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이기려는 심야의 돌소리>
91년 1월의 어느날,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씨는 여느 때처럼 남편을 옆좌석에, 창호를 뒷좌석에 태우고 관철동 한국기원에 갔다. 그날 '대왕’타이틀이 창호에게 넘어갔다. 대국은 늦게 끝났다. 날은 어두워지고 추위가 몰아친 종로 거리에서 曺 9단은 어깨를 움추리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채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혼자 서 있는 曺 9단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연속되는 패배에 대한 무력감이랄까. 대세가 기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씁쓸함 같은 것이 그의 온 몸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바둑도 졌고 그래서 曺 9단은 친구들과 어울렸다가 새벽에 귀가했는데 남편을 맞으러 나오던 부인 정씨는 때마침 2층에서 들려오는 바둑돌 소리를 들었다. 창호는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그 돌소리가 송곳처럼 정씨의 가슴을 찔렀다. 늙은 시부모에 세자녀, 그리고 남편과 창호까지 아침만해도 서너번씩 밥상을 차리면서도 일하는 사람 하나 두지않고 살림을 꾸려온 그녀였다. 그 씩씩하고 명랑한 여인이 처음으로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훗날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가슴이 싸한 것을 느꼈지요. 남편을 이기려는 돌소리처럼 들렸어요. 그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어요."
<7년만에 자라버린 호랑이 새끼>
7년전에 대문앞에서 처음 만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말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뚱뚱하고 눈빛은 흐릿했으며 촌티가 물씬 나는 모습으로 남편 곁에 서있었다. 뭐라 물으면 모기소리로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참 순진도 하구나 싶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승부세계를 곁에서 지켜봐온 터라 이 아이가 그 험난한 동네에서 어찌 버틸까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생전에 당대무적인 남편을 위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曺 9단쪽도 마찬가지였다. 프로들이 曺 9단에게 "호랑이를 키우는 것 아냐?"하고 물으면 曺 9단은 "그래도 10년은 걸리겠지"라고 대답하곤 했다.
물론 양쪽 다 농담이었다. 동료 프로들은 연전연승하는 曺 9단에게 "너의 유일한 적은 너의 제자"라는 식으로 놀린 것이고 曺 9단이 10년이라고 말한 것은 아무리 좁게 잡아도 10년 안엔 어림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불과 7년만에 농담은 진담이 되었고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이고 말았다.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히고 사제는 분가하다>
이리하여 두사람이 함께 사는 조훈현의 연희동 집은 점차 괴이한 기운으로 덮여갔다. 두사람이 바둑을 둔 날이면 曺 9단의 부인 정씨는 남편에게 승부를 물어보기도 괴롭고 쑥쓰러워 한국기원에 살짝 전화로 알아봐야 했다.
바둑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는 박수동 화백은 2층에 사는 젊은 맹호가 1층에 사는 지친 청룡을 거세게 압박하는 모습을 그렸다.
정미화씨는 비로소 창호가 떠날 때가 된 것을 알았다. 曺 9단은 일본의 내제자 생활을 거친 사람인지라 일본에서 묵계처럼 내려오는 스승과 제자의 룰을 지키고 싶어했다. 제자는 성인이 되어 자립하거나 5단이 되면 내보내는게 전통이었다. 창호는 아직 그 어느쪽도 해당되지 않았다.
"제자는 제자고 승부는 승부"라고 조 9단은 담백하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입장은 어려워졌다. 당대 제일의 제자를 키웠다는 자부심과 함께 현실의 피곤함이 뒤범벅이 됐다.
창호는 타고난 무표정과 무거운 입으로 여전히 아무 내색이 없었지만 사실은 이무렵엔 창호도 괴로움의 수위가 상당히 높아지고 있었다.
1991년 2월에 曺 9단은 북한산(北漢山) 자락의 근사한 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창호도 3월의 고교입학을 명분으로 강남의 아파트로 분가했다. 한국바둑계 최초의 내제자인 이창호와 스승 조훈현은 이렇게 남북으로 헤어졌다.
<이창호, 드디어 1인자의 자리에 오르다>
그 2월에 창호는 조 9단을 3대 2로 꺾고 최고위(最高位)를 방어했고 3월엔 다시 국내 최대기전인 왕위전에서 맞섰다. 부담을 털어버린 曺 9단과 충암고(沖岩高) 1학년이 된 창호는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격돌했다.
