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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5/29 15:41:27
Name kama
Subject [연재]Daydreamer - 13. 이방인(2)
  

  [걱정되는 모양이네.]

  각종 기온 이상화들로 사실상 계절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그래도 사계의 특성은 아직 한국의 여러 장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을을 대표하는 붉은 단풍과 자살 충동이 생길 정도로 맑은 하늘도 그 중 하나. 그리고 이렇게 색감 풍부한 계절적 특징까지 결합된 덕수궁(德壽宮)의 모습은 고풍스럽다 못해 존엄한 풍취마저 풍겨냈다. 마치 그 공간만이 번잡한 서울 시내를 벗어나 수 백 년 전의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드는 풍경. 휴일을 맞아 연인끼리, 혹은 가족끼리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은 강한 풍취에 잔뜩 취하여 왕과 대신과 그들을 보살폈던 많은 이들이 걸었을 길을 돌아다닌다.

  [뭐,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 분위기에 홀린 사람들이 모두 한국인은 아니다. 관광을 온 외국인들도 마찬가지. 자국민들만이 느낄 수 있는 유전적인 향수는 없지만 그걸 능가하는 낯선 이국의 이질적인 매력에 젖어든 그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한 표정으로 풍경 어느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사진기의 셔터를 쉴 틈 없이 눌러댔다. 사진 속에 신비로운 분위기와 향기를 담아낼 수는 없지만 뇌 한구석에 숨은 추억을 자극하는 매체는 되어 줄 것이다.

  [집 근처라도 혼자 있으면 근심거리인데 더욱이 여기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이지 않은가.]

  이질적인 매혹에 빠진 외국인들은 파란 눈에 하얗거나 검은 피부를 지닌 사람들만이 아니다. 외견에선 큰 특징을 찾기 힘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이들도 그들과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묶여서 불리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른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는 세 나라다. 특히 건축 문화에 있어서 한국의 궁궐은 중국과 일본의 성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성은 권위를 중시하며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일본의 성은 오랜 내전을 겪었기 때문인지 철벽같은 모습으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 건축물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사용된 방법이나 재료가 아닌 건축자의 목적. 그런 만큼, 바로 옆 나라이긴 하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건축물은 그들에게 충분히 낯선 매력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뭐, 어쩔 수 없잖아. 자신이 혼자 가고 싶다고 말하니 말릴 수는 없는 법이고. 다행이 그 장소에 잘 도착했다고 하고 대회 운영진에서 준비한 통역가도 온다 하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네. 여차하면 내 쪽으로 연락이 오겠지.]

  덕수궁 내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장소-석조전 앞에도 일련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보였다. 석조전은 덕수궁 내의 타 건물들과 외견상으로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서양식 건물로 내부 건물 중 가장 최근인 1900년대 초에 건설되었다. 그런 만큼 역사적 가치에서 다른 건물에 비하면 부족한 편이지만 조선 정부의 개화 의지를 표명하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 한국 전통적 양식의 내부 안에 홀로 존재하는 모습은 현실과 떨어져있는 느낌을 한층 강하게 만든다는 점에선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른 곳에 비해 부족함 없는 진지한 모습으로 석조전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겠지. 하하.]

  그들 중 약간 뒤로 물러나있던 중년의 남자는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면 가볍게 웃었다. 일본인 특유의 온순하고 부드러운 표정. 하지만 그 얼굴을 바라보는 남성은 그것이 단순히 습관적, 반사적인 사회용 표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구분 정도는 외국 국적을 지닌 신분으로 수 십 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원래 표정관리에 능한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선수와 이름이 같다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인물로 누군가가 그를 탐구하고 보고서를 쓴다면 ‘평범함’이란 단어 하나로 완벽할 것이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만화캐릭터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 적당히 열정적이며 적당히 착하다.
  아마 그랬기에 이 남자와 친구가 되었겠지. 그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자이니치(在日) 중에서 조선학교와 조선인 공동체를 벗어나서 일본 학교에 들어가고 한국, 혹은 일본 국적을 획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을 시기에는 재일조선인 사회가 들썩일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조선인 사회에선 배신자로, 일본인 사회에선 이질적인 외부인자로 배척당하는 건 당연한 것.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강했던 그는 따돌림과 괴롭힘 속에서 혼자 모든 것을 해낼 것이라는 황당할 각오를 굳혔었다. 이 선한 얼굴을 지닌 인간이 말을 걸기 전까지는.
  정의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인종차별이나 과도한 배타주의에 대한 반감 같은 것도 지니지 않았다. 그냥, 같은 반 사람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지 않겠냐는 어이없는 이유. 그렇기에 독기와 반항심으로 가득했던 그도 어느 사이 상대를 받아들였던 것이겠지만.

