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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7/03 14:33:00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12화- [-조우#3-]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2화.
[-조우#3-]

#
  꽤나 소란스럽다. 나는 왜 레인저라고 하면 왠지 근엄하고 조용한 덩치 큰 사내들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 하우스 내 구성원에 성질이 인물이 끼어들어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죽을 고비 넘긴 게 겨우 하루 전인데 뭐가 저리 신나서 떠들어대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러니까 란씨. 그 때 제가 분명히 그 숲길에서 당신을 불렀잖아요. 맞대니까 그러네. 어이 어이. 요르 당신 말이야. 그렇게 아니라고 너무 확신하지 마. 아우 답답해 미치겠네.”
“허허. 이보시오. 케.켈마리아씨라고 했나?”
“켈모리안!!!”
“아. 흠흠. 켈모리안씨. 당신은 날 부른 게 아니지 않소.”
“아니 그럼. 그렇게 떨어져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 자리까지 찾아갈 수 있었단 말이오. 설명 좀 해보시지.”
“으음. 글쎄올시다. 허공에 대고 사람 살려달라면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게 정확하게 날 호출한 것이라고 한다면 뭐 할 말 없소. 다만 그 정도 거리에서도 들릴 만큼 크게 소릴 질렀다는 거 하나는 인정해 줄 수 있소이다.”
“…….내…….내가 언제 그랬다고! 난 당신을 불렀다니까?”
“후캬아아악! 사람 살려어어어! 괴물이야아. 헤쿠엑!”
“푸하하하.”

  질이 켈모리안이 소리를 지르며 달아다나 바닥에 넘어지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자 테이블 하나를 두고 둘러앉아있던 모두가 천장이 날아갈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물론 켈모리안 본인은 벌겋게 얼굴이 물들어 그 진한 색이 사라지기 전까진 다시 고개를 들기 힘들 듯 했다.

“젠장.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으니 이거 원. 에이. 관둬. 관둬. 안 해!”
“진작 그러지 그랬나. 사람 거 말 많구먼.”
“아악!”

  켈모리안은 잔뜩 성이 나서는 그대로 자길 둘러싸고 있는 레인저들을 밀치며 무리에서 빠져나가버렸다. 그는 내가 대장과 이야기를 끝낸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기가 나와 아크를 구하기 위해 란을 불러왔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나 란과 켈모리안 두 사람을 두고 진실성의 무게 추를 기울인다면 나는 볼 것도 없이 란을 택할 것이다. 때문에 켈모리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저어. 그럼 이제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아. 뭐 용무야 다 끝나긴 했지만 곧 대장이 돌아올 테니 기다려주시겠소. 아무래도 요르씨야 괜찮지만 지금 여관에서 쉬고 있을 아크씨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야 할 듯싶으니.”
“아. 형에게도 용무가 있으신가요.”
“아. 나는 잘 모르겠소. 대장이 전하고 간 말이니 미안하지만 직접 물어보시겠소.”
“아. 예.”

  란의 안내로 찾아간 레인저 하우스는 생각보다 좁았다. 그들의 훈련장과 숙소는 따로 마련된 것인지 일체의 무장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잡다한 서류 뭉치들과 시민들의 신고 접수를 위한 간단한 데스크 정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협조에 감사하다며 자신의 집무실로 나를 안내한 레인저 대장은 생각보다 어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란과 비슷하게 덩치가 큰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아크나 나와 비슷한 정도의 흔히 말하는 보통의 체격이었기에 한 번 더 놀랬다. 거기다 호리호리한 게 왠지 약해보이는 인상. 그러나 그 눈만큼은 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내게 질문한 사항은 간단했다. 북서로에서 벗어나 오크와 조우하게 된 사연, 켈모리안과의 관계, 나와 아크의 부상정도, 그리고 여행의 목적.

