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주혁의 들러리로 설 7명 중 하나가 저란 말인가요?"
"꼭 좀 참여해주게. 실제로 K가 등장한 방송경기중 하나가 자네와 주혁군의 경기였네. K가 나타날 확률이 가능한 높으면 좋은 거겠지. 물론 승패는 전혀 관계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네. 일단 K를 잡아내게 되면, 방송으로 이 경기가 나가는 일은 없을거야."
의장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용호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우선 주혁에게 유리하도록 지는 척해야 한다는 점이 싫었고, 1:1경기가 아닌 1:7경기라는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직접 초대에 응해 만난 의장이란 사람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순백의 신사랄까. 방 분위기나 얼굴빛, 옷 색깔까지 전부 하얀색에 가까왔다.
"흰 색을 좋아하시나보군요, 의장님은."
"푸른 색을 싫어할 뿐이지, 딱히 흰 색이 좋은 건 아니야."
의장은 용호에게 커피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는 주혁군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주혁군에게는 비밀이네. 이 경기가 방송되지 않는 부분 말이야.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면 도망가버릴지도 모르니까 하하."
하지만 용호가 의장에게서 받은 건, 모든 게이머들이 공통적으로 느낄만한 하나의
감정뿐이었다.
'이 사람은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일 1시까지 준비해주게. 스타리그 일정이 이번 사태때문에 많이 밀려버려서 우린 급하네. 운이 없으면 빚더미에 앉게될 사람이 수두룩하니, 어깨가 많이 무거운 편이지 협회가."
"알겠습니다.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용호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했다. 의장은 짐짓 놀란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용호의 악수를 받았다. 그러나 용호가 문을 나선 뒤, 의장은 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어 양 손을 서둘러 닦아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건투를 비네, 용호군."
그리고 마침내 경기 당일이 되었다. 김주혁과 조용호, 그리고 나머지 6명의 신예들이 야외 스튜디오에 모였다. 하지만 그 8명은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주혁과 조용호는 서로를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김주혁과 대결을 펼칠 7명은 아무런 전략을 짜지 않고 다만 시작전에 PD들이 가르쳐준 제스쳐를 머리속에 입력해둘 뿐이었다.
맵은 국민맵인 헌터. ‘저그인 용호는 3해처리로 시작한다. 그리고 천천히 드론을 모으며 후반을 도모한다. 그 사이 김주혁은 초반을 찔러 저그 2명을 엘리시킨 뒤 방어모드에 들어가고, 그 타이밍에 용호는 타이밍러쉬인 양 저글링을 모아 주혁의 본진을 친다. 하지만 주혁은 우주방어에 성공하여 잠시 소강상태. 이어 플토와 테란들이 연합하여 주혁을 공격해오지만 시즈모드의 농성에 힘입어 다시 한번 후퇴. 그 사이 주혁은 드랍쉽을 생산하여 본진 뒤 사각지대에 탱크를 드랍하여 센터를 깬다. (이 때 진행자들은 게이머가 그걸 모를 수 있냐며 경악) 그 후 주혁은 약간 불리한 상황이 지속되지만 지속적인 벌쳐드랍과 센터부분에 벙커를 건설하여 합동공격을 유도, 상대들이 센터부위를 공략하는 사이 주혁은 대규모 드랍을 이용해 다른 상대들을 하나씩 물리친다‘는 너무 눈에 보이는 교과서적인 스토리였다.
그러나 방송용 경기가 아님을 알고있는 용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무튼 목적은 K의 체포니까.다만 스토리상으로 마지막에 주혁과 1:1상황에 놓인다는 건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일부러라곤 해도 1:1에서 주혁에게 밀리고 싶지 않은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용호는 헤드폰을 쓸 때까지도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고싶은 심정이었다. 강민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K를 잡아내는데 지금의 경기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잘아는 용호였기에 참아낼 수 밖에 없었다.
'K. 너는 대체 누구냐?'
