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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8/14 17:04:58
Name 임똘똘
Subject 황선홍 선수 인터뷰..(펀글)
95~96 2시즌, 제가 프로축구에 미쳐있던 그때 우아했던, 너무나 멋있었던 그의 움직임을 잊지 못합니다. 비록 직접 본 것은 이 두시즌 뿐이었지만 영원한 황선홍 빠로 남아있을 거 같네요. 그립습니다,,,그가

(똥볼, 개발이라고 욕하실 분은 덧글 사양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머 제가 그분들을 무슨 권리로 욕하겠습니까만은 그냥 은퇴한 선수는 아름답게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출처 :KFA ,

한국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선홍(37) 전남 코치가 현역 은퇴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축구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2002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황 코치는 2003년 브라질과 독일, 잉글랜드 등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돌아와 지난해부터 프로축구 전남 드래곤즈에서 지도자로 제2의 축구인생을 살고 있다. 올시즌에는 선수 시절 포항에서 자신을 지도했던 허정무 감독을 보좌해 현장 경험을 쌓는 중이다.

은퇴 이후 오히려 한국 축구에서 그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황 코치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1988년 대표팀에 발탁된 이래 14년간 대표팀에서만 103경기 출장-50득점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스트라이커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선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4세의 나이로 참가했던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을 이끌면서 굴곡 심했던 축구 인생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한 것도 그를 신화적 인물로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황 코치는 “골 하나가 너무나 간절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마지막 결과가 좋아서 다 잘 된 것처럼 남는 것 같다”며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여서 무척 행복했다”는 감회를 밝혔다.

한 시간 예정으로 진행된 인터뷰 시간은 그의 축구인생을 모두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대표팀 시절은 건너 뛰고 포항에서의 K리그 생활, J리그 경험을 중심으로 근황을 전하기로 했다.

인터뷰 내내 후배 선수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드러낸 황 코치는 스트라이커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냉정함’을 꼽으며 “문전에서 보다 차가워져야 판단력도 살아나고 득점 성공률도 높아진다”는 조언을 보냈다.

이와 함께 축구선수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며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시절 후배 안정환에게서도 배울 점을 찾아냈던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처럼 축구로 국민들에게 희열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말로 지도자로서의 포부를 밝힌 황 코치는 “축구가 계속되는 한 어떤 모습으로든 축구장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며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광양의 전남 선수단 숙소에서 진행된 황 코치와의 인터뷰 전문.

- TV나 언론매체를 통해 간간히 소식을 접하고 있지만, 현역 은퇴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다.

잘 지내고 있다. 광양에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말 주변이 없어서 은퇴 후 특별한 일 없었냐고 물어볼 때면 답하기가 참 곤란해진다. 아직도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낯설게 느껴지고, 선수시절의 습관이 남아있어 내가 선수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가끔 있다.

- 현역 은퇴 후 1년 동안 브라질, 잉글랜드 등지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살펴봤는가.

잉글랜드에서의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잉글랜드를 택했던 것은 선수 시절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그 팀의 훈련과정과 경기 운영, 선수 관리 등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축구가 유럽의 여타 리그와는 또다른 맛이 있는데, 특별히 파워풀하지 않으면서도 스피디한 경기 운영이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축구에 잉글랜드식의 스피디한 축구를 접목시킬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던 시간이었다. 90분 내내 혼신의 힘을 다해 줄기차게 빠른 템포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선수를 이해시키면 그런 경기 운영이 가능할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앞으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풀어갈 과제인 것 같다.

- 선수 시절과 비교해 가르치는 입장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차이라면?

선수 시절에는 자기관리에만 충실하면 된다.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보조 훈련을 한다거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스스로 보완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지도자 입장에서는 팀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전남 선수단이 40여명 되는데 팀 전체 훈련을 계획하는 것과 동시에 40명 개개인에 맞는 지도방법을 찾아야 되니까 참 어렵다. 무엇보다 사람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내 마음 같지 않아서 일일이 들여다 볼 수도 없으니 그 어려움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지금은 아무래도 초보 단계라 지도 과정 자체에서 많이 배우는 입장이다. 지나고 나서야 '아, 내가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잘못했구나'하고 깨닫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같은 팀 허정무 감독님이 대표팀 지도 경험도 있고 프로팀에서도 오랜 기간 감독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지도 노하우를 많이 배우고 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감독님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짚어주시는데, 그런 부분에서 특히 많이 도움을 받는다. 역시 경험 있는 분이라 다르구나 싶다.

