 오히려 통근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 책은 일상 속의 사소한 기술적 변화가 어떻게 문명을 결정짓는 변곡점이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저자 이언 게이틀리는 홍콩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런던의 금융시장에서 일해 온 작가입니다. 전작으로는 《담배와 문명》, 《음주: 알코올의 문화사》 등이 있으며, 이 책에서도 그처럼 일상의 사물과 행위를 문명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내는 시도가 이어집니다.

책은 통근의 과거·현재·미래를 보여주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통근의 탄생·성장·승리’에서는 통근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기술과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살핍니다.

2부 ‘지옥철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은 오늘날 통근자가 겪는 심리적·신체적 경험을 통해 통근의 사회적 영향력을 분석합니다.

3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시간’에서는 원격근무 시대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통근의 의미와 미래를 전망하며, 통근이 단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삶의 한 축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서문-“황무지를 지나서”에서는 통근은 고통스러운 연옥의 시간, 생산과 여가라는 양극단을 이어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시각 대신, 통근이 우리의 삶에 더 많은 가능성을 열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 관점은 우리가 왜 통근을 알아야 하는지 흥미를 일깨우고, 우리의 일상이 새로운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1부에서는 철도, 자전거, 자동차 등 원거리 이동 수단의 발달이 ‘일터와 집의 분리’라는 새로운 사회 개념, 즉 통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추적합니다.

초기에는 중산층이 비위생적인 도시를 벗어나 교외로 탈출하면서 통근이 시작되었고, 이후 노동자 계층에게도 통근이 확산되면서 교외의 공간은 계층적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중산층을 위한 교외가 노동자의 교외와 나뉘게 된 것입니다.

전국이 철도로 연결되자, 다양한 지역의 시간대를 통일할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표준 시각이라는 개념이 발명되었습니다. 이는 통근이 단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 질서 자체를 재구성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이후 등장한 자동차는 통근 수단의 계층화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사용하는 통근자들과는 달리, 자가용을 보유한 중산층은 더욱 먼 교외로 나아갔고, ‘교외화(suburbanization)’라는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처럼 통근은 도시 공간의 구조를 재편하고 새로운 계급적 정체성을 만들어낸 매개가 되었습니다.

또한, 통근 시간은 단순한 이동을 넘어 새로운 생활 문화를 실험하는 사회적 여백으로 기능했습니다. 통근자들은 여가와 기술을 결합한 다양한 신제품의 초기 사용자였고, 이는 휴대용 오디오 기기, 소설책, 모바일 기기 등 일상 기술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통근자는 기술 수용의 전위였으며, 통근 시간은 문명의 실험장이기도 했습니다.

2부에서는 통근이 현대 개인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중심으로, 통근이 바꿔놓은 일상의 양상을 살펴봅니다.

현대의 통근자들은 인류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과밀 상태를 매일 견디고 있지만, 기존의 심리 연구 결과와 달리 이들은 놀라운 적응력을 보이며 새로운 통근 문화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과밀을 피해 자동차로 이동하는 통근자들은 또 다른 심리적 문제에 봉착합니다. 바로 ‘노상 분노’입니다. 이는 때때로 살인에 이를 정도의 공격성으로 표출되며, 심리학자들이 주목하는 현대 도시의 병리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사회적 방안은 아직 확실히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통근이 반드시 해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통근자들은 출퇴근 시간 속에서 각자 나름대로 만족과 안정을 누리며, 이는 단지 더 좋은 집을 얻기 위한 경제적 동기뿐만 아니라 수렵·채집 시기의 본능과 통하는 생활 양식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 글쓴이의 견해입니다. 그는 통근을 ‘하루 두 번 복용하는 자유’로 해석하며, 통근 시간을 개인 해방의 순간으로 그려냅니다.

