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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8/08 14:09:33 |
Name |
윤여광 |
Subject |
Fallen Road. Part 1 -1장 19화- [-조우#10-] |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9화.
[-조우#10-]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우리를 건물의 뒤뜰로 안내했다. 간단한 훈련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 그 곳은 잘 정돈된 검들과 방어구 그리고 몇몇의 운동 기구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뒤 따라 나오던 아크와 켈모리안은 프렌과의 대화를 마친 란에게 붙들려 함께 오진 못했다. 나와 크리스 역시 저지당할 뻔 했으나 아니 란이 그를 저지해줬으면 했지만 처음과는 달리 잠깐의 시간이면 된다는 말로 나를 데려 나온 그는 어딘가 모르게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몇 렌의 검을 쓰십니까?”
“네?”
“렌 말입니다. 렌wren.”
“아. 손에 익은 것은 3렌입니다.”
“흐음. 미안하지만 우리 하우스에 갖춰진 것은 4렌부터입니다. 너비의 차이가 있겠지만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네. 상관없습니다.”
크리스는 각각 규격에 맞춰 정리된 검들 중 가장 작은 크기의 그것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검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땐 자신에게 맞는 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신체조건 그리고 완력에 따라 검신의 길이 너비 무게를 고려하여 선택하기 쉽게 책정한 규격이 바로 렌이다. 그 중에서 내가 사용하는 3렌의 검은 작은 편에 속하는 크기와 무게이다. 아무래도 완력이 모자라는 탓에 그 위로의 검은 내가 들고 휘두르기에는 무거웠다. 따로 힘을 기를 것이라는 계산 하에 무리하게 높은 렌의 검을 잡기 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검을 선택한 후 차차 그 숫자를 높여가는 것이 효율적이라며 아크의 검이 내 것보다 크다며 징징대는 나를 그는 그렇게 달랬었다.
“시간이 모자란 듯 하니 대련은 자유대련으로 하겠습니다. 히트 포인트는 전신. 승부는 3합.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저어 그런데 수련용 검은 따로 없으신가보죠. 다칠 것 같은데.”
“검을 다시 한 번 보시지요.”
그는 살짝 귀찮다는 듯 내게 검을 다시 한 번 살필 것을 권했고 나는 그제야 그 의미를 알고 얼굴이 붉어졌다. 날이 없는 검. 즉 검의 모양을 갖춘 쇳덩이라는 얘기다.
“그것으로 베거나 찌른다고 해서 죽거나 상처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훈련하는 과정에서 동료를 베는 사고가 생길 위험 정도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여 준비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반적인 검과 같은 크기 너비 그리고 무게. 손의 감각을 유지하되 살상 능력은 없앴습니다.”
“아아. 네.”
“너무 안심하셔도 곤란합니다.”
“에? 무슨 말씀이신지.”
“베거나 찌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완전히 부상의 가능성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대련에서는 말입니다.”
“…….”
“어디 한 군데 부러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하죠.”
살벌한 경고 한 마디를 끝으로 크리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굳게 다문 입과 잔뜩 힘이 들어간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로 동시에 내 말문까지 막아버리고 말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의 일부는 어서 자세를 취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기대에 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도 안 된 상대를 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는 눈으로 계속해서 날 쳐다보던 그는 끝까지 머뭇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자세를 풀고 길게 한 숨을 내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네?”
“왜 그러시냐고 물었습니다. 대련을 먼저 신청한 것은 요르씨이고 저는 동시에 여러분을 모시고 베니자크 궁으로 합류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시간이 펑펑 남아도는 한가한 휴일 아침 같은 때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해하셨다면 어제 자세를 취해주시지요. 대련 신청을 받아들인 제게 최소한의 예는 갖춰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공기가 무거워지며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이번에는 머뭇거림 없이 그의 바람대로 검을 들어 상대에 초점을 맞춰 섰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잠깐의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매일 아침 아크와 함께 주고받던 몇 번의 호흡과는 다른 위압감이 나를 누르기 시작했다. 단지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한 운동의 수준이 아닌 실제로 적을 앞에 두고 그를 노리는 듯 한 명백한 적대감. 검을 맞대고 서 있는 상대를 나와 아크와 같이 그리 너그럽게 봐줄 만 한 여유가 그에게는 없어 보였다.
“하앗!”
나와 마찬가지로 타깃을 향해 수직으로 들어 초점을 맞추던 그의 검은 돌격과 동시에 허리의 왼쪽을 횡으로 베고 들어왔다 검을 거꾸로 잡고 팔에 댄 채 다리로 뒤로 밀리지 않게 막는다. 부상의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쳐내기엔 완력의 차이가 클 것이다. 일단은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방어가 끝난 후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상황 요소다.