용호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K와 가장 먼저 조우한 사람은 주혁이 아니라 용호 자신이었던 것이다. 혹 그는 전에 알던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용호는 스타트가 시작됨에 따라 점차 그에 대한 생각을 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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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게임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전 스타리그 우승자 김주혁 선수, 7:1의 험난한 전투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
"맵이 헌터인 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헌터맵에서는 입구가 막히는 장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장소가 있습니다. 그나마 막히는 방향에 위치된다면 더할 수 없는 행운이겠지만, 아니라면 글쎄요.. 과연 헌터맵에서 플토 지상군을 막아낼 수가 있을지 의문이네요."
"하지만 일단 초반을 넘긴다면 헌터에서 가장 무서운 종족은 테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부한 미네랄을 바탕으로 한 테란의 조합이라면, 가능성이 있을 듯합니다!"
"아, 다행히 입구가 막히는 위치입니다. 김주혁 선수 운이 따르는군요."
진행자들은 억지로 핏대를 세우며 해설을 하고 있었다. 7명의 게이머들은 미리 준비한 빌드대로 차근차근 초반을 넘겼다. 그리고 약속대로 한 명의 저그가 엘리당하고, 주혁은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6명의 게이머들은 그저 아무런 표정없이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막을 아는 용호는 그리 맘이 편치가 않았다. 그 붉은 메세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심적 부담을 주기 때문이었다.
K의 마지막 경고를 받은 주혁은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저절로 마우스를 쥔 손에 쥔땀이 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컴퓨터 안에서만 존재했던 그가 실제인간인 주혁에서 어떤 피해를 줄 수 있단 말일까, 주혁은 알 수 없었다.
"김주혁 선수, 초반을 잘 넘겼습니다. 입구를 단단히 막은 채로 드랍쉽으로 각 게이머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5시 방향으로 날아가는 투탱크들은 분명..."
"그렇습니다. 5시 방향의 모서리에는 탱크가 드랍가능합니다. 일단 떨어지게 되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될 터인데요. 아마도 김주혁 선수는 넥서스를 일점사하지 않을까싶네요!"
"아.. 그런데 5시는 전혀 그걸 모르고 있어요! 설마 헌터맵에 저런 부분이 있다는 걸 망각한 걸까요?"
"네, 물론 프로경기에서는 헌터맵을 쓰지를 않지요. 하지만 이건 분명 실수네요."
5시 넥서스는 투탱크드랍에 의해 금방 날아가버리고 승부는 4:1의 전개가 되었다. 이 때 쯤,주혁의 물량이 센터로 진출하여 벙커를 지었는데, 용호와 1시방향의 플토가 연합공격을 펼쳐 주혁의 전진을 저지하려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혁의 물량 전부가 아니었다. 주혁은 일부 병력을 드랍쉽으로 돌려서 1시플토의 빈집을 털기 시작했다. 이 때 용호는 저글링을 보내어 원조하는 척하다가 뒤로 뺐다. 진행자들은 용호가 1시의 같은 팀을 포기한 게 아니냐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지만, 모두가 연극에 불과했다.
곧 2:1의 상황이 되었고, 다시 1:1의 상황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원래 짜온 스토리와 완전히 똑같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주혁이 승리하는 구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용호와 주혁은 1:1이 되자마자 온 신경을 모니터에 집중했다. K는 직접 메세지를 날릴 경우도 있고, 게임에 유닛으로 참가하여 피해를 줄 때도 있었다. 둘은 어느정도 균형을 맞춘 다음 서로를 향한 공격을 중단했다. 그리고 우측 상단의 유닛수를 쳐다보았다.
'어서 나타나라, K!'
무대 뒤에서는 박재익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K가 머무는 시간은 불과 30초, 이 시간안에 모든 작업을 완료해야했다. 스튜디오의 컴퓨터들은 전부 하나의 서버에 연결되어 있는데, 각 라인은 박재익의 손으로 차단 가능했다. 결국, 이것은 주혁과 용호의 눈썰미에 달려있는 것이기도 했다. 얼마나 빨리 발견하느냐가 K를 잡을 수 있느냐의 관건이었다.
용호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게임사운드를 모두 껐다. 그리고 헤드폰의 음향을 최대로 올렸다. 이것은 강민이 지시한 내용이었다. 주혁은 K가 이 함정을 알아차릴까 걱정했는지 용호의 앞마당으로 와서 잠시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용호의 귀에는 탱크의 포격소리도 마린의 스팀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혁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용호는 반격하지 않고 앞마당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주혁의 유닛을 공격해봤자 계산에 혼선만 가져올 뿐이었다. 용호는 모든 유닛에 홀드명령을 내리고 일절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
'뭐하는거냐, K. 이러다간 엘리당하겠어!'
