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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10/05 00:47:57
Name OrBef
Subject (일상) 친절한 사람들 만난 기억들.
특별히 이 글을 통해서 따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없습니다. 그냥 미국에서 산 지 십수 년인데,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중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을 좀 해두고 싶어졌어요. (물론 나쁜 사람들도 많이 봤지만, 그런 기억은 굳이 간직할 이유가 없죠)

1. 눈썰매장에서 만난 할아버지.

아이가 대충 서너 살 정도였을 겁니다. 아이를 데리고 눈썰매장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어요. 미국이 한국보다 큰 나라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위락시설은 규모가 작습니다.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에 근처에서 방문하는 사람의 숫자는 오히려 작거든요.

그런 작은 눈썰매장에서 하루 종일 놀다 보면, 같은 사람을 여러 번 마주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날은 유독 그 현상이 심해서, 눈썰매타러 올라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똑같은 사람을 다섯 번 넘게 본 것 같아요. 사람 좋아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였는데, 처음에는 서로 무시했었습니다만, 워낙 여러 번 보게 되고 또 이쪽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다를 떨게 되었죠. 그때만 해도 저는 학생이었는데, 저는 유학 생활과 육아 얘기를 주로 하고, 할아버지는 분가한 자식 이야기를 주로 했어요.

그러면서 하루 잘 놀고 저녁이 되었는데, 짐 챙겨서 자동차로 돌아와 보니 열쇠가 없는 겁니다! 제가 주머니에 열쇠를 넣고 눈썰매를 타다가 빠진 거였습니다. (애초에 하루 종일 놀 거면서 왜 차 열쇠를 주머니에.....) 그래서 허겁지겁 눈썰매장으로 돌아갔지요. 일단 아래쪽에서 막 찾아보는데, 위에서 썰매 타고 내려온 그 할아버지가 '너 뭐 하니?' 하시더군요. 그래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야 그걸 너 혼자 어떻게 찾냐. 여러 명이서 찾아야지' 하시더니 절 데리고 썰매장 맨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맨 위로 올라가서는 갑자기 큰 목소리로

'Tubers! Hear me!' (내 이야기를 들으시오 썰매러 들이여!)

하면서 '이 젊은 아빠가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여기 어디 있을 겁니다. 이번에 내려가면서 혹시 눈에 박힌 열쇠를 찾으면 아래쪽에서 우리한테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막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더군요. 저는 생각도 못 해본 발상이라서 흠칫하면서도 혹시나? 했는데, 그리고 내려갔더니 바로 어떤 젊은 아저씨가 '이게 니 열쇠요?' 하면서 제 차 열쇠를 주시더군요.

여러 번 감사를 표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이켜보면 그 할아버지한테 저녁이라도 대접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고마운 분으로 기억합니다.

2. 시골에서 만난 뮤지션들

g4By0RO.jpg

가족들하고 여행을 좀 다니는 편인데, 저희는 주로 시골로 다닙니다. 이건 어디라고 설명하기도 힘든 텍사스/멕시코 국경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마을 구경하다가 배가 고파서 식당에 들어갔는데, 이 식당을 고른 이유는, '이 식당은 이 마을의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라는 소개를 인터넷 어디에서 봤기 때문이었어요. 그랬더니 과연! 동네에서 음악에 취미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다 같이 연주하는 장면을 딱 본 거지요. 사실 이 사람들이 하루 종일 연주할 리는 없는데 운도 좀 따랐던 것 같습니다. 맥주를 계속 추가해서 마시면서 연주를 하는데, 저 사람들 중 아무나 '다음에는 xx 곡 연주하자!' 하면 '그래그래' 하면서 다같이 그 곡 연주하고, 한 곡 끝나면 잠시 수다 떨다가 누가 또 다음 곡 제안하면 또 연주하고. 그걸 무한 반복하면서 많이 취한 사람은 옆으로 빠지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새로 온 사람이 합류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이 마을은 정말 후미진 곳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목축업 말고는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없고, 고급 교육 과정을 이수할 기회도 없을 거고, 현대 문명의 혜택 중 많은 부분을 놓치고 살 겁니다. 그래도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해 보이더군요. 저렇게 마을 친구들하고 만나서 같이 음악 연주하고 인생 즐기는 재미는, 오히려 우리는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행복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여튼 넋 놓고 한참 보다가, 양해를 구하고 사진 한 장 찍고 음악을 녹음했었어요. 바보같이 음악을 인터넷 어디에 남겨놨어야 했는데 그걸 안 했다가 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음악은 더 이상 들어볼 수가 없네요. 정말 애절한 카우보이 포크송이었는데, 아직도 그 음악의 제목이 궁금합니다.