  ‘어렸을 때로구나.’

  남자는 아련했던 과거의 추억에 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어떤 괴로움이 있었다 해도 지금에 와서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지기 때문에 추억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스즈키는 현실적인 말을 이어갔고, 정다운 추억 나누기를 하고픈 생각이 없었던 그도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사실 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 한국으로 왔다는 것 자체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난 내 아들 녀석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게임 대회에 참가하려고 이 곳까지 온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야.]

  그게 정상이지. 일본 내에서도 버츄얼 파이터나 철권, 스트리트 파이터 등 대전격투 게임 위주의 대회가 주기적으로 열리기는 한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강국, 이라고는 하지만 콘솔 게임 쪽으로 치우친 일본에서 컴퓨터 게임은 아무래도 소수 매니아의 물건으로 여겨졌다. 최근에야 인터넷이 활발하게 보급되면서 온라인 게임 쪽의 비중은 커지고 있고 FPS의 경우도 천천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RTS는 여전히 변방의 독특한 게임 정도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 게이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만큼 일반인에게 현재 상황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쉽게 파악가능하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이치로의 아들, 아버지와 같이 특출 난 부분 하나 없이 매번 부모로 하여금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면 되죠, 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는 고등학생 유우지 (悠二)가 그가 운영하는 넷 카페에 와서 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설치해 두었던 여러 게임 중 하나를 시작하였을 때도 그는 그냥 살짝 웃기만 하였다. 지금까지 접하기 힘들었던 PC게임이니 호기심을 가지고 몇 번 가지고 놀다가 말겠지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유우지가 넷 카페에 놀러오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는 이 소년이 결코 단순한 호기심 정도로 게임을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유우지가 열중하고 있던 게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게임이라는 문화 자체가 투쟁하듯이 살아왔던 그와는 친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면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매혹되었다. 마치 춤에 전혀 모르는 사람도 현란한 댄스에 몰두하듯이,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혼을 태우는 듯한 연기에 매료가 되듯이.

  [그래도 자네에게는 고맙게 생각하네. 자네가 도와줬기에 유우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니까.]

  [원래 정상적인 부모라면 아들이 이상한 쪽으로 빠지도록 도와준 것을 원망해야 정상이 아닐까?]

  그의 말을 듣고 이치로는 약간의 쑥스러움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뭐, 아버지로서 이런 말을 하긴 난감하지만 어차피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아이도 아니었으니. 그리고 사실 유우지가 게임이던 무엇이던 집중하고 스스로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거든. 지금까지 너무 순하게만 자라왔었으니까.]

  [이제 고등학생이잖아. 좀 있으면 진로도 결정해야 할 텐데.]

  [한국에 온 것도 경험,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대회라도 참여하여 이국의 낯선 이들과 부딪치는 것도 경험. 앞으로 유우지가 어떤 삶을 선택할 지는 결국 녀석이 선택할 일이지만 이런 경험도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

  흐음, 이것이 아버지의 모습일까. 그는 십년지기 친구의 표정을 보면서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다. 병원에서 유우지가 갓 태어났을 때도 이치로는 이런 표정을 지었고, 이번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결혼이란 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이번에도 단지 생각으로 끝날 것이지만.

  [그래서 더욱 자네에게 고마운 거야. 유우지 혼자였다면 이런 경험을 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니까.]

  [아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 그럴 필요는 없네.]

  사실이다. 유우지가 계속 게임을 할 수 있게 넷 카페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워크래프트3와 관련된 정보와 전략들을 찾아서 내용을 번역해 알려준 것도, 또 이후 큰 대회의 예선이 치러질 예정이고 참가 자격이 없는 일본인 유우지의 참여를 위해 대회운영진을 계속 찾아가면서 결국 억지로나마 참가자격을 얻어낸 것까지도 단지 친구의 아들을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겠지.’