- 전남에서 선수들을 지도할 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내가 공격수 출신이라 수비 지도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있지만 공격 쪽에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얘기하는 부분이 있다. 기술에 대한 것인데, 화려한 개인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볼을 터치하는 과정과 패스의 흐름이나 강약을 조절하는 부분 등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면 볼을 터치할 때 굉장히 바쁘다. 하지만 흐름만 빠르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멈출 때'와 '갈 때', 즉 완급 조절이 돼야 하는데 우리 선수들은 이 부분이 약한 것 같다. 이것과 함께 개개인의 기술적인 부분들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 편이다.

훈련 방법과 기술적인 면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훈련장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유도하는 것도 신경 쓰고 있다. 프로선수는 성인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을 뛰어넘어 훈련이나 경기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실력의 100%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 남궁도나 노병준, 네아가 선수의 얘기를 들어봐도 황 코치에게서 공격수로서의 역할을 많이 배운다고 한다.

내가 코치니까 그냥 하는 말들일 것이다.(웃음) 네아가는 외국인 선수인데다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어 내가 특별히 더 신경 쓰는 부분은 없다. 남궁도나 노병준 같은 선수들에게는 운동장에서 실수할 확률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이나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많은 상황들에 대해 이해시키려 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부분은 경험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내 얘기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선수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나중에 선수들이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변화한다면 보람을 느낄 것 같다.

- 선수 시절을 되돌아보자. 프로 시절부터 시작한다 해도 너무 많은 화제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드래프트 거부 사건을 빼놓을 수 없겠다.

지금도 당시의 상황이 선수들에게 부당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건국대 졸업을 앞두고 있던 1989년 겨울 홍명보와 함께 프로축구 드래프트를 거부했다. 연봉 3천만원도 헐값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내가 가고 싶은 팀을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현실이었다. 대표팀 경력이 있는 명보와 내가 같은 뜻이었고, 우리가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 이후의 후배들에게도 계속해서 불리한 족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모한 시도였다. 자칫 3년 이상 프로 경기에 참가할 수 없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발단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드래프트제의 부당함이 계속 논의됐고, 현재는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 선수 권익 차원에서도 당시 결단에 후회는 없다.

- 황선홍 코치나 홍명보 이사, 노정윤이나 김병지 등 비슷한 세대의 선수들 얘기를 듣다보면 기존 세대와는 뭔가 다른,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세대였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도 있는.

우리가 성장할 당시 시대적 배경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우리 세대부터 본격적으로 외국 생활을 겪으면서 시야가 많이 트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이건 유럽이건 다른 나라에서 축구를 하고 문화를 접하고 유학을 다녀왔던 경험 자체가 고스란히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많아지니까 좀더 발전적인 생각도 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도 모이면 자연스럽게 그에 관련된 얘기들을 나누게 되는데 다들 ‘야, 우리 무거운 얘기 좀 그만하자’ 하면서도 또다시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게 옳지 않겠나’, ‘그건 아니다.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식으로 축구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 93년 8대1 맞트레이드로 포항제철(현 포항)에 입단한 과정도 흥미롭다.

드래프트 거부로 국내에서 무적 선수가 되면서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 90년에 독일로 건너가 레버쿠젠 아마클럽을 거쳐 2부리그 부퍼탈에서 뛰고 있었다.
트레이드가 진행될 때는 내가 독일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사실 8대1 트레이드는 나조차도 놀랄만한 뉴스였다.
당시 포항제철은 세대교체 시점이었고 마침 프로축구 7번째 구단으로 전북현대의 전신인 완산푸마가 창단됐다. 많은 선수들을 확보해야 하는 완산푸마와 세대교체를 하면서 공격력을 보강하려던 포항제철의 이해가 맞아서 일이 잘 진행된 것 같다. 신생팀에 우선 지명권을 주던 당시 상황에서는 내가 완산푸마로 가야했지만 포항제철에서 선수 여덟명과 나를 맞바꾸자는 제안을 했던 것으로 안다. 나로서는 내가 원하던 팀에서 뛸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다.