“그건 그렇고 이봐요 요르. 수도로 간다고 했소?”
“아. 네. 그러던 도중입니다.”
“흐음. 뭐 이 시기에 모험가들이 수도로 간다면야 딱 하나밖에 없는데. 개블리구만.”
“네. 그렇습니다.”
“거 오크 한 마리 상대 못하는 실력으로 가서 뭘 하려는 건지 원.”
“그…….그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앵간한 실력으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자리니까. 아니 애초에 심사에서 떨어질지도 모르지.”
“심사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요? 거 참. 갈수록 답답한 친구구만.”

  란의 옆에 앉아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 한 컵을 그대로 들이킨 질은 다음 말을 이어가기 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웃고 떠드는 이야기가 끝났다 싶었는지 테이블을 답답할 정도로 가득 메우는 장정들은 각자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 움직였다. 늦은 시간이고 이미 정규 근무 시간이 끝나서인지 생각만 하던 긴장 가득한 분위기 따윈 조금도 없었다. 대신 질은 흩어지는 동료들을 향해 누군가에겐 지시를 누군가에겐 잔소리를 날리며 못 다한 여담을 풀었다. 란과 비슷한 체구의 이 남자는 지나치게 호탕하고 긍정적인 란과는 달리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매사가 귀찮은 남자였다. 서로 상극의 성격을 보이는 이 두 남자가 붙어 다니기는 정말 잘 붙어 다닌다. 신기할 정도로. 돌아오는 대답이 죄다 부정적인 것 만 제외하면 오히려 대화하기 편한 쪽은 질이었다. 웃음소리에 귀가 아픈 일은 없었으니까

“검투사 대회에 참가하려면 말이지. 일단 기본적으로 각서를 작성하게 되어있어.”
“각서요?”

  고작 대회 하나 참가하면서 각서라고 표현할 정도의 문서 작성에 힘을 써야 한다니 이거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애초에 우리가 너무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각서지. 신체의 안전에 대한 포기 합의서니까. 각서지. 이 정도면.”

  안전에 대한 포기? 다쳐도 상관없다? 혹은 죽어도 상관없다? 뭐야. 무슨 투기장도 아니면서 무슨 조항이 그렇게 살벌해. 질은 턱을 괴고 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 해주는 충고인지 아니면 단순한 애송이 겁먹이기인지는 더 들어봐야 알겠다.

“주…….죽어도 책임지지 않는다 뭐 그런 건가요?”
“음. 뭐. 내용을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게 되지. 어떠한 사태에도 길드 장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뭐 이런 거야. 아직까지 실제로 사망자가 나오진 않았지만 매해 그에 준하는 부상자들이 나오긴 하지. 그렇게 다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뭐 어느 정도 겁을 주는 의미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자네 같은 초짜가 참가한다면 죽지 말라는 법도 없지.”
“이봐. 질. 자네 말이 좀 지나치구먼.”
“아. 음. 미안하네. 난 단지 충고의 의미로서 해주려던 말이었는데. 어째 좀 빗나갔구먼. 사과하지.”
“아…….아닙니다. 사실 제 검에 관해서라면 저 역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름 걱정하는 마음에 꺼낸 이야기에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란이 질의 말을 끊어버렸다. 생각보다 불편한 대화로 전개되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우리는 잠시 맥을 끊고 마르지도 않은 목을 축이느라 바빴다. 질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란은 혹시나 내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하며 웃는 것도 혹여나 내 기분이 상할까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이 두 사람 정말 재밌는 게 불안하거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앉은 자리에서 왼 발로 오른발 등을 잘근잘근 밟아댄다. 이거 보고 있으면 꽤 웃긴다. 덩치는 산만한 사람들이 마치 볼 일을 해결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것 마냥 그 움직임이 참 부단하다.

“아. 저어. 대장님은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적절한 화제 전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라면 나름 선방한 셈이지. 질은 적당한 타이밍이다 싶었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찬가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던 몇몇 대원을 끌고 2층으로 올라가버렸고 란은 이제나 저제나 오실 대장을 마중이라도 나가려는 듯 문을 열었다.