이게 '친절한 사람들' 이라는 글 제목하고 무슨 상관이야? 싶으실 수도 있는데,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양해를 구했더니 그중 한 분이 나중에 맥주 한 잔 들고 와서 제 가족하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거든요. 저는 음악에 조예가 전혀 없기 때문에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지 싶었는데, 그 동네 역사 이야기랑 자기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대해서 설명해 주더군요. 덕분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납니다.

3. 아들놈의 명예(?) 조부모



언젠가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아들하고 검도를 하다가 만나게 된 할아버지가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을 A 라고 치죠. 사람이 참 좋고, 제 아들은 진짜 할아버지 할머니를 자주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아들이 A 할아버지를 잘 따릅니다.

근데 이 할아버지도 제 아이를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운동만 같이하던 사이였지만, '너 양궁 연습해볼래?' 하시더니 수십만 원짜리 활을 사주시고, '너 총 쏴볼래? 남부에서 살려면 총 쏠 줄 알아야 함' 하시더니 자기가 가진 AR 15 여러 개를 빌려주면서 사격장에서 연습시켜주시고, '너 바베큐 먹을래? 관광객들이 먹는 그런 거 말고 진짜 바베큐 말야' 하시더니 자기가 바베큐 해주시고 그래요. 물론 저희도 딱 1:1 매칭까진 아니어도 받은 것을 다른 형태로 돌려드리려고 노력은 하죠. 그래도 이 분이 워낙 막 퍼주시는 분이라서, 도저히 무역 균형을 맞출 수가 없더군요.

요즘은 부인 되시는 할머니까지 합류해서 넷이서 가끔 같이 식사하러 다니는데, 처음에는 그냥 표면적인 이야기만 나누던 사이였지만, 이젠 꽤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할머니께서 젊었을 때 남편한테 맞은 이야기 (지금 할아버지는 두 번째 남편),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양궁부에서 겪었던 이야기, 왜 본인들이 오바마를 지지할 수 없는지, 기타 등등 남부의 전형적인 돈 좀 있고 독실한 기독교인 미국인들에 대해서 많은 이해를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물론 저야 정치/종교적으로 전혀 생각이 다르지만, 이 노부부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 불편하진 않더군요.

하여튼 그렇습니다. 미국에 이상한 사람들도 많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아요.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죠. 모두들 좋은 인연 많이 만드시길 빕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1-12 11:23)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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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05 01:17
수정 아이콘
저도 처음에 외국에 공부하러 갔을때가 생각나는군요.. 도착하고 다음날 집에서 쓸 냄비랑 프라이팬을 사려고 중고 사이트를 보다가 새 제품을 필요없다고 200 달라에 판다는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만나서 이래 저래 난 어제 처음 이 나라에 와서 냄비도 없어서 요리도 못한다 신세한탄 했더니 웰컴 선물이라고 100 달라만 받고 주시더라고요.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났던 기억이..
17/10/05 01:26
수정 아이콘
하하하하 좋은 사람 만나셨네요. 처음 왔다고 하면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도 제법 있더라고요. 그래도 아직은 환영해주는 사람들이 주류죠.
짐승먹이
17/10/05 10:15
수정 아이콘
이런 얘기 들으면 가끔 우리나라가 더 팍팍하고 외국이 더 인정 넘치는거 같다는 생각드네요.
운동화12
17/10/05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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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제가 공부하던곳으로 방문을 오셨었습니다. 전부 모시고 메이저리그 관람을 갔는데, 하필 그날따라 표가 매진인겁니다. 암표라도 사려고 흥정을 하는데 가격을 비싸게 부르는거에요. 그래서 '좀 깎아달라' '안된다' '난 돈이 진짜 이거밖에 없다' '니 사정이다'. 이러고 실갱이를 하고 있는데, 어떤 행인이 저를 툭 치더니 손에 $50을 쥐어주고 가더군요. 당황해서 불렀더니 뒤돌아 보면서 쿨하게 엄지 척 하고 총총..
17/10/05 02:31
수정 아이콘
오, 간지납니다. 그 정도로 멋진 사람은 사실 흔하지 않은데, 상당히 귀한 경험을 하셨네요.