“크읏.”
“으랴압!”
왼쪽을 치고 들어온 검이 반대로 크게 돌아 들어왔다. 서로 등을 맞댄 채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또 한 번 간신히 막는다. 다만 이번에는 수비 후 수비가 아닌 수비 후 공격이다. 팔에 딱 붙이고 있던 검을 다시 위로 뻗어 올려 크리스의 검을 쳐내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생각하는 동작의 이미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여지없이 타격을 허용하게 된다.
-채앵-
“에라!”
기세 좋게 들어 올린 쇳덩이는 다행히 크리스의 그것을 보기 좋게 뒤로 물리쳐버렸고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팔이 뒤로 밀리자 그의 자세는 작게나마 틈이 보이게 주춤거렸다. 기회다. 분명 마지막 기회다. 가슴이 휑하니 팔이 뒤로 밀린 상대가 다시 방어가 가능하도록 추스르는데 걸리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선 그대로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 빠르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 흘러가는 그림. 이제 승부는 끝이 나야 한다. 아직 다음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한 시간 역시 만들어야 한다.
“어푸푸!”
시원하게 앞으로 찌르며 들어간 나는 막기 보단 가볍게 옆으로 피해버린 크리스 덕분에 오히려 내 움직임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버렸다.
“뭡니까?”
“쿨럭쿨럭. 에?”
“움직임은 꽤 쓸 만하지 않습니까.”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들으며 첫 페이즈를 간신히 끝낸 나는 그냥 검을 거두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끝낼까 하는 급한 충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긴장 가득한 대련은 정말 싫다. 가끔 아크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긴 하지만 그 때야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맞으면 되는 것뿐이고 위압감을 느끼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인정사정없는 매몰찬 사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단 말이다.
“다음 페이즈.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하아. 하아. 얼른 끝내야겠죠?”
움직인 거라곤 제자리에서 팔 한 번 다리 한 번 움직인 것뿐인데 숨이 차올라 온다. 반면에 그는 차분히 자세를 다시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달려들기 위해 발을 고르고 있었다. 어느 발이 먼저 치고 나오느냐에 따라 베느냐 찌르느냐가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습관을 알고 있는 친숙한 상대에게 한정된 이야기일 뿐. 항상 대련이라고는 아크와 해왔던 것이 전부인 나는 또 습관적으로 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정보에 한 눈이 팔린 사이 어느새 그는 내 얼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저 발모양은 아무래도 잔상인 모양이지?
“하압!”
“아악!”
두 남자의 기합과 비명이 교차하면서 두 번째 페이즈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고 덕분에 내 바람대로 승부는 그렇게 쉽게 갈려버렸다. 남은 건 망가진 자존심과 뒤틀리는 것처럼 아려오는 어깨의 타박상. 아 젠장.
“수고하셨습니다.”
“크윽. 수…….수고하셨…….”
“미안합니다. 본의 아니게 평소 훈련 때와 같은 강도로 내려쳐버렸네요.”
애초에 별 상대도 되지 못할 나를 앞에 두고 뭣 때문에 평소에 다른 동료들과 나누던 실력 그대로 나를 내리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나는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막상 닥친 후엔 또 새로운 느낌으로 찾아오는 패배감과 고통에 신경 쓸 여유를 찾진 못했다. 다행히 그가 어서 가자며 걸음을 재촉할 만큼 자리에서 웅크리고 있지는 않았다. 눈가가 뜨끔뜨끔한 걸 보니 아무래도 눈물이 찔끔 흘러내리는 것 같다. 눈물 한 방울로 바꾸기엔 참 저렴한 통증이다.
“가시지요. 세면하실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싱겁게 끝나버린 승부에 한 치의 미련이나 회상 없이 곧장 나를 다시 하우스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내내 나는 얻어맞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상처 부위를 확인해야 했다. 혹시나 고약이라도 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는 뭐 그까짓 상처로 죽을 것도 아닌데 약을 바라느냐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안내받은 세면대에서 눈물만큼이나 찔끔 흐르는 땀을 씻어내고 맞은 곳을 천천히 흐르는 물줄기에 붙여 대어 최소한 퉁퉁 부어올라 심하게 티가 나지 않도록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차피 내가 질 것은 뻔 한 사실이었지만 돌아가서 만나야 할 아크와 켈모리안에게 당연한 패배와 당연한 상처를 보여주며 놀림 받고 싶진 않았다. 질 것을 알면서도 덤벼든 것은 이곳에 온 뒤로 계속해서 들어야 했던 반 조롱이 섞인 불쾌한 농담 때문이었고 그것을 해소할 거리가 필요했다. 엉뚱하게 화풀이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돌아가서는 할 말은 한다며 생색이라도 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다.