왕위(王位)는 이제 曺 9단에게 유일하게 남은 빅 타이틀이었다. 이 승부에 바둑계의 일인자(一人者) 자리가 걸려있었다.
3대 3으로 어울린 승부가 숨가쁘게 최종국을 맞이했을 때 조훈현에게서 대착각이 튀어나왔다. 창호는 중요한 고비에서 언제나 하던 것처럼 화장실로 가 조용히 세수를 하고 돌아오더니 曺 9단이 깜박한 절묘한 맥점을 던져 대마를 잡아버렸다.
<대국해설>
기보를 보자. 형세는 은은하게 백이 두터운 가운데 흑을 쥔 曺 9단이 분발하고 있다.
<기보1>
<1보>에서 曺 9단은 흑1로 덤벼 상변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때 흑5로 A로 잡았으면 탈은 없었다. 5로 둔 것은 백의 봉쇄를 피하는 당연한 수로 보였는데 여기서부터 이창호의 절묘한 수읽기가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8로 응수를 본 것이 수순의 시작.
<기보2>
<2보>에서 이창호는 백1부터 9까지 과감한 사석전법을 펼치며 대마를 통째 잡으러갔다. 이창호의 바둑에선 좀체 볼 수 없는 격결한 수법이어서 구경꾼들은 깜짝 놀랐다. 백11을 선수한 뒤 13으로 넘어 과연 이 흑대마는 살 수 있느냐.
<기보3>
<3보>에서 보면 曺 9단은 문제를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1, 3으로 몬 다음 흑5로 둔 것이 그것인데 백이 A로 이으면 흑10으로 두어 쉽게 사는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잇기 전에 6으로 먹여치는 수가 있었다. 이 간단한 맥점으로 대마는 사망했다. 흑이 B로 때리면 백은 A로 잇기만 해도 대마가 죽어있다. 9로 두면 물론 10으로 들어가 죽는 것.
曺 9단은 너무 아쉬웠던지 이후 한참 더 두었지만 대마가 죽는 이순간 승부도 끝났다.
성장한 호랑이새끼는 드디어 스승의 머리에서 일인자의 왕관을 벗겨냈다. 한국기원의 '바둑'지는 이 사건을 '이창호의 쿠테타'라고 큰 제목으로 표현했다. 돌부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아무튼 창호가 한국의 일인자가 된 사실만은 확연했다. 이제는 아무도 창호의 태풍을 막을 자가 없어보였다.
때마침 일본의 신인왕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과 이창호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처음 추진할 때는 양측 신예최강자의 대결이라는 의미였는데 몇달 사이 창호가 정상에 올라버리는 바람에 모양이 이상해졌다. 한국쪽에선 큰 기전 우승경험이 없는 요다와 일인자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창호의 대결이 격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기사도 많았지만 한국기원은 친선대결이고 또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며 무마했다.
한국기원 관계자들이 볼 때 5번기인만큼 적어도 창호가 질리는 없어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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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6)‥‥‥‥‥‥‥‥‥‥‥‥‥‥‥‥‥‥‥‥ 2001. 10. 30. 火
<요다 노리모토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
요다(依田) 9단에 대한 창호의 첫 인상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짙은 눈섶에 강한 눈빛, 그리고 결연히 입을 다문 모습은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를 연상시켰다. 돌을 놓을 때는 판이 깨져라 찍어 눌렀다. 소리도 요란했다. 거의 소리가 나지않게 슬그머니 돌을 갖다놓는 창호의 눈에 요다의 모습은 마치 도끼로 바둑판을 쪼개려는 역사(力士)처럼 보였다.
본인이 고백한대로 창호는 겁이 많다. 어릴 때 선생님 집에 와서도 밤엔 무서워서 혼자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창호니까 힘차게 기합을 토해내는 요다의 모습에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위축 운운은 추측일 뿐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월에 동경과 서울을 오가며 벌어진 5번기는 놀랍게도 요다의 3대1 완승으로 끝났다. 일반 팬들은 말할 것 없고 프로기사들까지도 이 결과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창호의 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팬들은
"이창호는 해외징크스가 있다. 외국이라 실력발휘를 못한 것이다."며 자위하면서도 어딘지 떨떠름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일본에선 다시
"이창호란 소년의 바둑은 스승인 조훈현 9단을 상대하는데는 능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무르익진 않았다."