- 90년대 중반의 포항은 축구팬들에게 최고의 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유공의 니폼니시 감독은 ‘황선홍-홍명보-라데가 나서면 운동장이 꽉 차 보인다’고 평했을 정도다. 포항의 전성기를 이끌던 주역이었는데.

95, 96년도에 포항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 포항은 항상 우승후보 1순위로 손꼽히던 팀이다. 팀이 그런 평가를 받으면 내색은 하지 않아도 선수 개인이 굉장히 뿌듯해진다.

선수 시절 나는 내가 항상 최고의 팀에서 뛰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J리그로 갔다가 2000년 K리그로 잠깐 복귀했을 때도 최고의 운영 마인드를 보여주는 수원삼성을 택했다. 90년대 중반 당시 포항도 마찬가지였다. 창단서부터 명문을 표방했고,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클럽이라는 자부심을 선수에게 심어주는 팀이었다.

지금 박지성이 맨유에서 뛰고 있는데 박지성에게도 ‘맨유 선수’라는 자긍심이 있을 것이다. 은퇴 후에도 ‘맨유 출신 선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이다. K리그에도 그런 명문 클럽이 나와야 한다. 어린 선수들에게 꿈과 목표가 될 수 있는 클럽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 당시 라데와의 찰떡 호흡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황선홍-라데’ 콤비는 현재까지도 K리그 역사상 최강의 공격 조합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처음에는 라데와 많이 싸웠다. 서로 자존심이 강해서 신경전이 심했다. 라데가 나한테 결정적인 패스를 안해주면 나도 패스를 안해주는 식이었다. 오죽했으면 허정무 감독님이 경기 중에 둘을 불러서 사이좋게 하라고 지시했을 정도다.
일년쯤 발을 맞추면서 그 다음해에는 마음을 비웠다. 서로 도와가면서 경기를 하니까 어느새 상대팀에서 훨씬 부담을 느끼는 콤비로 변해가고 있더라.

사실 내가 라데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이드에서 돌파를 잘 하는 선수가 있으면 내가 정말 편하다. 어차피 나는 골잡이기 때문에 골을 넣을 위치를 잘 잡고 있다가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를 다 제치면서 골을 넣을 수는 없다. 라데는 사이드에서부터 혼자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선수였다. 라데가 사이드로 나가면 내가 가운데서 상대 선수를 다른 데로 유인하고, 라데가 돌파했을 때 내가 움직여서 문전에서 패스를 받아 골을 성공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수비라인에 홍명보도 있었고 미드필드에 최문식, 서효원, 김기남, 박태하 같은 좋은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축구를 굉장히 재미있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팀을 강팀으로 인정했고 호흡도 정말 잘 맞았다. 당시 우리팀 선수들은 ‘열심히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으로 경기를 했다. 그런 자신감을 갖는 게 참 중요한데 모든 선수들이 그런 마음으로 경기를 했던 시절이었다. 다만 그 시절 좋은 멤버들과 좋은 경기력으로도 K리그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

- 98년 8월에 J리그로 이적했는데, 그 전에 ‘고졸 특급’이라는 이동국이 신인으로 포항에 입단했다. 이동국은 ‘당시 똑바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선수’였다고 황 코치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동국이와 6개월 정도 포항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투톱으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처음 동국이를 봤을 때 참 맹랑한 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볼을 찰 때 선배 앞이라고 수줍어하는 기색도 없고 자신감이 묻어난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어린 선수가 저렇게 볼을 찰 수 있을까 할 정도였다. 체격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어린 선수답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선배로서 지켜보는 이동국의 강점은 문전에서의 결정력이다. 골을 넣는 것은 ‘문전에서 너 이렇게 움직여라’고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으로 확률을 높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마다, 또 수비 위치에 따라 문전에서 골잡이가 움직일 수 있는 위치가 다 달라지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느낌으로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선수가 진정한 골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동국이는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슈팅력도 정말 뛰어난 선수다.

- 라데와의 호흡을 설명할 때도 언급했지만 골잡이는 문전에서의 찬스 포착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요즘 이동국은 폭넓은 움직임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데.