용호는 주혁의 탱크에 밀려가는 앞마당을 쳐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결승 5경기에서도 이런 식으로 지지 않았던가. 그 악몽을 떠올리면서 어서 K가 나타나주길 기다리는 용호였다.
그런데 그 순간, 묘한 효과음 하나가 용호의 귓가를 스쳤다. 무언가 금속같은 게 지나가는 소리, 강민이 설명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주혁의 컴퓨터에서도 이상이 발견되었다. 공격을 하면서도 계속 유닛숫자를 확인하던 주혁이 이상을 발견한 것이다.
'용호:ppppp'
'주혁:ppppp'
"지금이다, 어서 회선을 차단해!"
두 게이머의 사인은 거의 동시였다. 박재익의 고함소리에 직원들이 얼른 회선차단작업에 들어갔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 작업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용호는 그 동안 요환이 지시한 내용을 실행했다.
'이봐, 네가 얼마나 스타를 잘 하는지 몰라도 8:1로 싸우면 우리가 이길걸?'
그가 메세지에 답할 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떻게 해서는 그의 자존심을 긁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용호는 재차 엔터키를 누르고 메세지를 날렸다.
'클로킹한 채로 숨어서 그러는 건 좀 비겁하지 않나. 자신있다면 한 번 붙어보자, 나 조용호는 절대 피하지 않을테니까!'
그러자 천천히 모니터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지금껏 보지못한 커다란 글자들이었다.
'회선이 차단되었군. 함정인가?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함정인가?'
"으아아악!"
겁에 질린 김주혁이 자리를 박차고 스튜디오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뚫린 길이든 막힌 길이든 상관없었다. 뚫린 길이면 더욱 적당할 뿐. 김주혁은 마치 그 글자들이 자신을 쫓아오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계속하여 달리고 달릴 뿐이었다. 그러나 용호는 이를 악물고 자리를 지켰다. 이것이 K의 마지막이라면, 도망쳐서는 안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아직 K에게는 물어볼 것이 많았다.
용호는 붉게 변해버린 화면에, 다시 메세지를 올렸다.
'K, 너는 왜 날 찾아온거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내게 온 이유가 있는건가?'
'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용서하지 않겠다 김주혁.
K는 김주혁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듯했다. 그러나 박재익은 이 화면을 보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7개의 컴퓨터는 각각 분리된 채 그 곳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K는 아직 그 컴퓨터 속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70%이상의 성공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수고했네, 용호군."
멍하니 앉아있던 용호에게 다가온 건 의장이었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조용히 모니터의 전원을 끄고 이어서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용호에게 장갑낀 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승리야."
그렇다. 용호는 그제서야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아직 무언가 가슴아픈 것이 남아있었다. 왜 그게 가슴이 아파야하는지도 모른 채 용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들이 달려와 컴퓨터 모두를 압수해가고 조금전까지 게임이 펼쳐지던 무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런 건, 게임이 아니야... 이런 건."
용호는 무대를 터벅터벅 걸어내려와 문을 빠져나왔다. 다른 신예게이머들도 천천히 사라져가고, 진행자들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냉수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 텅 빈 자리에서 웃고있는 건 단지, 의장과 박재익뿐이었다.
"허억, 허억."
숙소로 되돌아온 주혁은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방 구석에 쪼그려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끝났어. 이제 끝났어. 이제 끝난거야 김주혁. 넌 괜찮아..."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의장의 말대로 K가 등장했으니, 분명 그 컴퓨터들은 차단되었을 터였다. 주혁은 스스로를 안정시키려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동료들이 전부 나가고 불도 꺼진 상태여서 숙소는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주혁은 벌떡 일어나 모든 불을 켜고 음악을 켜고 티비를 틀었다. 그러자 조금 더 안정되는 듯했다. 주혁은 갑자기 갈증을 느껴 우유를 한 컵 들이마셨다. 흰 색이었다. 주혁은 흰 색이 그렇게 편한 색인줄 처음 깨달을 수 있었다.