또 글쓴이는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 이 복잡한 통근 체계를 뒤에서 조율하고 유지하는 교통 시스템 관리자들의 숨은 노력에 주목합니다. 이들은 도로 뒤의 모니터, 열차 운전석, 신호 제어실 등에서 묵묵히 일하며 현대 통근 사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1부가 통근이 야기한 거시적·사회 구조적 변화에 주목했다면, 2부는 통근이 개인에게 가져다준 미시적 변화와 감정 구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과정에서 글쓴이는 전문가들이 외면한 통근의 긍정적인 영향을 발굴해냈지만, 동시에 통근이 야기한 심각한 사회 문제들—특히 노상 분노와 같은 병리적 현상—에는 시선을 비켜갑니다. 고통받는 개인에게 통근의 밝은 면을 일깨워주지만, 구조적 해결이 필요한 문제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이 책을 지배하는 낙관주의의 분명한 한계로 보입니다.

3부에서는 교통 수단의 발전을 통해 그려지는 통근의 미래를 조망합니다.

기술과 정책은 오랫동안 통근을 ‘줄이거나 없애야 할 문제’로 인식해 왔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원격 통근 기술이나 도시 교통 정책 등이 시도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습니다. 원격 통신 기술은 오히려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대면 업무의 효율성 문제와 함께 전력 소모 증가라는 환경적 부담도 드러나며 원격 통근의 이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통근 없는 미래’는 실패했지만, 교통 정책의 방향은 여전히 자동차를 줄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이에 강하게 반발합니다. 많은 지역에서 자동차 외에는 선택지가 없으며, 특히 대중교통 시스템이 절망적인 곳일수록 자동차는 단순한 욕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수단입니다. 글쓴이는 자율주행차만이 이 구조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지만, 그 외의 대안 교통 수단에는 회의적입니다.

글쓴이는 전체적으로 자동차 통근을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묘사합니다. 대중교통과 자전거가 가진 불편함과 계급적 함의는 일부 인정하지만, 도로 확장 정책이 반복적으로 실패해 왔다는 점이나 자동차 통근자들이 겪는 심리적 병리—특히 노상 분노는 상대적으로 경시됩니다. 2부에서조차 더 복잡하고 해결이 어려운 문제로 그려졌던 노상 분노는, 3부에 이르러 자동차의 자유와 안락에 묻혀버립니다. 이는 글쓴이의 낙관주의가 문제 해결의 필요성보다 ‘만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 책은 통근이라는 익숙한 경험을 들여다보는 고성능 현미경입니다. 비록 글쓴이가 전문 역사가나 도시계획가는 아니지만, 역사적 기록, 신문 광고, 소설 등 당대의 자료를 종횡으로 엮어 통근자의 삶을 생생히 복원해 냅니다. 그의 손에서 통근은 사소한 일상을 넘어서 하나의 문명적 경험으로 탈바꿈하며, 통근자는 더 이상 특별한 계층의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됩니다.

글쓴이는 통근이 만들어낸 사회적 문제—예컨대 노상 분노와 같은 심각한 병리 현상—에 주목하면서도, 끝내 통근의 영향력을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사소한 여러 가지 짜증과 빈번한 불편에도 불구하고, 통근은 우리 삶의 긍정적인 부분이었다”는 마지막 평가는, 그간의 균형잡힌 서술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죽고 사는 문제를 ‘사소한 짜증’으로 축소하는 어조는, 통근이라는 일상을 진지하게 조명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무디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낙관은 일상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신뢰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상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우리의 폭력성과 타인에 대한 무감각까지 함께 직시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기를 권합니다. 글쓴이가 포착한 통근의 풍경을 통해, 저와 함께 그 이면의 불편함까지도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평온이 다른 누군가에게 불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단지 일상을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일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아끼고 가꾸기 위한 물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글쓴이는 차를 타고 출퇴근하고, 저는 지하철을 탑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타고 직장으로 향하시나요?


(후기)

오랫동안 서평 슬럼프에 빠져서 서평을 쓰지 못했습니다. 요즘 ChatGPT를 글 쓰는 데 활용하고 있는데, 이 글은 초안 → ChatGPT 검토 → 개작 → ChatGPT 재검토와 윤문 순으로 글을 썼습니다. 슬럼프 타개용으로 이렇게 해봤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글을 써도 괜찮을지 고민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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