움직임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기복을 타는 것 같다. 동국이가 특히 좋아진 부분은 볼을 받을 수 있는 위치, 득점 찬스라고 할 수 있는 위치를 잘 잡는 것이다. 수비를 떨어뜨려놓고 타이밍에 맞춰서 그 위치로 가고 다시 볼을 받아 우리편에게 연결하는 과정이 중요한데, 이것도 잘 소화하고 있다. 다만 ‘좋아졌다 나빠졌다’가 반복되는 것이 흠이다. 지난해 독일과의 평가전에서는 상당히 좋았는데 올시즌 프로경기에서는 조금 뜸했던 것 같고. 선수 시절 한두 번은 이런 굴곡을 타게 되는데 스스로 지혜롭게 극복하기 바란다.

전기리그에서의 동국이는 포항의 외국인 선수 3명에게 묻혀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나 빼놓고 자기들끼리 다한다’고 생각하면 큰일이다. 지금은 다실바, 이따마르 모두 다른 팀으로 갔지만 사실 동국이었다면 그 선수들의 장점을 이용할 줄 알아야 했다. 왜 자기한테 볼을 안주냐고 하기 보다 ‘저 선수가 어떤 장면에서는 어떤 행동을 잘 하니까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겠다’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그게 자기가 사는 길이다.

- 혹자는 이동국이 신인시절 황 코치와 함께 지내는 기간이 6개월이 아니라 1년만 되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점을 배웠을 거라고도 한다.

선수는 계속 배워야 한다. 어린 시절에는 선배를 보고 배우는 점이 많다. 내가 대표팀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최순호, 이태호 같은 선배님들의 플레이를 보고 배웠다. 최순호 선배님은 포스트 플레이에 능하고 스크린 플레이에 뛰어났다. 이태호 선배님은 문전에서의 짧은 슈팅과 잔기술, 대학 시절 유승관 선배로부터는 실전에서의 움직임을 많이 배웠다.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것보다 스스로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장점을 흡수하는 게 가장 빠르다.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비단 선배의 움직임 만이 아니다. 내가 2002년 월드컵 대표팀에서 (안)정환이를 보고 배운 플레이가 있었다. 문전에서 패스가 연결될 때 바로 수비가 붙는 상황이면 내가 해결하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정환이에게는 특기가 있었다. 볼을 잡아서 한 발로 살짝 반대편으로 보내놓은 다음 한두 번 터치하는 페인팅 동작과 함께 슈팅으로 바로 연결한다. 이 연결 동작이 상당히 매끄럽고 좋다. 나는 그게 안됐다. 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환이의 움직임을 보고 연습했다. 왜냐하면 그 장면이야말로 실전에서 스트라이커들이 자주 접하게 되는 상황인데, 계속 연습해서 내 것으로 만들면 똑 같은 상황이 생겼을 때 나는 해결할 수 있는 선수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매 상황마다 상대 수비의 위치도 달라지니까 100% 골로 성공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비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대비를 하지 않으면 등지고 백패스 내주는 것 외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움직임을 다른 선수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면 그 선수를 보고 배워야 한다. 꼭 훌륭한 선수에게서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다 장단점을 갖고 있다. 앞서 정환이의 경우를 언급했지만, 빠른 슈팅타이밍과 간결한 슈팅이 장기인 선수에게는 오히려 풀 스윙으로 슈팅하는 것보다 짧게 끊어서 때리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즉 상황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에 내가 갖지 못한 장점을 다른 선수에게서 발견한다면 반복 훈련 등을 통해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스트라이커들에게는 더욱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내 움직임에 따라 상대 수비가 어떻게 따라온다’는 식의 변화는 그 패턴이 일정한 편이다. 때문에 상황에 따른 움직임과 대처가 유연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전남 선수들을 지도할 때도 강조하는 부분이다.

만약 동국이가 나랑 같이 생활했던 기간이 길어졌다면 좋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미는 이 맥락에서 해석하고 싶다. 내가 축구장에서 많은 경험들을 통해 터득한 좋은 점들을 보고 동국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황 코치의 선수 생활을 보면 1994년 미국월드컵을 기점으로 플레이가 만개했다고 한다. 시야가 트인 점이나 활동폭, 결정력 등 많은 부분에서 한 단계 올라섰다는 평가를 들었고 그 다음해 K리그에서도 8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활약이 대단했다.