  젊은 시절, 그는 생존을 위해 사회와 전쟁을 벌여야 하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것이지만 어쨌거나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만큼은 돌릴 수가 없다. 물론 그는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거나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 그가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니, 타기는 시원하게 잘 탔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검고 어두운 불꽃이었고 선망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많이 부족한 종류의 것이었다.  
  일종의 동경일 것이다. 그는 욕심쟁이니까 손에 넣지 못한 것을 그리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묻어뒀던 아쉬움을 그 때 유우지가 살려낸 것이다. 전혀 알 수가 없는 이펙트의 연속들. 하지만 그 현란한 화면 속에 매료되었던 것은 그 안에서, 아니 그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유우지에게서 그는 자신이 바라고 있던 환한 불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대리만족. 사실 친구의 아들이라는 관계는 큰 상관없었다. 그가 몰두한 분야가 게임이라는 것도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단지 그 불꽃이 더 크고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

  [자자, 어쨌든 이제 어린이도 아니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나. 가끔은 혼자 뭔가를 하고 싶어 할 때도 있고,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네.]

  [확실히, 그건 그러겠지.]

  [자자, 이제 이 풍경을 즐기자고. 처음으로 온 한국,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이치로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드라마 등을 통해 한류의 열성적인 팬이 된 아내는 마치 눈으로 사진이라도 찍을 듯이 열중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고 유우지의 친구 둘 역시 열성적으로 처음 오는 외국의 이국적인 풍경에 푹 빠져있었다. 나 참, 정말 속편한 사람들이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역시 전 일본인 중에서도 가장 속편한 쪽에 속한다고 할 인물. 이치로 역시 마음을 편히 가지기로 했다.

  [그래, 정말로 아름답군.]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희미하게 떨고만 있을 뿐. 아마도 미련이 남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이미 머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래, 확실히 게임은 끝났다. 남은 병력은커녕 일꾼도 남아있지 않다. 건물도 약한 오크 버로우(Orc Burrow) 같은 것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사라진 상황, 더 이상 버티는 일은 예의 없는 고집일 뿐이다. 그래도 손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부들부들 흔들리기만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사람이 죽기 전에 일생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했던가. 어떻게든 강제로 손을 움직여 정말 치기 싫은 두 글자를 누르는 순간, 그는 이번 게임의 내용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한 숨 나오는 내용들. 다음에는 이렇게 당하지 않겠다, 라고 새삼 다짐을 하지만 동시에 쓴웃음이 입가에 새나왔다. 과연 다음이 오긴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게임을 포기하고 자리에 일어나자,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말을 건다. 낯익은 녀석이다. 이번 예선에서는 방관자의 위치에 놓여있는, 지금 생각하면 더욱 부럽기 그지없는 녀석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그런 위치에서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첫 라운드에 탈락한 자신을 비꼬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길드에서 형-동생 하던 사이인데다가 하고 상대의 목소리에서 짙은 아쉬움이 서려있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

  하지만 그는 자신이 현재 자기의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상대도 이런 사정을 눈치 채고 있는 듯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곧바로 얼굴을 숙이고 장비를 챙길 수 있었다. 아직도 손에 떨림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결된 마우스 선을 뽑는 간단한 일도 생각만큼 쉽게 되지 않는다.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심리를 안정시키고 마우스를 챙겨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을 완파한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소년, 어린 나이에 비해서도 앳된 외모를 지닌 상대도 장비를 챙기다가 잔뜩 굳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당황해하면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그는 다시 한 번 이번 게임의 내용이 떠올랐고 다시금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쓴웃음이 아닌, 황당한 기분이 만들어낸 웃음이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방금 말을 건넸던 남자를 봤을 때, 그 웃음은 한층 커졌다.
  
  ‘어처구니없는 놈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답답하고 분노까지 났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졌다. 오히려 상쾌하고 시원한, 홀가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후회나 미련은 없다.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안에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지만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자신은 할 만큼 했고 즐길 만큼 즐겼으니 마무리 지을 때는 제대로 끝내 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그는 장비를 모두 챙기고선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를 이동했다.



  “괜찮을까요?”

  저번 시즌 준우승자이자 언데드의 대표격인 선수, 최성훈은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말을 꺼냈다. 어차피 들을 사람은 한 명 뿐이기도 했다.