라는 말이 나왔다. 씹어보면 씹어볼수록 묘한 뉴앙스를 지닌 말이었다.
<특별대국, 이창호 3대 1로 완패>
그러나 지금와서 곰곰히 생각하면 창호가 요다에게 3대 1로 진 것은 하등 이상할게 없는 일이었다. 고수들끼리의 승부는 수(手)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좌우한다. 찰나에 일어나는 미세한 흔들림으로 승부는 결정된다. 당시 16살이었던 창호가 요다 특유의 기세에 강한 압력을 받은 나머지 그의 자랑이었던 부동심이 흔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창호는 2년후 동양증권배에서 다시 요다 9단과 맞부딛쳤다. 실력도 더 나아졌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상대였기에 좋은 설욕의 기회라 믿고 전력을 기울였다.
끝내기에 접어들 무렵 바둑은 요다 9단이 미세하게 앞선듯 보였으나 검토실의 프로들이나 관계자들은 창호의 승리를 믿었다. 반집이나 한집반 차이라면 끝내기의 귀신 이창호가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믿었다. 창호도 그걸 기대했다.
하지만 요다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버틴 끝에 1집반을 이겨냈다. 창호에게 밀리지 않는 끝내기 솜씨를 보인 요다의 모습이 이순간 한국 프로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요다가 한국기사들에게 강자의 이미지로 군림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창호의 천적 요다 노리모토>
창호가 요다에게 계속 밀린 것은 요다에 대한 오판 탓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창호는 요다의 겉모습과 그의 대국자세(돌로 판을 깨져라 내리 찍는)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요다는 겉모습과 전혀 다른 기풍을 지닌 사람이었다..
훗날 이창호 9단, 유창혁 9단과 함께 요다 9단에 대해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 요다는 공격적인 바둑인가.
"천만에. 전혀 그 반대다." (유창혁 9단)
- 요다는 매우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는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의 바둑은 균형이 잘 잡힌 교과서적인 정법을 구사하는 바둑이다." (이창호 9단)
- 특별히 강한 대목은 어디인가.
"특별히 강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기초가 좋고 모양이 좋다. 대체적으로 수비형이며 유리한 바둑을 닦아내는 솜씨도 좋다." (이창호 9단)
- 약점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사나운 접전을 피하고 격렬한 승부를 꺼리는데 있다고 본다. 조훈현 9단이 나중에 그 약점을 캐치하고 '흔들기'로 나가 승리한 것이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유창혁 9단)
<첫인상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이창호>
'흔들기'란 말은 1994년 조훈현 대 요다의 동양증권배 결승전 때 등장한 말이다. 당시 TV 해설을 맡았던 필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생각되는데 曺 9단이 침착하고 수비적인 요다 9단을 처음부터 공격적이고 사나운 행마로 자극하여 본연의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호는 '흔들기'와는 거리가 먼 기풍의 소유자. 더구나 첫 인상의 강렬한 영상 탓인지 아직도 그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한채 창호는 요다에게 계속 끌려다녔다.
생각하면 창호와 요다와의 천적(天敵)관계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잘 지는 창호이고 외국에 나가면 잘 지는 창호이기에 요다와의 첫 대결에서 1대 3으로 패배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창호는 두번째 만나면 거의 다 이겨내는 사람이기에 '전략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그런데 이런 창호의 능력도 요다에게는 철저히 가로막혔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창호지만 가끔 "요다 9단을 만나고 싶다."고 쓰라린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수많은 기전에서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한쪽에서 요다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요다와의 전적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1승 6패로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언젠가 李 9단에게 그점을 물어봤다.
- 유독 요다(依田) 9단에게 성적이 그토록 나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반드시 이기려고 하니까 더 이겨지지 않았다. 이유라면 그것이 이유일 것이다."
<요다에 대한 강렬한 승부욕>
승부욕이 문제였다고 李 9단은 말하고 있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머리에 나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글귀가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꼭 그뿐일까. 최초에 요다를 만났을 때 창호가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마음의 동요를 부르고 마음의 동요는 패배를 부른다. 그리하여 첫 대결에서 1승 3패. 그 이후엔 좀더 훌륭해진 실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모종의 그림자가 승리를 방해한다. 부담감과 승부욕에 어깨가 굳어버린다. 그리하여 1승 6패, 다음은 2승 7패. 이런 식으로 흘러왔던 것은 아닐까.