미국월드컵 당시에는 내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좀 나태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최고일 것'이라는 자만심도 있었고 욕심이 많았다.

월드컵 전에 독일에서 2년 동안 선수생활을 했는데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독일생활 초기에는 4경기에서 5골을 넣으면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부상 때문에 상승세를 잇지 못했고, 마무리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미국 월드컵을 계기로 유럽으로 다시 진출하고 싶었다. 내 몸과 마음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이 앞섰던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욕심과 부담감이 앞서다 보니 미국 월드컵에서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실패가 약이 됐다. 축구팬들과 언론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상처도 받고 힘든 시간들을 보내긴 했지만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때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으로는 운동장에서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불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다시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1995, 96년에는 치명적인 부상도 없었고 8경기 연속골 기록도 내고 K리그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는 와일드카드로 참가할 수 있었고, 다 좋았다.

선수생활 하는 동안 누구나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내게는 1994년 월드컵 이후가 그런 시점이었던 것 같다.

- 1998년 8월에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했던 배경이 궁금하다. 당시에는 국보급 선수가 일본으로 간다는 것에 대한 반감도 적잖이 있었는데.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94년 미국에서의 부진을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만회하고 싶었다.
미국에서는 실패했지만 이후 K리그에서 한참 좋았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면서 98년 월드컵에서 뛰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98년이면 서른살이 되는데,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 은퇴 전에 유럽에서 단 1~2년만이라도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 중국과의 경기에서 다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97년 5월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하고 1년 4개월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시점이었다. 결국 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그때의 좌절감은 94년의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98년 월드컵이 내 인생의 마지막 월드컵이고 그 이후에는 다시 대표팀에서 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한국에 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94년의 실패로 겪었던 어려움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언론과 팬들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부상에서 언제 회복되나’, ‘다음 경기에 황선홍이 나오나 안나오나’, ‘황선홍은 왜 안보였나’… 이런 관심들이 나한테는 굉장히 큰 짐으로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일본으로 간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일본에서는 기자들이나 일부 축구팬들을 제외하고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족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주 편한 마음으로 길거리를 그냥 다닐 수도 있었다.

심리적으로 안정되면서 부상 회복도 빨랐고, 후반기 11경기에 출전해 6골을 넣으면서 경기 감각도 회복됐다. 이적 첫해 6개월을 그렇게 보내니까 다음해 자신감 있는 플레이가 가능해졌고 J리그 득점왕까지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느낀 강박감이 없어지니까 일이 다 잘 풀렸던 것 같다.

99년에 J리그 득점왕을 먹으면서 처음으로 2002년 월드컵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 전까지는 2002년에 대해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이미 98년에 대표팀과의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J리그에서 몸이 괜찮아지고 부상도 없어지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2002년까지 2~3년 남았는데, 한 번 해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봤다. 그때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어디론가 사라졌겠지.(웃음)

- 득점왕 수상했던 당시 기록이 25경기 출전에 24골로 거의 매 경기 한골씩 넣은 셈이다. 대단하다.

24골에 어시스트도 8개 했다. 매 경기 공격포인트를 올렸다고 봐야 한다. 전반기 11경기 출장에 7골을 넣었고 후반기 14경기에서 17골을 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그걸 다 넣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신들린 듯 넣었다는 표현이 딱 맞다. 그때는 쉽게쉽게 많이 넣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어떻게 넣었는지 의문스럽다.

당시 노정윤이랑 같은 팀에 있었는데 경기장 안팎으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축구를 하면서 굉장히 신나고 재밌었던 때가 95, 96년의 포항 생활과 99년 세레소 오사카에서 뛰었던 시절이다.