#
결국 우리는 아카데미에 출석하는 하급 관리직 시험에 응시하는 젊은 학도들 마냥 입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히는 셔츠와 바람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 덕분에 땀이 줄줄 흘러 불쾌했다. 마치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 마냥.
“어떠냐.”
“뭐가?”
“저 사람. 어떠냐고.”
아크는 아무래도 크리스의 실력이 신경 쓰였는지 베니자크 궁으로 가는 길 내내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다. 사실 그렇게 유쾌한 기분도 아니었고 뻔 한 대답을 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되는 질문에 짜증이 났다.
“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한 번 들이박아 보던가.”
아크는 빈정대는 내 대답에 눈에 힘을 주고 당장이라도 쥐어박을 듯 나를 노려봤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정면만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단 번에 승부가 나진 않았다고는 하나 어쨌든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사실이다. 실력 차이가 크다고 스스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분한 것은 순전히 내 지나친 승부욕 때문이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승부욕은 오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우리랑은 차원이 달라.”
“뭐?”
“우리처럼 재미삼아 검을 잡고 재미삼아 대회에 나가보겠다는 사람이랑은 다르다고.”
“무슨 말이야.”
단순히 수련을 위해 휘둘러온 검이 아니다. 살기 위해 잡고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휘두르며 명예를 위해 거둔다. 단지 몇 번 스쳤을 뿐이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나와 아크에게는 없는 선명히 보이는 명분이 있었다. 명분이라고 하기엔 말이 좀 속된 것일까. 사실 그와 나의 차이점을 찾아보려는 고민 속에서 분명한 실력차이를 제외한 그 무언가를 정의 내리려고 했을 때 쉬울 것 같았던 그 질문은 의외로 긴 시간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종합하기가 힘들다. 이런 건 싫은데. 일일이 세부사항을 다 기억하기에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냥…….좀…….”
“말 좀 제대로 해 봐. 뭐가 어떻다는 말이야.”
“달랐어. 많이. 흉내기기도 배우기도 힘들어 보였어.”
“야! 알아듣게 좀 설명해봐!”
“정 그렇게 알고 싶으면 형이 가서 한 번 들이박던가! 왜 자꾸 사람 귀찮게 물어보고 난리야.”
이쯤 되니 아크도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한 얼굴로 드디어 나를 세차게 쥐어박더니 앞서 걷는 크리스에게 쪼르르 달려가 뭐라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으로 간단하고 상쾌하게 지금은 잡담을 할 때가 아니라며 대화를 거절당한 아크는 다시 궁시렁거리며 뒤로 돌아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야했다.
나와 크리스의 대련이 끝난 후 란은 반강제로 가져온 옷을 뒤집어 씌웠다. 뭐가 그리 급한지 호흡까지 급해진 그는 나에게 대강 옷을 씌우자마자 천천히 채비를 하는 크리스에게 소리를 지르며 서두르라며 짜증을 냈다. 대장 프렌 역시 나와 크리스에게 시간이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라며 점잖은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나는 쓸데없는 객기를 부려 일행의 이동에 지장을 준 셈이 됐고 크리스 역시 생각 없이 대련에 나섰다며 눈치를 봐야했다. 사실 내가 객기를 부린 것은 맞지만 그것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크리스마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미안했다. 결과적으론 스스로 내 무덤을 판 꼴이다. 진 것도 진 것이고 베니자크라는 곳으로 걷는 내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자칫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간 시간에 민감해진 모두에게 화살 세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말하기 싫었는데 아크가 계속해서 말을 거는 바람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짓을 해서.”
프렌 그리고 란과 함께 앞서 걷고 있던 크리스가 뒤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무거운 분위기에 어느 정도 책임을 함께 하는 입장에서 내 굳은 얼굴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아크에게 짜증 가득한 말을 내뱉는 내 모습이 자기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하긴. 당신이 날 좀 세게 치긴 했어.
“아니에요. 제가 생각 없이 그렇게 나서는 바람에. 오히려 곤란하게 만들어서 제가 더 죄송해요.”
“1무 1패군요.”
“네?”
“승부는 제가 이겼고.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서로 미안해하고 있으니 무승부라고 치는 거죠.”
그걸 지금 나더러 웃으라고 하는 소린가요. 아니면 난 죽어도 당신과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니 끝까지 전투 의지를 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머리에 박아주시려는 건가요. 그냥 1무 1패고 뭐고 내가 다 진거다. 2패지. 3전2선승제에서 볼 것도 없이 끝나는 2연패.