“이제 곧 돌아올 때가 됐는데 말이야. 뭐 시장의 긴급 호출이라고는 해도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일 테니 길게 얘기할 건 없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낮의 사건이라는 게 뭐죠? 대장님께서도 도통 말을 안 해주시던데.”
“끄응. 그게 말이네.”
"아. 저어. 곤란한 일이시라면 말씀 안하셔도 괜찮습니다. 안 들으면 궁금해서 미칠 지경까진 아니니까요. “
“어째 썩 유쾌하게 들리진 않네만. 뭐 그리 말해준다면야 고맙네. 안 그래도 곧 들이닥칠 이웃나라 나라님 따님 덕분에 골치 아파 죽겠구먼.”
“나라님의 따님이요? 그럼…….”
“왕녀님이시지. 쇼넬의. 이제 곧 수도에서 열릴 연합국 회의 덕분에 먼 길 걸음 하시는 모양인데. 이 분도 꽤 머리 아픈 분이시라.”
“헤에? 어떠신데요?”
“자넨 왕녀를 동반한 일국의 사절단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으음. 일단 뭐 화려하고 그러지 않을까요? 몇 백 명의 수행원에 그만한 규모의 호의병력까지.”
“보통은 그게 상식이지.”
“지금 오고 계신 그 분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건가요?”
“그렇지. 이거 원. 어딜 가나 마치 전쟁에 임하는 것 같이 단출한 구성에 이동 경로도 자기 멋대로란 말일세. 엔트릴에서 직접 호위를 지원해주겠다고 해도 그걸 다 마다하고 자기가 내키는 대로 이동 경로를 짜서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식이라네. 보통 손님을 맞이하는 길은 우리 쪽에서 먼저 배려를 해서 최대한 안전하게 수도까지 모시는 게 관례인데 말이지. 이건 무슨 보물찾기라도 하려는 마냥 여기 갔다 저기 갔다 들쭉날쭉 이니. 그러다 우리 영토 내에서 암살이라고 당하는 날엔 볼 것도 없이 전쟁이란 말이네.”

  겁이 없다고 하기엔 그 정도면 생각이 없는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사연에 그렇게 맘대로 길을 정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행동 방식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자각하고 있지 못한 오만방자한 행동이 아닌가. 말 한 마디 내딛는 발걸음 하나 만으로 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왕족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개인행동인 셈이다.

“그래서. 그 왕녀께서 여기 당도하시는 날짜는 언제랍니까?”
“우리 쪽에 통보한 바로는 앞으로 3일 뒤네.”
“에? 그럼 며칠 남지 않았네요?”
“그러네. 그 때문에 요새 비상 근무덕분에 다들 피곤하고 예민한 것이 극에 달해 있지.”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잘도 웃는군요.

“아. 저기 오시는구먼. 여어. 대장. 늦었구만.”

  신나게 팔을 흔들며 소리치는 맞은 편에는 왠지 모르게 무거워 보이는 발을 간신히 움직이는 대장이 보였다. 곧 수심에 가득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시장의 긴급호출이라더니. 뭔가 안 좋은 소리라도 잔뜩 들은 것일까.

“여어. 란. 아직 안자고 있었군.”
“대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먼저 자버릴수야 있나. 다들 기다리고 있네.”
“아. 아직 다들 취침 전인가. 잘 됐군. 전할 말이 있네.”
“전할 말? 그게 뭔가.”
“들어가서 얘기하지. 아. 요르씨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군요.”
“아 네. 이제 막 대장님께 말씀드리고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음. 대장. 옆에 계신 이 분은?”
“아아. 미안하네. 어차피 모두에게 할 이야기이니 들어가서 인사드리도록 하지.”