- 노정윤 선수가 ‘선홍 형이 득점왕 먹으면 나한테 양복 사준다고 했는데 약속을 안지킨다’고 했던 적 있다.(웃음)

정윤이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하고 다니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웃음)

- 마음 편히 축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게 득점왕의 비결이라고 했는데, J리그 수비라인의 압박이 헐겁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술적인 차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J리그는 포백 시스템을 쓰는 팀이 많기 때문에 1 : 1 방어가 아닌 지역방어가 주를 이룬다. 내가 제일 자신 있는 부분이 수비를 떨어뜨려놓고 움직이는 것이다. 수비 뒷공간으로 빠지거나 순간 페인팅으로 속이고 나오는 걸 좋아한다. 골 넣는 것보다 자신있는 부분이다.

환경 측면을 보면 당시 일본 축구장의 잔디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즉 나한테 패스가 정확히 들어올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는 말이다.

잔디 좋지, 상대편에서 지역방어 쓰지, 내가 수비 사이로 움직이는 걸 제일 좋아하지. 게다가 노정윤이라는 훌륭한 미드필더가 있었다. 당연히 골 찬스가 많이 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로서는 체력 부담도 덜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잘 맞았던 때였다고 본다.

- 선수 시절을 돌아볼 때 일본 생활이 황 코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가.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여러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행복했던 시간이다. 선수 생활하기에 참 편했던 곳이다. 요즘 우리 어린 선수들이 일본으로 많이 가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말 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편한 생활만 생각하고 건너가면 큰일이다.

- 언급한대로 요즘 일본으로 진출하는 젊은 선수들 많아지고 있는데, J리그를 거친 선배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우선 경제적인 보상이 괜찮고 문화권이 비슷하니까 생활이 편하다. 축구 외에 문화 차이로 인한 적응 기간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아무래도 좀더 편한 곳을 찾는 것이 사람 마음인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이건 유럽이건 축구 선수로 새로운 곳에 도전한다면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 하나라도 제대로 보여줄 자세가 돼야 한다.

일본에 가는 것만으로 안주한다거나 ‘돈이나 조금 벌고 오지’라는 생각으로 건너갔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쉽게 생각하고 갔다가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해 괜히 뒤에서 투덜대는 선수들은 선수로서 실격이다.

홍명보, 노정윤, 윤정환, 유상철 등 일본을 다녀왔던 선수들 중에서 누구 하나 한국을 욕되게 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팀에서 열심히 하면서 실력으로 J리그에서 인정 받았고, ‘한국 선수들은 참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돌아왔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어린 선수들이 선배들에게서 분명히 배워야 할 자세다.

해외 진출하려는 선수들은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일본을 발판으로 유럽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일본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목표를 향해 더욱 강해져야 한다. 산이 높고 강이 깊어도 자기 목표를 향해 끝까지 갈 수 있어야 강한 선수다.

예전 선배들에 비해 요즘 어린 선수들의 의지가 많이 약해진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데 차라리 K리그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낫다. K리그도 정말 힘든 무대다. 자꾸 도망가지 말고 여기서 버티고 싸우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 K리그를 사랑하는 팬들 입장에서 보면, 스타들이 계속 일본으로 빠져나가면 K리그는 누가 지키냐는 불만을 가질 만하다. 선수 입장에서 볼 때 K리그가 그렇게 매력 없는 곳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다. 요즘 K리그에서 이적료나 몸값 발표되는 것 보면 나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게다가 자유계약이 시행되면서 선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이 커졌다고 생각한다. 금전적인 부분만 보더라도 K리그에서 성공할 확률이 상당히 높아졌다.