딩동-
그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김주혁은 깜짝 놀라 얼른 문으로 다가가보았지만, 그는 다름아닌 같은 팀 소속 동생이었다.
"놀라게 하지마, 이 녀석아!"
"빨리왔네, 형? 조금전까지 방송경기 있지않았어?"
"됐어. 귀찮으니까 나한테 말걸지 마 지금은."
주혁은 짜증을 내며 티비앞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형, 스타 한판 안할래? 나, 내일 경기가 있거든."
"스타이야긴 하지마! 그리고 말걸지 말랬거든?"
모든게 귀찮게 느껴지는 주혁이었다. 이대로 일주일만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거지. 내가 알기로 녀석은 분명히...'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주혁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형, 나 형 컴퓨터 좀 쓸게. 내 컴퓨터는 조금 이상하더라 요즘."
'대체 그 때가 언제였지. 분명 부산 사직동 피시방이었을텐데, 언제쯤이었을까 그 대회는.'
"오, 부팅속도 빠른데? 역시 우승자의 컴퓨터는 달라."
"야, 누가 내 컴퓨터 쓰랬어!"
기억을 되짚던 주혁은, 그제서야 동생이 자신의 컴퓨터를 쓰려하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소리를 빽 질렀다. 소중한 것이 잔뜩 들어있는 그 컴퓨터를 남이 손대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기가 죽은 동생이 금방 컴퓨터를 종료시키려하자 주혁은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런데 불현듯 주혁의 머리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야...임마.. 거기 연결된 키보드와 마우스는 대체 어디서 난거야? 원래 있던 키보드하고 마우스는 내가 분명히...“
"아, 형이 챙기지도 않고 바로 스튜디오를 나가버리는 바람에 내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대신 들고온거야. 방송경기때문에 형이 들고나갔던 거잖아. 하마터면 그것들까지 압수당할 뻔했지 뭐야.“
"뭐?"
주혁은 지뢰라도 밟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컴퓨터를 향해 다가갔다. 동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컴퓨터를 종료시키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는 종료되지 않았다. 그 컴퓨터에 연결된 마우스와 키보드는 바로 수십분 전에 K의 컴퓨터와 연결되었던 것이었다.
"이상하다, 종료명령이 안먹히네? 단축키도 안먹혀 형!"
"비켜! 내가 한다!"
당황한 주혁은 직접 컴퓨터를 종료시키려다 안되어서 전원을 꺼버렸다. 하지만 전원조차 꺼지지가 않았다. 주혁은 마우스와 키보드를 휘젓다가 그것도 소용없자, 결국 미친 듯 모니터를 집어던지고 본체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꺼져! 이 악령아!"
모니터의 화면이 깨어지면서 여자의 비명소리를 내었다. 본체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놔뒹굴었다. 깜짝 놀란 동생이 허겁지겁 숙소밖으로 도망치는 사이, 주혁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한번 던져진 모니터와 본체를 계속해서 집어던지고 집어던졌다. 부서진 유리조각이 온 손가락에 박혀도 주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악령이었다. 영원히 떨칠 수 없는 그 시절의 악령.
"하아,하아."
주혁은 그것도 모자라 숙소 어딘가에서 커다란 망치를 가져와 모니터와 본체를 깨어부수기 시작했다.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소리에 주혁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차마 손을 멈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악령은 사라지지 않을테니까.
"죽어! 죽어! 죽어버려!"
이성을 잃은 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비치는 순간, 그는 온 힘을 쏟아내어 모니터를 창 밖으로 내어던졌다. 숙소가 3층이라서 떨어진 모니터는 처참한 소리를 내며 놔딩굴었다. 그 모습을 위에서 쳐다보던 주혁은 히죽거리며 본체를 어깨 위로 짊어지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주혁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과 함께 힘껏 본체를 내던졌다.
그래. 그렇게 떨어져가는거야. 바닥에 부딪혀 박살날 본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바닥은 점점 나가오고 본체는 이제 악령과 함께 끝이 나겠지.
‘한데, 한데 왜?... 3층에서 내려다본 바닥이 이렇게 커보이는거지?’
"우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