이창호란 이름은 마주앉은 누구에게나 강한 최면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창호 대 요다의 대결에선 입장이 바뀐다.
이창호는 '돌부처'란 별명 그대로 선천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지만 요다 노리모토란 천적만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창호 9단이 조치훈 9단을 이기고 趙 9단은 依田 9단을 이기고 依田은 이창호를 이기는 관계는 매우 흥미롭다.
승부와 마음의 관계는 이렇게 묘하다. 서봉수 9단은 중국바둑에 몇번 이기더니 크게 자신감을 얻었고 이것이 중국의 고수들에게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는 배경이 된다. 이창호가 당대의 거목이라 할 조치훈 9단에게 공식대국에서 6연승을 거두고 중국의 강자 마샤오춘(馬曉春) 9단에게 10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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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7)‥‥‥‥‥‥‥‥‥‥‥‥‥‥‥‥‥‥‥‥ 2001. 11. 6. 火
<한국킬러로 떠오른 요다 노리모토>
요다(依田)가 '한국킬러'가 된 것도 이창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기사들에게 무적의 강자로 뼛속 깊이 각인된 이창호를 유유히 쓰러뜨리는 요다. 신산(神算) 이창호의 끝내기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요다. 이런 이미지는 그를 만나는 한국기사들의 심혼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 전적을 다시 보자.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롯데호텔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백) 요다(흑) 백 4집반승 롯데호텔 O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일본기원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 (백) 요다(흑) 흑 불계승 일본기원 X
1993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3집반승 서울 X
1993 동양증권배 이창호(백) 요다(흑) 흑 1집반승 롯데호텔 X
1998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반집승 일본 지바 X
1999 춘 란 배 이창호 (백) 요다 (흑) 백 반집승 중국 우한 O
1999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2집반승 중국 텐진 X
2000 잉창치배 이창호 (흑) 요다 (백) 흑 3집승 중국 상해 O
2000 TV아시아 이창호(흑) 요다(백) 흑 6집반승 경주 O
* 종합전적 = 4승 7패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전적은 4승 7패>
특별대국에서 1승 3패한 뒤 속기대회인 TV아시아 본선과 동양증권배 본선에서 2연패하여 1승 5패. 그 뒤로 창호는 점점 강해져갔으나 요다와는 통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벼르고 벼르던 요다를 다시 만난 것은 무려 5년 만인 1998년의 TV아시아 대회. 그러나 창호 본인의 말대로 승부욕이 앞선 탓인지 박빙의 승부 끝에 반집패를 당한다. 이리하여 1승 6패.
창호는 '역전 반집승'이 전매특허였으나 요다에게는 그의 귀신같은 추격전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1999년 중국에서 열린 춘란배 본선에서 창호는 요다에게 극적인 반집승을 거둔다. 비로소 요다란 인물이 던진 첫인상의 그물로부터 창호가 벗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이듬해 TV아시아 결승전에선 다시 2집반을 졌으나 2000년에 들어서서는 잉창치배와 TV아시아 대회서 연승하여 총 전적을 4승 7패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창호는 아직 요다에게 빚을 다 갚지 못했다. 일본의 명인이 되어 멀리있는 요다가 요즘 세계대회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바람에 만날 기회가 적어진 것이다.
요다 노리모토란 인물은 이리하여 현대바둑사에서 독특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는 조훈현 9단에게 5승 4패, 유창혁 9단에게 6승 7패, 서봉수 9단에게 4승 1패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최강의 실력자 이창호에게 7승 4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거두고 있다.
한때 '일본의 자존심' 또는 '일본 최후의 희망'으로 불린 요다 9단. 그가 앞으로 이창호와 다시 대국할 기회는 몇번이나 될까. 3번 이상 맞붙지 않는다면 그는 이창호에게 전적이 좋은채 끝난 세계 유일의 기사로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창호, 세계대회 결승에 처음 오르다>
창호와 요다가 처음 만났던 1991년에 세계바둑계는 또하나의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대는 제3기 동양증권배. 준결승에 조훈현 9단 대 이창호 5단, 린하이펑(林海峰) 9단 대 조치훈 9단, 이렇게 4명이 올랐다. 여기서 창호와 林 9단이 승리하여 창호는 생애 처음 세계대회 결승전을 갖게됐다.