경우는 좀 다르지만 (제 경우에는 충분히 관찰해서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있었음), 저도 언젠가 자정에 주유소에 갔었는데 거기서 아이 둘 데리고 온 흑인 아주머니가 연료통은 앵꼬났고 카드는 안 돼서 난감해하시더라고요. 해서 대신 내드린 적은 한 번 있어요. 근데 운동화님 경우에는 뒤에서 슬쩍 보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기 힘들었을 텐데, 그 사람 참 과감하군요!

그렇게 서로 돕고 하는 거죠.
운동화12
17/10/05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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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네 저도 처음엔 암표상이랑 한패인줄 알았어요. 주유소에서 기름값 없다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는 편이네요.
17/10/05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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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유소에서 저쪽에서 먼저 접근하면 이게 상습범일 수도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죠. 제 경우에는 그건 아니었던 지라 딱하니 의심할 이유는 없어서 다행이었어요.
운동화12
17/10/0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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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별별사람 다있죠. 글쓴님 말대로 좋은기억만 간직하고 살아야 할텐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pppppppppp
17/10/0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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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때 만난 북유럽 사람들은 다 착하더라고요..
lesswrong
17/10/05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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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이념이 무색하게 되는 소소한 인간관계들, 이런 얘기 좋아요.
17/10/05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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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첫 여행을 혼자 도쿄로 갔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친절이 세가지가 있네요.
첫번째는 츠키지어시장 근처에 묶었던 모텔 주인이였는데, 유심칩에 문제가 발생하니까 저대신 통신사 이곳 저곳에 문의를 해주더니 근처에 있던 빅카메라에 가서 선불칩을 사는 방법으로 해결방법을 제시해줬습니다. 제 일본어가 그냥 기초회화만 되는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상황을 인식하고 대응해주시는 자세에 큰 감동을 받았었죠.

두번째는 디즈니랜드씨에서의 에피소드인데 2인석이였던 어트랙션에 탑승할 일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알아서 제 옆자리를 채우려니 했는데 안내원이 저를 부르더니 옆에 누굴 앉혀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속으로 뭘 이런걸 굳이 허락을 받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웬 중학생친구 한명과 같이 탔는데, 다타고 나서 출구로 나가는데 그 친구가 제 앞으로 오더니 90도 인사를 하면서 옆에 앉는걸 허락해줘서 감사하다고 얘기하더군요. 일본의 예의가 바르다는게 이런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굉장히 인상이 남더라구요.