  “그래, 충분히 괜찮아 보이는데. 아니, 오히려 홀가분한 듯 보이네.”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하하, 충격이라도 먹었다고 생각한 거야?”

  “이렇게 지고 나서 얼굴이 잔뜩 굳었던 사람이 갑자기 웃으면서 가면 이상하긴 하잖아요. 뭐, 확실히 괜찮아 보이기는 하네요.”

  “뭔가 결단을 내린 것이겠지.”

  “네?”

  성훈은 고개를 돌려 현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현호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함으로서 그런 그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성훈이 보고 있던 상대를 쳐다보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와는 성훈처럼 같은 길드 소속도 아니고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리지널 때부터 게임을 해왔고 나름 좋은 성적을 올려주던 그 남자를 이 세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뭐, 그것도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될 것이지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물론 가뜩이나 부족한 워3 게이머 진영에서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긴 하다. 한 명일지라도 점점 발판이 작아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 하지만 노장은 사라지고 새로운 신예가 자리를 대신 하는 것은 개인으로선 아쉬울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환영할 일이기에 분명하다. 어느 스포츠고, 아니 어느 사회고 이런 순환이 이뤄지고 있으며, 또한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법이니까.
  다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현호는 자신도 언젠가 그럼 흐름에 밀려 물러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신예의 등장을 보고 자신의 한계를 먼저 느끼는 자와 그들의 도전을 맞이할 기대감을 가지는 자. 무대를 내려가는 사람과 꾸준히 정점에서 군림하고 있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형?”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대단한 한 판이었어.”

  성훈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비스듬히 기울였다.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대단했다, 라는 단어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명 경기? 글쎄, 그렇게 정의하기에는 좀 어이없는 상황이 많이 연출된 시합이었지. 일단 첫 단추부터 이상했다. 완전 랜덤. 상대와 맵에 따른 종족 변경은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완전 랜덤은 거의 볼 수 없는 일이기에 몇 번의 확인이 있던 후에야 시합이 실행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이트 엘프가 선택된 후에도 이상한 흐름은 계속되었다. 원래 영웅 선택의 폭이 가장 넓은 종족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이번에도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한 것이다.
  파이어 로드. 프로즌 쓰론 때 추가된 중립 영웅으로 초창기에 나엘의 주 영웅으로 사랑을 받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여러 약점이 나타나고 장점이었던 빠른 사냥과 꾸준한 견제의 자리를 다크 레인저에 물려주면서 가끔 두, 세 번째 서브 정도로 사용되던 영웅. 하지만 그 점이 변수를 만들어 내었다.

  ‘정말 당황스럽긴 했을 거야.’

  처음 분위기는 오크가 가져갔다. 체력이 적은 파이어 로드의 단점을 이용하여 블레이드 마스터를 이용한 견제가 제대로 들어갔었다. 다만, 너무 신나게 들어갔다. 견제는 잘 통해 사냥이 부드럽게 연계되지는 못했지만 영웅에 집중하여 노리다보니 보통 때 이상으로 아처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고 블레이드 마스터의 피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물론 마나는 충분히 유지하고 있었기에 언제라도 도망쳐서 회복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수였다. 그가 파이어 로드의 스킬 중에 ‘소울 번’이 지닌 효과를 알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몸은 제대로 반응해주지 못하였다.
  이 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영웅 사망이 결국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대의 운영은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쓸데없는 건물이 올라가거나 빠른 시기에 업 킵을 넘겨 자원을 낭비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초반에 영웅을 잃었던 그의 페이스도 완전히 흐트러졌다. 적어도 이길 타이밍이 3번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떨 때는 너무 소극적이다가, 어떨 때는 너무 무리하다가 이런 기회들을 놓쳐버린 그는 결국 패배를 선언했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왜 그렇게 흔들렸을까요?”

