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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01/18 02:37:48
Name 신불해
Subject 명나라 시인 고계, 여섯 살 딸을 가슴 속에 묻고 꽃을 바라보다






역사를 살피다보면 많은 일화를 보게 되고, 재밌는 이야기도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으며 배울만한 이야기도 있고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지금과는 다른 시대상 때문에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 원리를 바로 파악하기 어려워 그걸 살펴보는 이쪽에서도 일부러 시각을 현대인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당시의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할떄도 있습니다.





다만, 어느 시대에서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일전에 두 딸이 천연두로 죽어 이를 묻고 직접 묘지명을 쓰며, 그 슬픔을 담담하게 표현해서 적었던 이름 없는 400년 전 명나라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글에서 이야기 하려는 건 하나의 '시' 입니다. 다만, 그 시를 보자면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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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자(靑邱子)라고도 불리는 고계(高啓)는 격동의 원말명초 시대에서 최고로 꼽히는 시인 입니다. 



송나라가 망하고 시문이 약화되었을때, 당나라와 송나라의 시들을 모조리 배우고 읽힌 뒤 단순히 옛것을 모방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소화하여 독창적이고 신선한 시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상대적으로 고계 이후, 명나라 중기의 시인들이 지나치게 규격에 얽매여 있다는 평이라 그런 면모가 더 빛나기도 하구요.


그렇게 명망 높은 고계였지만, 당대 원말명초의 혼란 상에선 여러모로 고난도 겪었습니다.


앞서 당나라와 송나라의 옛 시를 마구 익혔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개 본인은 시를 아주 좋아하는 청년이었지만 격변의 세상 속에서 요구되는건 더 많았고, 일개 무력한 지식인이던 고계는 그 와중에 좌절도 하고, 


"공자 님은 그 나이 드시고도 천하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나는 뭘 이러고 있을까." 라고 무력해하기도 하고,


 "에잇, 이런 어려운 세상, 사나이가 얾매일게 뭐냐. 차라리 가족이고 뭐고 다 버리고 떠나자! 그래서 큰 일을 하자!" 라고 마음 먹었다가도 아내가,


 "저를 버리셔도 원망하지 않겠지만, 저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요?" 라며 아내가 매달리자 차마 뿌리치지 못해 가족의 곁에 남기도 했습니다. (그걸 또 시로 지었다는...) 여러모로 난세에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본인도 더 상처입는 소박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고개는 18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부호의 딸이라 특별히 어려움을 몰랐고, 고계 본인도 당시에만 해도 청운의 꿈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20살 초반이 되자 자유분방하게 이곳저곳을 여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계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좋은 집안과 결혼하고 어려움과 구김살을 모르고 자랐던 고계는, 대혼란기에 피폐해져 고통받는 사람들과 절망밖에 없는 세상을 드디어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 겁니다.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고계 본인이 품었던 이상과 꿈도 이런 여행을 하는 와중에 점차 희미해져서 "이럴수가 있나." 라는 사회 비판적인 시, 또한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인데, 난 뭐하고 있는거지." "왜 나에겐 세상을 바꿀 능력이 없을까? 난 왜 이리도 무능력할까." 같은 식의 자조적인 시를 지었습니다.



본인도 느꼈다시피 소시민에 불과하던 고계는 세상을 바꿀 웅대한 계책은 내놓지 못하고, 다만 "은거하자." "가족과 조용히 살면서, 소박하게 행복을 누리자." 라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25살 무렵에 여행을 멈추고 정착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을 버리고 정착해서 조용히 살자, 고 결정한건 여러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족이 큰 이유였습니다. 마침 고계에게는 어린 딸이 막 태어났던 겁니다. 홀몸이라면 모를까, 어린 자식도 있으니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야 해." 라는 마음이 된 겁니다. 



서른 살이 될 무렵 고계는 거처를 소주(蘇州), 오늘날의 쑤저우로 옳기고 이사했습니다. 당시에 소주, 항주 등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달한 도시라, 자식들을 데리고 살기엔 아주 좋았을 겁니다. 



고계는 이 곳에서 조용하지만, 꿈만 같았던 행복한 삶을 보냅니다. 무엇보다 여행을 끝냈을 무렵 한살이었던 딸이 이무렵 다섯살이 되었는데, 이 아이가 여간 이쁘고 사랑스러운게 아닌 겁니다.