9월 대만에서 결승 1, 2, 3국을 치렀는데 첫판은 林 9단이 흑으로 반집을 이겼고 둘째판은 창호가 1집반을 이겼다. 3국은 林 9단의 불계승.
16세의 나이로 세계대회 결승에까지 진출했으나 아직 무언가가 부족한 모습이었고 린하이펑이란 대가에게는 한수 밀리는 모습이었다. 창호는 그러나 林 9단과의 이 결승전 이후 승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林 9단에게 깊은 호감을 품게된다.
그리고 수줍어하는 성격임에도 창호는 林 9단에 대해서만은 스스럼없이 속마음 한조각을 내보이곤 했다.
-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은.
" 그렇게 무겁게 느낀 경우는 처음이었다."
- 무겁다는건 바둑인가 사람인가.
" 林 9단을 말하는 것이다."
<전적은 2대 2, 승부는 최종국으로>
이창호의 바둑은 네웨이핑(攝衛平), 린하이펑(林海峰),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등의 바둑과 유사점이 있다. 창호도 젊은 시절의 林 9단이 계산에서 무척 정확했음을 잘 알고 있다. 기풍도 그렇지만 창호는 바둑을 떠나 林 9단으로부터 매우 좋은 인상을 받은듯 훗날 프로기사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林 9단을 꼽곤 했다.
林 9단이 2대 1로 리드한 가운데 1992년 1월 서울에서 결승전이 이어졌다. 4국에서 백을 쥔 林 9단은 필승의 형세를 역전당해 4집반을 졌다. TV가 생중계하는등 한국 바둑팬들의 이목이 총 집결된 가운데 1월 27일 롯데호텔에서 마지막 제5국이 열렸다.
바둑은 중반이후 흑의 우세로 시종했으나 끝내기에 접어들자 점점 미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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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8)‥‥‥‥‥‥‥‥‥‥‥‥‥‥‥‥‥‥‥‥‥ 2001. 11. 20. 火
<17세 세계 최연소 챔피언>
2대 2 상태에서 벌어진 창호와 린하이펑(林海峰) 9단의 동양증권배 결승 최종국은 흑을 쥔 린하이펑의 우세로 시종했다. 종국이 가까워오고 있었으나 그 흐름은 변하지 않았고 이대로 승부는 끝날 것만 같았다.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자.
<기보1>
<기보1> (白) 5단 이창호 VS (黑) 9단 린하이펑
흑의 반면 10집승이 내다보이는 장면에서 창호는 패를 각오하고 백1로 버텼다. 마지막 1분 초읽기 속에서 최후의 강수가 던져진 것이다. 林 9단도 1분 초읽기. 똑같은 초읽기라도 50세의 林 9단 쪽이 훨씬 힘든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흑2로 젖히고 백3 꽉 막아 패. 흑의 꽃놀이패 같지만 백이 먼저 때리는 패라는 사실을 창호는 잊지 않고있다. 흑에게 A의 절대 패감이 있지만 백에게도 B의 절대 패감이 있다.
<기보2>
<기보2>에서 창호는 위쪽 백 3점을 내주고 패를 해소해버렸다. 첫눈에 백이 대망한 모습. 그래서 검토실에서도 처음엔 바둑이 끝났다며 허탈해 했으나 계산을 면밀히 해보니 좀전보다 차이가 살짝 줄어든 것이 아닌가. 그건 다행이지만 바둑은 여전히 반면8집이 강하게 뒤지고 있어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창호가 반상최대의 14로 뻗었을 때 반석같던 국면에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기보3>
<기보3>을 보자. 하변 흑은 5를 선수하면 손빼도 살아있다. 따라서 흑은 5를 선수한 뒤 8의 곳에 두면 된다. 그런데 1분초읽기에 몰린 林 9단은 흑1을 선수하려고 했다. 당연한 선수이고 충분히 떠오를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순간 백2, 4가 놓이면서 흑모양이 뭉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흑1은 집을 내는데는 하등의 도움이 안되는, 오히려 자신의 공배를 메움으로서 스스로 목을 조이는 대악수가 되고 말았다. 林 9단은 부득이 7로 살아야 했고 그틈에 8은 백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바둑은 아직도 흑이 반집은 두터웠다. 그러나 흑9가 마지막 패착이었고(이수로 A에 한점 잡았으면 흑의 반집승)12로 살아가면서 백은 1집반승을 거두게 된다.