축구장 환경을 생각해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전국의 어느 축구장을 가더라도 융단 같은 잔디가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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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ngbono
05/08/14 17:33
수정 아이콘
황선홍 홍명보.. 은퇴하셨지만 두분다 너무 좋아요!!
이번 축구올스타전에서 오래만에 경기뛴다고 들었는데 꼭 봐야겠네요.
핸드레이크
05/08/14 17:41
수정 아이콘
아 황선홍 선수..
정말...
슬픈비
05/08/14 17:45
수정 아이콘
참.. 우리나라 스트라이커로서 유일하게 한방. 을 가지고 있던 마지막 선수군요. 이동국 선수가 좀 더 성장해줬으면 좋았으련만..
아쉽습니다 여러모로
견습마도사
05/08/14 17:46
수정 아이콘
내가 이제껏 본 선수중 최고의 선수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지요..
05/08/14 17:46
수정 아이콘
아..진짜 그립죠
UcuPraCacia
05/08/14 17:51
수정 아이콘
제가 포항 산다는게 참 자랑스럽네요 ^^
꿈꾸는scv
05/08/14 18:13
수정 아이콘
아...그리운 두 분....
Slayers jotang
05/08/14 18:20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황선홍코치..이제 코치라고 불러야하는군요..슬프네요..ㅡㅜ
소식을 듣는군요...
부상만 좀 덜 당했더라도 더욱더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고 은퇴하실수 있었을텐데..
저역시....제 마음속의 최고의 선수입니다..^^
05/08/14 18:26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황선홍코치님(코치님, 아직 어색하네요 ㅠㅠ) 앞으로도 열심히만 해주세요~
무지개고고
05/08/14 18:27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 공격수 중 단연최고였습니다 .
물론 지금도 이동국 안정환이 있지만 아직은 황선홍선수만큼의 결정력이라던지 믿음감이 없는것도 사실인것 같습니다 .
물론 지금 무럭무럭커준다면 박주영선수가 그 계보를 더 멋있게 이어갈수도 있겠죠 ^ ^
05/08/14 18:40
수정 아이콘
안정환, 이동국, 박주영 선수가 앞으로 황선홍선수 보다 더 좋은 기록을 낼수 있겠지만..제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황선홍선수는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 입니다. 앞으로 코치로서 좋은 모습 보여주길 바랍니다.
안티벌쳐
05/08/14 21:00
수정 아이콘
황선홍선수... 94년 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 골키퍼 바로 앞에서 홈런볼 찬건 안타깝더군요. 아무튼 한국축구의 한획을 그은 훌륭한 공격수인건 인정합니다.^^
05/08/14 23:02
수정 아이콘
103경기 50골이면.. 우리나라에선 전설적인 기록이죠.. 캬~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에도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뽑으라면 전 황선홍이였습니다.
앞으로 코치로서의 황선홍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05/08/14 23:12
수정 아이콘
지금나이가 딱 박지성선수 정도만 됐어도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자리도 한번 넘볼만한 분이라 생각했는데.. 시대를 잘못만난게 아쉽죠.ㅡㅡ)) 그래도 어쨌든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스트라이커로서는 이 분만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네요...ㅡㅡ)))
Ange Garden
05/08/14 23:13
수정 아이콘
무지개고고님//우리나라 공격수 중 최고의 선수는 차범근 선수가 아닐까요?

황선홍 선수도 정통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어가는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홍명보 선수와 함께 앞으로 우리나라 축구의 발전을 위해 많이 노력해주시길 저도 기대합니다
swflying
05/08/15 00:38
수정 아이콘
제 기억속에 역대 우리나라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고르라면

no.18 황선홍입니다.

제가 초중고등학교 모두 90년대의 축구를 봐와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90년대 우리나라 축구에서 빼놓을 수없는 인물이기도하고

뛰는 것 자체가 멋있어 보였던 사람입니다.

어느새 추억이 되버렸네요.

90년대 한국축구 로망의 한가운데 있었던 선홍 선수.
앞으로 지도자로써도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낭만프로브~!
05/08/15 01:24
수정 아이콘
정말 로망 그 자체 선수... 그렇게 부상을 많이 당하고 까여도 보란듯이 성공한 선수~
이동국 선수가 꼭 그 뒤의 길을 가기는..
05/08/15 06:58
수정 아이콘
외국 어느 기자던가가 황선홍선수를 가리켜 세계 최고의 위치선정능력을 가진 선수...라고 얘기했던 게 갑자기 생각나네요.
05/08/15 11:23
수정 아이콘
차범근 선수는 위력적인 윙포워드로 보여집니다. 차범근 선수는 페널티 내/외곽 가리지 않고 강력한 미들슛을 성공시키길 잘했지만 플레이 스타일이 전형적인 윙포워드라 오리지날 스트라이커라고 보긴 힘들 것 같습니다. 반면 황선홍 선수는 순발력, 해딩, 정확하고 강한 슈팅, 패스 등 스트라이커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갖췄다고 봅니다. 특히 코너킥에서 올라온 공을 다이렉트로 바이시클 슛 할때는 정말;;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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