세번째는 하루는 캡슐호텔에 묶을 예정이였는데 요 건물이 도통 보이지가 않는겁니다. 구글맵 실시간으로 키면서 거의 다 왔는데 도저히 간판이 보이지 않아서 늦은시간이였지만 길거리에 보이는 남자분 하나 붙잡고 여길 아냐고 묻는데 그분도 잘 모르시는거 같더라구요. 그런데 갑자기 제 손을 이끌고 동네 안내소 같은 곳에 데려가서 막 설명을 듣더니 직접 캡슐호텔까지 안내를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잘 지내면 좋겠다 이런식으로 얘기하면서 마무리 짓는데 정말 이때 일본에 대해 많은 호감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전은 이후 오사카와 홋카이도 여행을 갔었는데 여기는 도쿄만큼 친절하지 않더군요. 오사카에서는 길찾는 질문하다가 까인게 꽤 되고, 홋카이도에서는 와사비 테러까지는 아니지만 좀 과하게 맛본 경험도 해보고 그랬던거 같습니다. 크크
17/10/0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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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본에 가본 적이 없지만, 미국에서 만나는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정말 친절하고 예의바르더군요. 가끔 그걸 위선이라고 까는 분들도 있지만, 위선으로라도 친절한 것이 솔직하게(?) 무례한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믿는 편인지라 저는 일본 사람들 좋아합니다. 오사카는 평균적인 일본에 비해서 훨씬 거칠다던데, 과연 그런가보네요!!
amoelsol
17/10/0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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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제대하고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난 곳이 스페인이었는데요, 톨레도에서 성체절 축제가 있어 광장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공연을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옆에 어떤 노부부가 있어 군대에서 책 한 권으로 독학한 서툰 스페인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저녁은 먹었냐고 해서 공연을 다 보고 나서 먹을 예정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1부가 끝나고 잠시 할아버지가 자리를 뜨시더니 집에 가서 만들어 오신 거라며 포장된 보까디요(스페인식 샌드위치)를 내미시더라고요. 자기네 아들도 징집 중이라 지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복무 중인데 아들 생각도 나고 하신다고. 여행 중에 겪은 사고도 많지만 그 이상의 친절을 경험했는데, 첫 기억은 이거네요.
17/10/0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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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본문에 적은 경험 중 두 개가 노부부, 노인 관련이죠. 생각해보면 나이 많으신 분들 중 삶의 여유가 좀 있으신 분들이 친절을 발휘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신 것 같기도 합니다. 30대 직장인한테 비슷한 친절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차가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당장 내 코가 석자니까요. 하여튼 좋은 추억 가지셨네요.
17/10/05 09:59
수정 아이콘
Tubers! hear me! 를 보니 <매트릭스 2> 시온 시민들 앞에서 연설하는 모피어스 생각이 나네요 흐흐흐
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도록 살아야겠다 싶어집니다. 잘 봤습니다^^
17/10/05 10:04
수정 아이콘
제 생각에, 그 할아버지도 그 흉내를 내셨던 것 같습니다 하하하 영화가 나온 이후였으니까요.
17/10/05 10:27
수정 아이콘
(수정됨) 댓글들 흐름을 보니 본인이 겪은 친절 썰 하나씩 푸는 느낌이라 저도 적어봅니다.

저는 군 첫 휴가가 긴급휴가(?)였습니다. 자대 배치받고 한달 좀 넘었던가, 일과 중에 갑자기 중대장이 부르더니 '너그 아버지 쓰러지셨다,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얼른 집에 가봐라'라는 겁니다. 헐... 평소 심각하던 아버지 고혈압 문제가 결국 터졌구나...

군장이고 신고고 뭐고 다 생략하고, 어머니에게 전화 걸어서 병원 위치만 겨우 파악하고 고속버스 탔는데 그동안 정말 아무 생각이 없더군요. 눈물이 나오는지 콧물이 나오는지 모른 채 머리 싸매고 고속버스 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어느 형님(딱 봐도 군은 제대했으나 아저씨는 아니신)께서 '괜찮으세요? 필요하시면 이거 쓰세요'라며 건네주신 핸드폰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가족들과 통화하면서 오간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내릴 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봐요. 군생활 몸조심하구요'라고 말씀해주시던 그 형님. 지금 생각해도 고맙네요. 다행히 아부지는 수술 잘 마치셨고, 지금 아침식사하신 후 베란다에서 식후땡 태우고 계십니다(...) 그놈의 담배는 어휴.