“아…….하…….하하.”
“농담할 기분이나 분위기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 웃으시니 난감하군요.”
뭐 어쩌라고 짜식아.
“아 저 그게.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농담을 만들어내셔서. 좀 당황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제가 누굴 재밌게 하고 하는 재주는 없어서.”
크리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줄였다. 아무래도 즐거운 대화엔 별 소질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은 다시 보니 내 말에 부끄러웠는지 얼굴까지 붉어지고 있었다.
“저도 그런 재주 있으신 분들이 부럽던데요. 뭐.”
“지내는 곳이 이렇다보니까 하는 말들이 다들 영 거칠고 유머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요.”
“웃고 떠들려고 서로 얼굴 보는 게 아니시니까 아무래도. 대신에 검은 잘 다루시잖아요. 전 그게 더 부러운데.”
“그거야 뭐.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과 살아남는 것을 동시에 해내려면 그리 해야 하니까요.”
검을 잡는 목적이 다르다고 했다. 나는 단지 가벼운 운동의 일종 그리고 그는 생업에 필요한 단 하나의 수단. 수준 차이가 날 것은 당연하다. 대신 그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생활하는 나에 비하면 모자란 것이 없지는 않다. 부러운 것이 있다면 어차피 상대도 날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방금 전의 사건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나와 크리스 모두에게 좋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나저나 머네요. 그 베니자크인지 뭔지 하는 곳은.”
“예. 아무래도 모시게 되는 분이 타국의 귀빈들이시다 보니 시내에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노출을 줄이고 조금이라도 편한 휴식을 위한 위치 선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경비 병력을 따로 관리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긴 합니다.”
“아아. 저 그럼 오늘 베지자크에서 머물다 내일은 어떻게…….”
“전해들은 바로는 아마 내일 바로 메인 스트림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저 쪽 분들도 꽤나 서두르시는 듯 하니 맞춰서 움직여야겠지요.”
“사실은 좀 불안해요.”
“네?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보세요. 저 높으신 분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같이 예정 없이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여행객에게 수도까지 같이 동행해달라고 청을 하겠어요. 우리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우리가 안전한 인물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는데. 그리고 우릴 데려가서 무슨 증언을 해달라고 하는데 그게 과연 다른 높은 양반들한테 먹히기나 할지도 의문이에요.”
“넌 아직도 그 소리냐. 그냥 잊어버려. 그냥 평생 다 할 운이 오늘 터져서 횡재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너 진짜 답답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켈모리안은 아직도 불안해하는 나를 답답하다며 윽박질렀고 그래도 크리스는 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한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어느 새 란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고 있는 아크는 아무래도 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아크의 얼굴에 저렇게 싱싱한 생기가 도는 때는 검에 관한 이야기 혹은 모험담을 들을 때뿐이다.
“하긴 저 역시 의문입니다.”
“허어. 저 저 레인저라는 양반이 왜 그러시나아.”
“요르씨의 말씀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저들은 쇼넬이라는 강대국의 사절단이고 연합 회의에 수차례 안건을 상정했다 거절당했던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왔을 겁니다. 그런 이들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다 찾지 못해 겨우 타국의 일반 시민에 증언을 요청하는 것은 말이 좀 이상하지요.”
“자기들 스스로가 그 동안 필요한 것을 다 찾지 못했다는 것을 대놓고 말하는 꼴이 되니까요.”
“네. 그렇습니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그들의 성향을 생각해보자면 납득은커녕 거짓말이라고까지 말 할 수 있을 정돕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요. 어차피 우린 이 곳에서 하루만 더 기다리면 잃어버린 짐도 다시 찾을 수 있고 가는 길이야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선 것이니 부담될 것도 없는데.”
어려서부터 괜한 일에 걱정만 앞선다며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말만 많다고 결국엔 행동하는 것 없이 남들이 채갈 때 까지도 입만 열고 있다며 혼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반은 아니어도 맞아떨어지는 일도 많았으며 그 때 마다 나보다 먼저 나선 이들이 실패하거나 혹은 다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그것도 참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나서지 않길 다행이다 하며 안심하는 마음이 더 컸다. 지금이 딱 그 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우리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가운데 그들의 태도 또한 걸린다. 필요 이상으로 공손해. 그것도 그렇고 그리 높은 양반이 겨우 레인저 대장 하나 데리고 와선 무슨 속이 그렇게 편해서 공손한 인사질이야. 이상하고 맘에 안 들어. 뭐야. 꼭 진 것 같이 기분이 이상하잖아.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9-27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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