이 바둑을 보면 얼핏 운이 좋아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창호가 아니면 이런 역전이 가능하겠는가. 林 9단이 제아무리 초읽기에 몰렸어도 그리 쉽게 실수할 인물이 아니다.
불리하지만 옥쇄와 같은 성급함을 외면하고 꾸준히 수순을 비틀어 상대에게 어려움을 안겨줬기에 그것이 林 9단의 실수를 유발시킨 것이다. 또 상대가 실수했음에도 그걸 모르고 지나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위에서 보여준 <기보3>의 흑1과 같은 실수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창호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林 9단을 극적으로 꺾고 만17세의 나이로 세계챔피언이 됐다. 지옥같은 한판이었고 극한의 괴로움을 이겨낸 한판이었다. 기적같은 역전승이었으나 이 한판을 진 것과 이긴 것의 차이는 컸다.
세상일은 알 수 없지만 창호가 세운 17세 세계챔피언의 기록은 아마도 50년 내로는 깨지기 힘든 기록일 것이다. 다시 이창호와의 대화.
- 이기고 나서 미안한 느낌은 없었나.
" 초읽기와 미세한 승부에 정신이 없어 바둑이 끝났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 끝나고 복기를 오래 한 것 같은데.
" 몹시 억울하게 졌는데도 어린 나를 상대로 오래오래 복기하는 林 9단의 모습이 놀라웠다."
<가장 좋아하는 기사 - 林海峰 9단>
창호도 복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님인 조훈현 9단이나 충암고 9년 선배인 유창혁 9단등 주로 대국하는 기사들이 다 어려운 사람들이다. 특히 타이틀을 뺏었거나 할 때는 더욱 어려워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복기 아닌 복기를 하곤했다. 선생님이 묻는데도 계속 아무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주위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다.
창호는 그런데 林 9단과의 복기가 아주 맘에 들었던듯 이 동양증권배 최종 결승국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창호는 자기가 둔 바둑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중요한 바둑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물으면 어제 둔 바둑도 생각이 안나요 하며 웃는다. 역시 많이 잊어버리는 것이 승부의 집중력에 유익한 것일까)
林 9단과의 바둑을 극적인 역전승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이무렵까지 창호의 승부 패턴이었다. 조훈현 9단과의 타이틀전에서도 악전고투 끝에 아슬아슬하게 역전승하는 일이 많았다.
1992년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유리한 바둑은 그대로 밀어붙여 이기고 불리한 바둑은 역전시켰다. 그런식으로 모든 기전을 석권해 나갔다. 여전히 포석이 약점이었지만 중반의 수읽기와 사활, 특히 끝내기에서 발군의 힘을 보여줬다.
행마가 무겁고 특히 초반엔 이상감각이 속출하는듯 보이는데 막상 맞붙으면 상대는 무형의 힘에 서서히 밀려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 1992년에 창호는 유일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유창혁에게 최대기전인 왕위전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스코어는 4대 3.
<유창혁, 이창호의 전관왕 필사 방어>
이때의 왕위전 도전기 최종국에서 공격의 명수 유창혁은 이창호가 추격해오기 전에 일찍부터 수비망을 격렬하게 흔드는 전법으로 값진 승리를 따냈다. 나는 그때의 신문기사에 이렇게 썼다.
- 여름햇살같이 강렬한 유창혁의 바둑이 겨울산맥처럼 깊고 아득한 이창호 바둑을 쓰러뜨렸다 -
<기보1>
<기보1> (백) 이창호 9단 (흑) 유창혁 9단
3대 3으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벌어진 1992년 왕위전 도전기 최종국이다. 백을 쥔 창호가 1로 눌러버리자 이곳은 모두 백집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창혁은 2를 선수한 뒤 4로 기어나오는 기상천외의 묘수로 백진을 흔들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백5 지키자 이번엔 6의 붙임. 이 두번의 묘수에 이창호의 철석 간장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보2>
<기보2>에서 창호는 백1로 잡았는데 흑2로 옆구리에 붙인 수가 호착이어서 백의 고전은 계속된다. 흑4 때 백5가 이창호의 필사적인 강수인데 유창혁의 대응은 의외로 유연하다. 바로 살릴듯 하던 돌들을 모두 죽이는 전법으로 나온 것이다.