  대장인 프렌의 옆에 서 있는 사내는 그렇게 큰 키는 아니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 덕에 꽤 차가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들어가자는 손짓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란과 함께 하우스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프렌은 나를 보며 억지로 한 번 웃은 뒤 그대로 복잡한 심경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렇게 힘없이 하우스 내로 들어온 대장과 그의 옆에서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던 란은 그대로 방금 전까지 란과 질이 내 앞에 앉아 난감해하던 테이블에 앉아 다른 대원들을 불러보았다. 아무래도 시장으로 부러 전갈을 전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와는 관련 없는 별개의 작전에 관련한 이야기일 테니 내가 이 자리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아 돌아가겠다고 얘기도 했겠다. 켈모리안을 찾아 여관으로 돌아가려 상대적으로 너무나 큰 덩치 덕분에 작아 보일 그를 찾느라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옆에 서 계신 분을 소개하지. 이 분은 쇼넬의 왕녀 로즈 전하의 호위대 대장 헬릭 멀린경이시네. 예를 갖추도록.”

  옆에 서 있는 저 깡마른 놈은 누구야 라며 수군대던 대원들은 왕녀 전하의 호위대장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예를 갖추라는 대장의 지시를 다급히 받들어야 했다. 그 와중에 질은 이 밤에 웬 손님이냐는 식으로 나와 얘기할 때처럼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놀라서 일어나는 다른 대원들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내리박아야 했다. 마치 켈모리안이 숲에서 넘어진 것을 흉내 낼 때처럼.

“대…….대장! 3일 뒤에나 도착하실 예정 아니셨습니까? 호위대장이라는 분이 혼자 따로 오셨을 리는 없고.”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위대장이라는 헬릭이 나섰다.

“애초에 로즈 전하께서 출발하시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짜가 귀국의 북방 국경 지원 원정으로 미뤄지면서 호위 병력과 사절단 내부의 인원 조절 작업으로 그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동 경로 역시 전하께서 직접 재조정하여 출발 일자는 예정보다 늦어졌으나 이곳까지 당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대체 어떻게 인원을 축소하고 어떻게 경로를 수정했기에 3일씩이나 빨리 도착하신 겁니까? 우리한테도 좀 알려주시오. 늦장 출동했다고 욕 먹는 거나 좀 피해보게.”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질문이 던져지자 프렌은 그 대원을 향해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물론 헬릭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매우 소심하게.

“무리한 일정 변경을 항의하고 싶으신 것이라면 죄송하지만 이번 원정의 전체 일정 진행에 대한 모든 권한은 로즈 전하께 있습니다. 일개 호위대장인 제가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므로 그것에 대한 말씀은 내일 직접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얼핏 정중한 말로 피해가는 듯 했지만 주군에 대한 비아냥거림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불쾌함이 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말 또한 그랬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로즈 전하께서 우리 레인저 하우스에 요청하신 사안이 있네.”
“요청이요? 뭡니까 그게.”
“오늘 오전에 있었던 사건 말이네. 실은 로즈 전하께서 이와 관련한 사항들을 조사 중 이시라는군. 하여 내일 북서로에서의 수색 작업에 우리 대원들의 협조를 요청하셨네. 끄응. 헬릭경.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무리입니다만.”
“곤란하시다면 제가 직접 말씀드리지요. 내일 로즈 전하를 맞이하시게 될 북서로의 진입로를 기준으로 간단한 수색작업을 펼치려 합니다.”
“수색? 아니 아무리 왕녀 전하시라지만 남의 나라 영토에서 멋대로 수색이라니."
"귀국에도 역시 도움이 될 만한 일입니다.“
“이보시오. 억지가 너무 심하시군.”
“오늘 아침에 이 곳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수색이라면 도와주시겠습니까.”

  레인저들은 일순간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체 오늘 아침의 사건이라는게 뭐야. 이쯤되니 괜히 궁금해지는군.

“귀국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모르시겠습니다만 우리는 그것을 진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르사크의 우리 연합국을 향한 명백한 농락이며 엄정히 대처해야 하는 사안임이 분명합니다. 허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귀국에서는 이 진에 대한 피해가 빈번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수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여 왕녀께서는 이 것을 이번 연합 회의에 안건으로 제출하여 정식으로 코르사크에 항의하며 그 책임을 물을것입니다. 그리고 제출해야 할 안건에 필요한 물증을 이 곳 북서로와 라임턴시에서 벌어진 오늘 아침의 사건을 조사하여 얻고자 합니다.”
“흠. 흠. 그런 일이라면 시장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이 알아서 움직일텐데 무슨 마음이 그리 넓으셔서 남의 나라 일까지 신경쓰실려고 하시오.”