이 조그마한 계집애가 너무 이뻤던 고계는, 딸이 이제 다섯살이라 자기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는데도 틈만 나면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품에 안고 과자를 주고, 딸이 그걸 조그마한 손으로 받아먹을 때마다 너무나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히 무릎에 앉혀놓고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딸에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럼 딸은 꼬마아이의 어눌하고도 청명한 목소리로 이를 따라하고...




아침에 잠을 자다가 시끄러워서 돌아볼라치면, 조그만 딸이 화장대 앞에서 무엇인가 덕지덕지 바르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자기 누나가 화장을 한 게 샘이 나서 떼를 쓰나 봅니다. 화장도 흉내내는 꼬마아이는 예쁜 비단 옷을 보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좋아했지만, 본래는 가진게 부족함이 없었어도 혼란한 시기를 거치며 집안살림이 약화된 고계는 그런 비단을 사주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족함 없었던 재산도 빈털터리가 되고, 크나큰 포부도 어려운 세상을 만나 쓰이지 못하면서 고계는 늘 소주의 거리를 시름에 잠겨 걸어다녔습니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 시국에 대한 우려, 그런 시국에서 뜻을 펼치지도 못하는 울분...



그렇게 시름에 잠겼다가도,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아빠다!" 하면서 어린 딸이 마당까지 뛰어와 자신을 맞이했습니다. 그럴때마다 고계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몸에서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다시 힘이 돌아오는것을 느끼곤 어린 딸을 안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고계가 소주로 이사했던 바로 그 해 11월, 소주성은 대규모의 병력에 의해서 포위되고 맙니다. 이유인즉 소주성은 당대의 군웅 '장사성' 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그 장사성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주원장의 명나라군이 마침내 대도시 소주에까지 이르렀던 겁니다. 소주는 굉장히 부유했던 도시기에 명나라군도 필사적으로 함락을 시키려 했고, 물샐틈 없는 포위를 지속했습니다.



장사성군도 소주라는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명나라 군 역시 강력했기에 포위전은 길게 이어졌습니다. 무려 해를 넘기고 10개월이 지나도록 포위가 계속되며 고립된 소주 내부는 점차 피폐해져가고, 당연히 인심도 엉망이 되어가고, 제반 사정도 말이 아니었던 참입니다.




그런데 이떄, 고계의 사랑스러웠던 어린 딸이 병마에 시달립니다.




안그래도 어린 아이가 쉽게 죽던 시대고, 포위전이 지속되어 성 내부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으니 역병에 걸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힘 없는 어린 아이는 급속도로 약해졌고, 고계는 놀라서 딸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봤지만 본래 돈도 없는데다, 성이 포위되었으니 변변히 좋은 의사를 써보거나 약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발발 동동 구르던 사이에, 결국 시름시름 앓던 딸은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피눈물이 날 심정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아이를 묻을 관을 구하는것 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겨우 관을 구하고,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근처의 산비탈에 고계는 딸을 묻어야 했습니다.




명나라군의 포위는 정확히 10개월을 채우고 나서 끝이 났습니다.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던 겁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장사성 정권과 연관이 있던 사람들은 끌려가 처형 당했습니다. 고계 본인은 애매하게 거리를 때어놓아 무사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도 장사성의 일파로 몰려 명나라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딸을 잃고, 친한 친구들을 전쟁이라는 큰 파도에 고계는 무력하게 잃어버렸습니다.



전쟁은 끝나고,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강변 근처에 있던 고계의 집에도 봄의 강물이 쪼르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모든 게 이전과 변함없지만, 어린 딸만은 이 자리에 없을 뿐입니다. 



화사하고 적막한 봄날. 멍하니 있던 고계는 참지 못해 한잔 술을 꺼내들고 마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 뻥 뚫린 공허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강가를 바라보니, 꽃이 그 자리에 피어있습니다.



그날, 강과 뜰에 꽃이 만발했던 그 날, 어린 딸은 자신의 손을 잡고 걸아가며, 저 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예쁜 꽃, 따다주세요. 아빠."




날이 황혼에 저물자, 결국 고계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래 시, '꽃을 보니 죽은 딸 서가 생각나서(見花憶亡女書)' 라는 시는 바로 고개의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입니다. 번역은 '중국시인총서' 고계시선편을 참조 했습니다.




中女我所憐   六歳自抱持

懐中看哺果   膝上教誦詩

晨起学姉粧   鏡台強臨窺

稍知愛羅綺   家貧未能為

嗟我久失意   雨雪走路岐

暮帰見歓迎   憂懐毎成怡





둘째 딸 서가 하도 귀여워서


여섯 살이 되었어도 안아주었다.