<기보3>
<기보3>에서 백은 다시 흑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흑6에 지키자 백모양보다는 흑모양이 월등해서 흑의 사석전법에 걸려들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7에 돌입하자 유창혁은 8, 10으로 공격하여 대세를 장악했다. 왕위는 이렇게 유창혁 차지가 됐다.
이해 실력1위는 이창호였으나 인기투표 1위는 유창혁이었다. 그리고 유창혁은 막강한 이창호의 화력 앞에서 국내 최대의 왕위 타이틀을 4년이나 지켜냈다. 2년 뒤인 1994년엔 13개의 타이틀을 한손에 쥔 이창호가 천하통일을 노리며 마지막 남은 왕위를 향해 총 공격을 감행해왔으나 유창혁은 역시 막아냈다.
창호는 기록제조기 답게 모든 기록을 경신해 나갔지만 조훈현 9단이 두번이나 해낸 '전타이틀 획득'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曺 9단 시절보다 기전 수가 두배나 늘어난 탓이 컸다. 그리고 유창혁이란 또하나의 걸출한 인물이 그걸 막았다. 유창혁은 만18세에 늦깍이 프로가 돼서도 일가(一家)를 이룬 드문 존재였다. 그리고 창호와 유창혁은 둘 사이에 이어지는 끝없는 대전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한층 두텁게 쌓아갈 수 있었다. 2001년 11월 현재 두사람의 전적은 창호가 80승 40패로 앞서있다. 3판중 2판을 창호가 이긴 셈인데 이 승률은 조훈현과 서봉수 사이의 승률과 매우 비슷하다.
93년에 창호는 드디어 조치훈과 대면하게 된다. 또하나의 괴상한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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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9) ‥‥‥‥‥‥‥‥‥‥‥‥‥‥‥‥‥‥‥‥‥ 2001. 12. 4. 火
<조치훈 9단과의 첫 진검승부>
창호와 조치훈 9단과의 만남은 이전에도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TV참피언이 대결하는 일종의 친선대회. 2번 만나 1승 1패였다.
93년 동양증권배 결승전에서 두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것이 이창호 - 조치훈 두 천재가 벌인 최초의 진검승부였다. 창호는 이제 막 성년으로 진입할 나이인 만18세, 趙 9단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만40세였다.
대국장소는 제주도. 때는 바야흐로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 풍광이 아름다운 제주도에서도 서귀포의 해변은 특히 근사하고 이중에서도 대국장이 설치된 하이야트호텔의 전망은 가장 멋있기로 정평이 있다. 아무튼 조치훈 대 이창호의 대결은 빅카드여서 국영TV인 KBS가 현지에 중계팀을 보내는등 법석이었다. 해설은 조훈현 9단.
스포츠라든가 다른 종목의 생중계 해설은 현역을 떠난, 선수로는 한물간 사람이 하기 마련이다. 야구의 경우 박찬호보다 공을 못던져도 얼마든지 해설은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둑만은 묘하게도 대국자보다 실력이 낮으면 정확한 해설이 어렵다.
야구에서 박찬호의 공을 보고 잘 던졌다. 또는 실수했다고 알아보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바둑에서 초일류 실력자인 대국자가 정신을 집중하여 오랜 시간 끝에 찾아내는 수순을 해설자가 즉각 좋다, 나쁘다 판단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것이다.
미세한 바둑의 형세판단에 이르면 해설의 어려움은 점점 가중된다.
<대국장은 제주도, 해설자는 조훈현 9단>
사태가 이러하기에 조훈현 9단이 생중계 해설을 맡아준다면 방송국으로선 그보다 좋을 수 없다. 하나 현역 최고 선수들은 고사하고 신인들조차 명색이 토나먼트 기사들은 해설과 같은 외도를 꺼려한다. 기합이 빠져 승부가 느슨해지는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바둑계에선 TV해설을 맡으면 성적이 떨어진다는 것이 통설이다)
조훈현 9단은 그러나 이판의 해설을 시작으로 수많은 해설을 맡았으나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그 또한 놀라운 일이다.