  확실히. 남의 나라 일 신경 쓸 사이에 자기네 일이나 신경쓰라지.

“귀국과 마찬가지로 쇼넬 역시 코르사크의 농락에 의해 크고 작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독자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으나 연합국 협정안에 따라 타국과의 대립이 우려되는 사건은 연합 회의에서 안건이 통과가 되어야만 정당한 명분을 갖게 됩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는 우리 쇼넬이 가장 먼저 시작하였고 이미 그 권한은 지난 번 연합 회의에서 인정받았습니다. 따라서 라임턴시의 여러분 역시 제가 말씀드리는 일에 대해 동의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식 협조 절차도 없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요구해봤자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시오.”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시장님의 허가와는 별개로 우리 군의 수색 작업에 간단한 지형 안내정도의 도움말씀만 주시면 됩니다. 잠시 눈을 피해달라는 것이지요.
“시장님의 눈에 띄지 않는다 라니요?”

  레인저들은 각각 궁금한 사항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계속해서 질문했다. 헬릭이라는 사내는 간단히 끝나야 할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같이 느꼈는지 약간 당황한 듯 땀을 흘리다 천천히 대답을 이어나가며 다시 냉정을 찾는 듯 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냉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레인저들의 분위기는 달라질 줄을 몰랐다.

“이번 수색 작업은 전하께서 작성하신 전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정입니다. 즉 이곳에 당도하고 나서야 급히 편성하게 된 사항이라 수색 협조에 대한 협조 공문이나 여타 절차들을 밟게 되면 자칫 전하께서 찾으시는 증거물들이 사라질까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허나 수색을 통하여 습득하게 되는 모든 결과물에 대해선 이곳에 계신 모든 대원 분들과 시장님께 빠짐없이 보고 드리게 될 것이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데 그거 말이지. 좀 찝찝하단 말이야.”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계속 오가자 처음엔 무슨 일인가 하며 흥미가 생기다 결국엔 따분한 수업 마냥 지루한 대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지루한 대화를 경청하는 것을 관두려는 와중에 란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여쭤 봐도 되겠소.”
“예. 말씀하시지요. 용맹하고 날렵한 북서로의 레인저 하우스의 일원이시여.”
“이웃 국가의 왕녀님의 전언이라고는 하나 우리는 라임턴시에 소속된 레인저들이오. 그리고 명령체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군 병력 구성원 중 하나지. 그런 우리에게 우리의 직속상관의 의지는 무시한 채 이웃국가의 왕녀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것은 우리에게 배신을 요구하는 것과 같소.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했으면 하오만.”
“나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더 이상 얘기했다만 서로 얼굴만 붉히게 될 것 같으니 이만 그 안에 대해서는 접어두시지요.”
“알겠습니다. 제 부족한 소통력으로 로즈 전하의 넓은 마음을 전달하려다 보니 그 본래의 뜻이 여러분께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듯 하군요.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전하께서 직접 시장님과 여러분께 다시 전달하시는것이 나을 듯 합니다."

  이건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고 있는 헬릭이다. 그의 말대로 왕녀 본래의 뜻을 그의 역량 문제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정말로 헬릭이나 로즈 왕녀 둘 다 아무 생각이 없는지는 뭐 나야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명백한 소속과 섬겨야 할 주군이 있는 병사에게 네 주인 몰래 내 일 좀 도와다오 라고 한다면 제정신이 붙어있는 하인이라면 어느 누가 그 말을 따를까. 그러고 보니 헬릭이라는 사람이 제시한 조건을 얘기하지 않았는데 대체 뭘 내주겠다는 이야기였을까. 아쉽게도 그에 대해선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제의에 따르는 조건 따위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들어봤자 속만 아쉬울 뿐이려나.