품에 안고 과자 먹는 것을 바라보았고


무릎에 앉혀놓고 시 낭송을 가르쳤다.


아침에 일어나선 언니의 화장을 흉내내느라


떼를 쓰며 경대 앞으로 가 들여다 보았다. 


예쁜 비단옷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집안이 가난하여 지어주지 못했었지.


안타깝게도 나는 실의한지 오래라


눈과 비를 맞으며 갈림을 헤메고 있었었지.


저녁에 귀가하여 반갑게 맞는 둘째를 보면


그때마다 내 근심 걱정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모질게도 둘쨰가 몹쓸 병에 걸렸는데


때마침 다시금 사변이 일어났던 떄였으니


난리 통에 놀라 갑자기 숨을 거두어


약과 음식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였다.


황급히 보잘것 없는 관이나마 마련해서


통곡 속에 멀리 산비탈에 묻고 말았을 뿐.


망망한 천지에서 그 얘의 영혼 찾을 수 없고


생각할수록 가엾어 계속 가슴이 쓰라리다.


그런데 지난해 봄을 생각해보면


정뜬 뜰과 연몿에 꽃이 만발했고


둘쨰는 내 손을 나무 밑을 거닐며


나에게 예쁜 꽃가지를 따달라고 했었다.


금년에도 꽃은 다시 아름답게 피었지만


나는 멀리 떨어진 강변에 거처하고 있다.


온 가족 중에 너 혼자 없어


꽃을 보아도 공연히 눈물만 흐르네.


한잔 술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데


황혼녁 장맠에 바람 불어


그저 처량하기만 할 뿐.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4-12 13:2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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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18 03:06
수정 아이콘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쓰시나요 볼때마다 감탄하고 갑니다
17/01/18 03:37
수정 아이콘
다섯살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술을 한잔하고 이 글을 읽고나니 갑자기 울컥하네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라가키
17/01/18 07:41
수정 아이콘
가슴을 울리네요..
Maiev Shadowsong
17/01/18 08:38
수정 아이콘
아직 부모가 되어본적은 없지만.. 정말 저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ㅠㅠ
17/01/18 09:00
수정 아이콘
지난번 글도 그렇고 너무 슬퍼요 ㅠㅠ
기다림
17/01/18 09:15
수정 아이콘
이렇게나 슬픔이 잘 전해지다니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문뜩 세월호 유족들이 생각나는데 참.슬픕니다.
기쁨평안
17/01/18 10:19
수정 아이콘
5살, 4살 딸아이가 있는 입장에서 너무 울컥하네요.
花樣年華
17/01/18 10:21
수정 아이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정말... 아효... ㅜㅠ
낭만없는 마법사
17/01/18 10:27
수정 아이콘
부모가 자식을 잃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정은 시대를 넘어서도 계속 이어져야만 합니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딱 하나 가족이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치열하게
17/01/18 10:39
수정 아이콘
가슴에 묻는 시네요
혼돈과카오스
17/01/18 10:48
수정 아이콘
오늘도 주옥같은 글 잘 읽고 갑니다!
Liberalist
17/01/18 11:03
수정 아이콘
고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만 이 글 보니까 더 짠하네요.
문제는 이 사람, 이렇게 큰 아픔을 겪고 난 뒤에도 인생 역경이 결코 수월하지가 않았다는게, 아니, 그걸 넘어서 비참했다는게... ㅠㅠ
미네랄배달
17/01/18 12:32
수정 아이콘
눈물이 왈칵 ㅠㅠ
아나로즈
17/01/18 18:08
수정 아이콘
버스타고 가며 글보다 울었네요
안토니오 산체스
17/02/09 08:30
수정 아이콘
원문이 중간에 잘린 것 같습니다
티모대위
17/04/12 21:07
수정 아이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제가 원체 눈물이 많기도 하지만, 워낙 슬퍼서 안 울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나스
17/04/16 15:4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7/04/18 11:26
수정 아이콘
요참으로 죽은게 참 안타까운 시인이죠.
칼라미티
17/04/19 10:03
수정 아이콘
정말 좋군요...그나저나 윗분의 댓글을 보고 검색해보니 주원장이 또...ㅠㅠ
메텔을좋아해
17/04/21 14:12
수정 아이콘
슬퍼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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