세상이 참 좁은게, 제가 일병 달고 난 후 그분을 저희 부대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가 예비군 훈련부대였거든요. 너무 죄송하게도 제가 먼저 알아보지 못했는데, 총 나눠드리던 저를 보더니 어? 전에 버스에서 폰 빌려갔던...? 하시더군요 크크크. 예비군도시락 드시지 말고 제가 냉동이라도 사겠다 했더니, 군인한테 얻어먹는 민간인이 어딨냐며 되레 부의 상징이던 뽀모x르 아이스크림 쥐어주시던 그분.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나 모르겠지만 항상 행복하시길 빕니다.
세상을보고올게
17/10/05 10:59
수정 아이콘
글 읽다 그 형님께 제가 다 고맙습니다.
17/10/05 11:54
수정 아이콘
우와 그 형님 최고네요!!!!
김제피
17/10/10 11:30
수정 아이콘
와 이건 진짜 아침부터 눈물 바람 하게 만드는군요!
유스티스
17/10/05 10:41
수정 아이콘
첫 에피소드의 할아버지분은 뭔가 현실적 인물이 아니라 문학적, 영화적 인물같네요. 백발의 노인이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포효하여 작고 약한자의 소중한 것을 찾아주었더라~.~
17/10/05 11:55
수정 아이콘
제가 왜 작고 약합니까!!! 버럭! (사실은 정말로 작고 약함)
Jignificance
17/10/05 11:06
수정 아이콘
몇년 전 펜실베니아에서 공부하고 있을 적이 생각나네요.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 줄을 기다리며 주문을 하고 계산할 차례가 돼서 캐셔앞에 갔는데 돈을 안받는다고 하더군요. 물어보니 저보다 몇대 앞에 있던 차가 지금까지 받은 주문 자기가 전부 계산하겠다고 한거였어요. 차가 네다섯대 정도 였을 텐데 얼굴도 안보여주고 쿨 하게 내면서 뒷사람도 기분 좋으라고 그런거 보곤 문화충격이었습니다.
운동화12
17/10/05 12:24
수정 아이콘
플로리다 어디 스타벅스에서 400명 가까이 연속으로 뒷사람 커피를 계산 해준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네요
17/10/05 12:5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도 중국에서 유학하던 친구를 만나러 베이징에 간 적이 있었어요.
어떤 여성분에게 길을 여쭤봤는데 꽤나 먼거리임에도 자신이 가는길이라며 따라오라고 하더라구요.
초여름이었는데 양산을 쓰고계셔서 친구랑 양산부럽다 막 이런얘기를 했는데
알아들으신건지 조용히 양산까지 접고 가시더라구요.
혹시나 해서 지금 검색해보니 양산 발음이 양산이네요 크크크크 yángsǎn
약 30분을 넘게 걸어서 (덜덜) 안내해주시고 쿨하고 돌아가시는거 억지로 붙잡아서 음료하나 대접해 드렸네요.

반면 야밤에 놀고 집에 들어가는길에 약 30미터 전방 주차된 차 뒤에 누가 숨어있길래
멈춰서서 지켜봤더니 한 30초뒤 반바지만 입은 남자가 이상한 흉기들고 슥 나와서 돌아가는거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도...
초록물고기
17/10/05 13:09
수정 아이콘
훈훈한 이야기 중인가요 저도 하나 보탤까 합니다.