   현호는 손을 들어 턱을 괴는, 고전적으로 생각하는 데 사용되는 자세를 취했다. 확실히 그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렇게 휘말린 사람은 대회 경험이 별로 없는 신예라면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년간 게임을 하면서 온라인, 오프라인 다양한 대회들을 섭렵한 선수였다. 그 정도 경험을 지닌 선수라면 한 번 어긋난다 하더라도 흐름을 자신 쪽으로 끌어올 능력은 충분한 법이다.  
   다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좋지 못했다. 아무리 다양한 전략들이 사용된다 하더라도 워3는 맵도 고정되어 있는 만큼 변수가 적다. 정석 두, 세 개가 굳건히 존재하고 여기에 나뭇가지처럼 변형들이 뻗어있다는 느낌일까. 그래서 워3에서 중요한 것은 운영의 묘다. 어디를 어떻게 사냥하고 유닛을 어떻게 구성하며 폭발시키며 상대를 언제 어떻게 견제를 하는가. 더 나아가, 영웅의 경험치와 아이템 관리, 건물의 위치까지. 결국 승패는 누가 더 주어진 큰 흐름을 잘 타고 오르는가, 혹은 상대를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게 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뭐, 그 자신처럼 그걸 즐겨 깨는 선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적어도 난 이렇게 할 자신은 없어.’
  
  이번에는 경우가 너무 달랐다. 변형 정도가 아니었다. 독특한 운영이나 기막힌 작전 정도라고 말할 내용도 아니었다. 아예 정석이란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 멋대로 만들어내는 기괴한 탑, 운영이라 부르기도 뭐한 움직임. 그러니 아무리 경험이 많은 선수라도 한 번 어긋난 흐름을 도저히 자신의 것으로 끌어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베테랑마저 감을 못 잡을 정도로 제 멋대로, 이었다는 소리지.”

  RTS라는 장르가, 그리고 워크래프트3라는 게임이 자리를 잡지 못한 환경에서 스스로 성장했기 때문일까. 그는 과거 워3가 처음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블리자드에서 게임 홍보를 위하여 초대된 게이머들 중에도 일본 국적을 지닌 한 선수가 있었다. 오래전 일이라 확실지는 않지만 없지만 어느 정도 정상적인 시합 끝에 무난히 패배했을 것이다. 그건 초창기라 특별한 틀이 갖춰지지 않아서였을까. 패치가 반복되고 많은 전략이 생기고 사라지는 사이에 유저의 폭과 레벨 차이로 생긴 간격이 오히려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뭐, 됐어.’

  현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단순히 제 멋대로의 운영이 상대를 혼란에 빠트렸다, 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하다. 실제로 단순히 그런 정도의 선수였다면 험난한 온라인 예선을 뚫고 이 자리에 올라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니까. 분명 뭔가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시야만으로 본 현 상태에서는 상대를 분석할 수도 없다. 리플레이를 구해서 세세히 살펴보거나 직접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맞대보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어차피 그가 저번 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시드를 얻은 그와 만나게 될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대회 본선이 시작될 때. 온라인 예선을 뚫고 예선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를 꺾은 만큼 실력을 의심할 여지는 없겠지만 이렇게 상대를 혼란에 빠트리는 타입의 선수는 아무래도 이러한 토너먼트 다전 방식에 약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비비 꼬였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정보가 알려지기 마련이고 상대 역시 이런 운영에 익숙함을 느끼며 대응책을 준비할 것이다. 그런 준비된 상대들마저 꺾어내고 본선에 진출하여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증명한다면 그때 다시 생각하고 준비하면 될 일이다.
  
  “거참, 그렇게 기뻐 보이는 표정을 짓지 말라고요. 그에게 떨어진 사람은 저랑 친한 길드 형이에요.”

  “아아, 내가 그랬나.”
  
  현호는 생각을 멈추고 멋쩍게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니. 아무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한 듯 보였다. 이 어설프고 뭔가 난잡해 보이는 경기가, 그리고 그 안에서 스즈키 유우지라는 이방인이 내보인 실력이 마술사란 별칭으로 세계 워크래프트3의 최정상에 위치한 이 남자의 승부사적 기질을 자극했다는 사실만큼은.






  뭐, 아직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기간이 길어지고 있군요. 이러다가 나중에 1년 되는 건 아닐지ㅡㅡ;; 참 그리고 예전 글 링크시킨 것 눌러보니 preg_replace(): Unknown modifier 메세지가 나오고 글이 안 나오네요.(댓글은 나오는데) 그래서 일단 링크는 지웠습니다. 왜 이런지 아시는 분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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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잊고..
07/05/29 21:15
수정 아이콘
매번 글 잘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모쪼록 건필하시길..^^
협회바보 FELIX
07/05/30 10:30
수정 아이콘
보고도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더군요;;;

다시 옛날거 부터 봐야 할듯.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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