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6/05/31 20:26:44
Name Bar Sur
Subject [잡담] 무심한 눈동자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의 〈부정한 상인 이스트맨〉의 결말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신비스럽고 당연해 보이는 종말

1920년 12월 25일, 몽크 이스트맨의 시체가 뉴욕 시의 한 중심가에서 새벽을 맞았다. 그는 다섯 발의 총탄을 맞고 죽어 있었다. 죽음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한, 평범한 고양이 한 마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주변을 멤돌고 있었다.

--

모든 개연성과 정황을 다 생략해버리고 단지 그 죽음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그야 말로 무심한 고양이의 모습과 어울린다. 이 장면에서 고양이의 불길함 따위를 읽어내는 건 상상력의 낭비이자, 지면의 낭비다. 이것 봐라, 이미 낭비해 버리지 않았는가. 이럴 땐 과감히 행간을 건너 뛸 필요가 있다.

어제였는지, 그제였는지, 혹은 아주 오래전, 인문관 2층 출구 쪽의 벤치에 앉아있는데, 그늘이 드리워진 언덕의 대나무숲 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목적이 있어 갈길을 정해놓은 것 같지도 않은 그 녀석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대나무숲을 빠져나오더니 돌담벽 위에 멈춰섰다. 그 상태로 주변을 쑤욱 둘러보는데, 특별히 사람을 신경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 또한 녀석의 등장 때부터 녀석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정해진 우연처럼,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겠지만, 체감상 짧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우리가 정말 눈이 마주쳤든, 내가 그 눈동자를 계속해서 바라본들 내가 그 녀석에 대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그 눈동자가 쉽게 읽어낼 만한 고만고만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면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도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트맨이 어떤 직접적인 연유로, 누구에게 죽은 것인지.
영화 속 박해일이 정말로 범인인지.
그 눈을 보고는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밥은 먹고 다니냐?"는 송강호의 물음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자기물음이 된다.

눈은 관찰의 주체이면서, 때때로 관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눈이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심미적인 관점을 넘어서 불가해한 요소를 내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별히 그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동자를 보는 것은 더욱 그렇다. 보통 '본다'라는 행위에는 언제나 '~을'이라는 대상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대상이 소멸한 그 무심한 눈동자와 '본다'라는 것은 '스스로 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다'는 규정되지 않는 세계와 우리의 삶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런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은 곧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묻거나 우리의 삶 깊숙히를 들여다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나였다. 애초에 눈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러가지 의미로 그 무심한 눈동자에는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잠시후, 걷는 듯 달리는 듯 흐르는 듯 그 고양이는 돌담 위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내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무슨 거창한 이유 같은 것 없이 살아있는 것들을 길러볼 생각을 못하는 인간이지만, 고양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내게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나는 그 무심한 눈동자를 가진 자유로운 고양이들을 좋아한다. 도저히 쫓아갈 수 없도록 계속 도망가 주었으면 한다. 그러다 아주 가끔 눈을 마주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음 번엔 무엇 하나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 눈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을 희망하면서.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핏빛파도
06/05/31 20:35
수정 아이콘
혹시 서강대 다니세요?
06/05/31 23:43
수정 아이콘
핏빛파도님 // '네'까지만 말씀드리면 되겠죠? ^^ 역시 대충 두루뭉술하게 묘사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모양이네요. 흠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3835 신한 마스터즈, 그리고 시드 결정전에 관하여 [10] Nerion5046 06/06/14 5046 0
23833 아 변은종........슬럼프 오나요. [19] Adada4880 06/06/14 4880 0
23831 어느 부부이야기2 [29] 그러려니4704 06/06/14 4704 0
23830 2006.06.13 PGR의 자게 [17] 김연우4881 06/06/14 4881 0
23829 "직업" 이라는것.. [22] 황태윤4366 06/06/14 4366 0
23826 PGR스러운 글이란........... [23] Pride-fc N0-13689 06/06/13 3689 0
23825 전통과 상술(월드컵과 관계있지만 축구이야기가 아닌..) [11] 나고리유끼3918 06/06/13 3918 0
23824 월드컵 일본-호주전을 보고 느낌 한일의 문제, 그리고 언론 [127] 윈디7874 06/06/13 7874 0
23823 [조금은 쓸데없는]06.6월 1주차 스타관련리그 리뷰 및 2주차 경기일정 [3] 명랑3859 06/06/13 3859 0
23821 서울 사는 시청자가 느끼는 엠겜과 온겜 [82] 낭만토스6618 06/06/13 6618 0
23819 당신 마린의 목숨의 무게는 어느정도입니까? [29] 볼텍스5145 06/06/12 5145 0
23818 다음주 토요일날 CJ Entus와 MBC Hero의 대결........ [21] SKY924268 06/06/12 4268 0
23817 [윈디생각] 다빈치코드 이야기 ( 스포일러 살짝~) [20] 윈디4571 06/06/12 4571 0
23816 운영진이 말하는 "리플을 닫겠다."의 의미해석 [127] NKOTB5577 06/06/12 5577 0
23815 삼성전자 VS 이네이쳐 엔트리 공개 [21] 초보랜덤4213 06/06/12 4213 0
23813 그분들을 기억하자.. [32] 달려라투신아~4382 06/06/12 4382 0
23811 6.15공동선언발표 6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이 광주에서 열립니다. [20] 에헤라디야4011 06/06/12 4011 0
23809 퍼펙트 트리플 크라운의 가능성. [195] 4thrace10745 06/06/12 10745 0
23808 6월4일 에딘버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다. [12] intothestars4114 06/06/12 4114 0
23807 [펌] 우리나라 월드컵 열기.. 이대로는 안된다.. [49] iloveus6647 06/06/12 6647 0
23806 [잡담]WP-AWP 1위가 바뀜과 동시에...재미있는 통계 이야기 [15] Davi4ever4602 06/06/12 4602 0
23805 서경종선수가 당한 건 아마추어 레벨에선 꽤 알려진 전략입니다 [24] 7706 06/06/11 7706 0
23804 다음주 일요일 최대 빅뱅 SK VS KTF 예상 [16] 초보랜덤5185 06/06/11 5185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