유럽에서 유료화가 사용되기 전 시절이야기인데요. 당시 저도 풋풋한 십대였는데 프라하에서 만난 폴란드 여학생하고 노닥거리다가 너무 늦게 오스트리아행 기차를 탄 나머지 기차역에 밤 11시가 넘어 도착했습니다. 당시 빈에서 밤 11시면 불도 다 꺼지고 한밤중이나 다름없더라구요. 미리 오스트리아 돈도 환전해 둔 게 없고 호텔에 전화해봤는데 발음이 어찌난 특이한지 5분 동안 이야기했는데 딱 한 단어 julius tanlder platz (잊혀지지도 않네요) 만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그땐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고 해서 이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집시들 옆에서 노숙해야 하나 하고 역앞에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한 30대 정도로 보이는 어떤 백인아저씨가 와서는 역앞은 위험한데 갈데 없냐고 해서 Julius Tandler Platz에 간다고 하니까 자기가 어딘지 안다면서 Tram 4 번타고 한정거장 가서 Tram D를 갈아 타라는 겁니다. 그래서 둘다 어떻게 타는지 모른다고 하니까 제손을 꼭 잡더니 자기가 잘 안다면서 직접 Tram 4을 타고 갈아타는 곳에 데려다 주었고, Tram D에 올라타서는 사람들한테 이 사람이 Julius Tandler Platz에 가니까 거기까지 가는 사람은 꼭 내려주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리고 빈에서는 어디어디가 좋으니까 꼭 거기를 관광하라고.

어디서 뭐하고 계실지 아직도 생각납니다. 폴란드 여학생 전화번호가 아니라 그 아저씨 전화번호를 알아왔어야 했는데 말이죠.
17/10/05 13:59
수정 아이콘
다른 글에 나온 분들도 다 친절하시지만, 직접적인 도움의 크기로 보면 그 분이 원탑이네요. 거의 생명의 은인 수준....
유스티스
17/10/0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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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폴란드 여학생 번호는 알아오셨다?...
찬양자
17/10/05 22:49
수정 아이콘
독일 유학중에 친구가 학교시험을 보러 제 집에 묵고 있었습니다. 밤새 롤을 하고 이제 자려는데 배가 살살 아프다는겁니다. 그러더니 이번엔 등쪽이 아픈것 같다길래 파스를 붙여주고 자려는데 새벽 4신가부터 아파서 뒹굴뒹굴 구르더라구요. 아침 6시 쯤에는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사람이 아파하는거 실제 처음봤습니다. 무슨 일 나겠다 싶어서 그 시간에 집주인을 깨워서 가까운 병원이 어딨냐고 물어봤습니다. 전 독일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동네는 외지라서 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러자 집주인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깨워서 차에 우리를 태워 20분걸리는 병원에 데려다주고 수속까지 밟아줬습니다. 너무 고맙더라구요 그리고 제 친구는 요로결석으로 밝혀졌습니다. 크크크 요로결석에 파스를 붙이다니...
17/10/06 01:42
수정 아이콘
아이쿠 큰일날 뻔 했었네요. 그럴 때 도움 받으면 많이 고맙죠.
skip2malou
17/10/06 01:24
수정 아이콘
남부 사람들이 고집은 있어도 순박해요. 저도 남부 텍사스에 살고 있는데 안지 십여년은 지난 옆집 멕시코 아저씨가 코스트코 갔다오면서 korean pear 봤다고 한박스 사다 주고 그러더라고요...
17/10/06 01:43
수정 아이콘
제 경험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근데 피지알에서 이야기 나눴던 분들 중 몇몇 분은 또 끔찍하게 인종차별 당한 경험 이야기도 해주시더라고요. 고등학생 때 그런 일을 당했다던데, 아무래도 어렸을 때가 좀 더 본능에 따라서 움직여서 그런가봐요.
BessaR3a
17/10/07 00:16
수정 아이콘
일본가서 지하철 역에서 지도만 보고있어도 도와주겠다며 말 거시는분들이 많더라구요..

하카타역앞에서 일행끼리 지도보면서 한국말로 "일단 저 뒤에 <요도바시 카메라>까지 가야겠다" 라는 식의 얘기를 하고있는데

지나가시던 어떤 일본 샐러리맨이 그걸또 캐치해서 요도바시카메라 가는길을 모르면 알려주시겠다고 ..

이런일 있을때마다 그나라에 대한 좋은이미지가 쌓이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행여 지나가다가 외국인이 헤매고 있는걸보면 성심껏 도와주려고 하는데

울산촌이라서 그럴 기회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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