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가볼까."
주혁은 천천히 오른손을 움직여보았다. 예전만 같지 않지만, 그래도 통증은 전혀 없었다. 이제부터는 험난한 듀얼을 뚫고 올라가야하기에, 할 일이 많은 오른손이었다. 주혁은 계단을 걸어올라가 대기실로 향했다. 마침, 첫 상대가 그 사람이었다. 주혁은 너무 일찍 만나버려 김이 샌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좋은 승부를 벌이겠노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이제 퇴원한 건가?"
대기실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용호였다. 언제나 그렇듯 먼저 악수를 건네는 용호의 웃음에 주혁은 묵은 때를 벗겨내듯이 그렇게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응, 많이 기다렸지 형?”
"여기 안심 일인분 추가요!"
진호는 여자친구와 함께 성준,정석의 가게에 와있었다. 성준의 요리솜씨가 눈에 띄게 좋아진 덕인지, 체인점 안은 대낮인데도 북적북적했다. 그러나 진호의 여자친구는 이 가게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소엔 잘웃고 잘 떠드는 진호가 이 가게에서만은 조용했기 때문이다.
"또 보는거야?"
"음... 아는 얼굴이 보여서."
"흥, 첫사랑이라도 나온거야?"
진호는 티비화면을 통해서 용호와 주혁의 경기를 보고있었다. 안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티비에 혼이 빠진 진호의 옆얼굴을 보며 그녀가 이따금 쏘아붙였지만, 진호는 그리운 듯한 표정으로 티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응, 내 첫사랑은 바로 저 곳에 있었어...지금도 이렇게 잊을 수가 없는 걸.’
"네, 슈퍼프로리그 개막전은 SGO팀과 SKMIRICOM팀과의 대결이 되겠군요. 이 두 팀은 전력상으로도 비슷하고, 또 다른 측면으로도 닮은 점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두 팀의 감독들, 참 반가운 얼굴들이죠. 잠시 스타계를 떠나있다가 군대제대와 함께 복귀한 강민 선수와 임요환 선수는 이제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팀 멤버들이 두 선수의 정열을 이어받아 좋은 경기 펼치리라 믿씁니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추억의 짤방이 떠오르는군요. 강민선수와 임요환 선수는 짤방으로도 초인기선수들이었죠!"
스타가 저물어갈 즈음에도, 그들은 그 곁에 있었다.
"안녕하세요,오랜만에 뵙는군요."
기욤이 수현의 집을 찾은 것은 3년 뒤였다. 3년간 캐나다에 가 있는 사이, 수현의 어머니는 전보다 더 젊어진 듯 했다. 집 안을 들어가보니 집안 구조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이제, 초등학생 수현의 집이 아니라 어엿한 중학생 수현의 집이 변한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낀 기욤은 생각난 김에 수현의 방 안에도 들어가보았다. 그러나 분명 많이 변해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방은 그 때 그대로놓여있었다.
"실은 수현이 방을 하나 더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 방은 그 전처럼 놔두기로 했어요. 생각해보니, 이 방에는 너무 많은 추억이 잠들어 있어서 아무렇게나 치워버릴 수가 없었답니다."
“수현이는 그동안 계속 잠들어있었는 걸요.”
“하지만 수현이는 꿈꾸는 걸 좋아하니까, 분명히 꿈 속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었을거에요.
호랑이가 되어 달렸을 수도 있고, 새가 되어 날았을 수도 있고, 혹은 변신로봇이 되어 악을 무찌르러 다녔을지도요.“
그녀의 말에, 기욤은 그 때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렇군요. 정말 많은 시간이 잠자고 있어요 여기는."
기욤은 문득 책상 앞에 놓인 수현의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한장 한장 그 일기장을 넘기다보니, 눈에 띄는 어느 날의 일기가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수현이 깨어난 후 일주일 정도 후일까.
'오늘은 또 꾸믈 꾸어씁니다.
나는 중학새이 되어있었꼬
눈이 파란 형이 집으로 찾아왔어요
파란 형은 나더러 엄마를 깨워달라 해씁니다
엄마가 잠자고 있대요
그래서 나는, 형 엄마를 마난면 마니 깨울거라고 해써요
꿈에서 보면 그러케 할 거에요'
"오늘이 마지막인가..."
의장은 창문을 통해서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머물러온 이 흰 건물도 이젠 안녕이었다. 모든 임기를 마치고, 이제 내일이 되면 그는 평범한 보통사람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계약을 통해 의장직을 맡게된 거니까."
의장은 준비라도 하듯이 흰 옷을 벗고 검은 옷을 갈아입었다. 사실, 이야기를 잘 하면 의장직을 일년 정도는 더 할 수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눈에 가시로 여기던 기욤이 한동안 협회 근처에도 오지 않자, 의장으로서도 재미가 없어져버린 탓이다. 의장은 기욤과 티격태격 싸우던 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당분간 기욤을 만날 일은 없을 듯했다.
"의장님, 국제전화입니다. 캐나다라는군요."
그 때 들어온 비서의 말에, 의장의 눈썹이 흔들렸다. 하지만 전화기를 드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댄 의장은 믿기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신, 깨어난 건가요?"
그것은 기욤의 어머니였다. 15년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녀가 기적처럼 의식을 찾은 것이다. 의장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혼수상태에 빠진 게 누구때문인지 의장은 잘 알고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대다수의 말들은 변방사투리에 가까와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을 마칠 때까지 의장이 올바로 이해한 것은 단지 한 문장에 불과했다.
'I Love You, my sons.'
그리고 다시 1년 후 여름, 용호와 주혁은 다시 결승에서 맞붙었다. 용호는 이 경기에서 2:3로 아깝게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경기 후 두 사람은 승패에 연연하지않고 웃으며 포옹과 악수를 나누었고, 이후 스타리그에서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경기후에 먼저 악수를 건네는 훈훈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3년 뒤, 그들 8명의 영웅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나이가 든 만큼, 키보드와 마우스 대신 담배와 술잔이 놓였고, 농담대신에 날씨와 세상사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2차는 언제나 피시방이었다. 수년 전의 그 날을 축복이라도 하듯 게임을 하다보면 언제나 그 푸른 메세지가 눈 앞에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