“내일 쇼넬의 왕녀 로즈전하를 비롯한 사절단이 북서로에 진입할 것이네. 3일 뒤로 예정되어 있었던 호위 임무는 바로 내일부터 시작이네. 미리 짜두었던 조 대로 내 지시에 따라 출동하되 질과 란은 시내에 남아서 남은 정리를 해주게. 내일 임무에 관한 자세한 브리핑은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다시 하기로 하지. 자 그럼 헬릭경. 저와 함께 가시지요. 머무르실 곳을 안내해 드리리다.”
“예. 그럼.”

  헬릭과 프렌은 뭔가 이상하다는 식의 눈초리를 보내는 대원들을 등지고 다시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국외의 중요한 손님을 모시는 자리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행을 찾기가 난감하여 아까부터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문 옆에 서 있던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우스를 나가던 헬릭과 눈이 마주쳤다. 끝도 없이 검기만 한 두 눈동자가 조용히 응시하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숨이 멎을 뻔했다. 다행히 이번엔 또 뭐냐는 식으로 질문하는 프렌의 목소리가 날 살렸다.

“헬릭경. 그렇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면 이 분도 좀 민망하실 거 같습니다만.”

  프렌의 말에도 그는 어떤 미동도 않은 채 내 얼굴을 쳐다보다 아래위로 내 행색을 살폈다. 뭐야 이건.

“이 분은 레인저 대원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일반 시민이신 듯한데. 라임턴의 레인저께서는 이 시간까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힘쓰시는군요.”

  넌 뭐하는 놈이냐고 차라리 말하지 그러쇼. 거 참 경우 없는 사람이구만.

“아아. 이 분은 잠시 내가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뵙고자 청한 분이시오. 헬릭경과 마찬가지로 귀한 손님이시니 더 이상의 무례는 그만 거둬주셨으면 하오.”
피해자……. “
“네? 뭐라고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럼.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프렌 대장.”

  내 얼굴에 대고 분명히 피해자라고 중엉거리는 소리를 프렌은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헬릭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순전히 저 경우 없고 멍한 호위대장이라는 작자 덕분이다. 다른 레인저 대원들도 꽤나 어수선한 모습이다. 잠이 홀랑 깨버렸다는 듯 쓸데없이 처리가 끝나 보이는 서류들을 뒤지는 이도 있었고 조용히 차를 마시며 한숨을 내쉬는 이도 있었다.


“왕녀께서 내일 당도하신다고? 3일 뒤가 아니라?”
“그렇다잖아. 나 참. 어이없어서. 혼자 잘난 맛에 사시는 왕녀님 덕분에 이게 뭐냐.”
“그러게나 말이야. 오늘 아침 일도 그렇고. 요새 영 운세가 별로구만.”
“란. 자네 참 좋겠군. 남아서 시내나 정리하라니. 별 할 일도 없지 않나.”
“뭐. 그렇긴 하네만. 대장도 나와 질이 필요한 부분이니 맡기지 않았겠나. 대신 자네들은 그 로즈 왕녀의 미모를 처음으로 구경할 수 있게 되지 않나. 난 그게 더 부럽네만.”
“쳇. 오르지도 못할 나무 쳐다봐서 뭐하게. 에잉!”

그들은 대부분 갑작스럽게 변경된 일정 그리고 헬릭이라는 자의 언행과 행동에 어이없어 하며 혀를 찼다. 내일도 하우스에 남아있게 된 란과 질은 별 말 없이 다른 이들의 말을 대강 받아주고 있었지만 이들 역시 불쾌한 기운을 감추고 있진 않았다. 잠시 그들의 동태를 살피던 나는 켈모리안을 찾아서 여관으로 돌아가자는 행동 지침을 뒤늦게 떠올리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 눈에 그의 모습이 들어오기 전 날카롭게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먼저 내 귀를 때렸다.

“아우! 젠장! 내 말 좀 믿어달라고!!!!”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03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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