아무튼 한사람은 자신의 타이틀을 차곡차곡 챙기고있는 제자요, 또 한사람은 젊은 시절 심중의 라이벌인 조치훈이었기에 曺 9단은 현장에서 직접 이판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5번기의 제1국은 흑을 쥔 趙 9단이 포석에서 리드하여 줄곧 앞서나갔으나 결정타를 던지지 못하다가 종반 대역습을 허용하여 불계패했다. 趙 9단은 그러나 이 패배 후에도 여유가 있었고 그리하여 이 한판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1국의 패배 후에도 여유있던 趙 9단>
<기보1 - 1993년 동양증권배 결승1국>
<기보1>을 보자. 이것이 1국인데 흑이 조치훈 9단이고 백이 당시 6단이던 이창호다.
지금은 중반전 모습인데 포석에서 성공한 흑의 趙 9단이 여유있게 앞서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흑1로 공격하자 창호가 백2로 웅크린 점. 이 느리고 둔한듯 보이는 수가 실은 대추격의 발판이 된 최고의 한수였다.
다시말해 흑이 1로 두지않고 A에 붙여 중앙을 봉쇄했으면 흑의 낙승이 예고되는 국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창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백2를 보지 않고서는 이곳이 요소인지 알기 어렵다. 흑1도 당연해 보였는데 백2가 두어지는 순간 "아! 그곳이 급소였구나."하고 모두들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趙 9단은 조훈현 9단 홍종현 8단등 한국기사들과 함께 바닷가 생선횟집에 갔다. 그곳에서 趙 9단이 曺 9단에게 농담 한마디를 던졌다.
한국말에 약간 서투른 趙 9단이 낮은 톤으로 말했기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제자에게 너무 쉽게 져주고 있다. 그래서는 제자가 제대로 배울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요지의 말이었다. 曺 9단이 제자에게 시달린다는 소문은 趙 9단도 알고 있었기에 웃으면서 재미있게 유모어를 던진 것이지만 여러가지 뉴앙스가 담긴 한마디였다.
선문답같은 이 말을 해석해보면 우선 "져준다"는 대목에서 "창호는 아직 강하지 않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창호는 당신 조훈현을 이길만큼 강해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조훈현 당신은 창호에게 그렇게 지곤(져주곤)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치훈과 조훈현의 선문답>
曺 9단은 그말을 듣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네. 일단 두어봐."
라는 대답을 했다. 창호는 趙 9단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설익은 데가 많다. 포석도 약점이고 행마에서는 특히 曺 9단의 기풍으론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대목이 많다. 그러나 승부에서는 노상 지고있으니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창호의 강점은 <기보1>의 백2가 보여주듯 자세히 보지않으면 좋은 수 같지 않은 수를 꾸준히 두고있는 것인데 이것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승부호흡인데 이대목에 이르러서는 어느 누구도 창호의 길고 유장하며 느릿하면서도 끈질긴 호흡의 무서움을 제대로 전달하긴 어렵다.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정신력이 좋다. 수양도 더 좋아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무튼 趙 9단은 첫판에서는 졌지만 이번 5번기에서 창호라는 소년강자를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이틀후의 제2국에서는 팽팽한 접전 끝에 묘수 일발을 던져 필승의 형세를 구축했다. 하지만 趙 9단은 이때부터 창호의 승부수와 마지막1분 초읽기등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기록에 남을만한 실수를 연발하더니 '반집'을 지고 말았다.
<조치훈, 끝내기에서만 6번 연속 실수>
<기보2>
<기보2>를 보자. 이번엔 백이 조치훈 9단이고 흑이 이창호 6단이다.
중반까지 팽팽하다가 창호의 흑1이 대실수여서(그냥 3에 두어도 백은 어차피 후수로 살아야 한다) 손해를 봤다.
설상가상으로 趙 9단의 백10이 뼈속을 파고드는 통렬한 일격. 흑은 12로 잡고싶지만 백A로 두는, 흑의 자충을 유도하는 묘수가 기다리고 있어서 11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흑은 살긴했지만 후수였고 너무 크게 당하여 이번만은 소생이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보3> = 趙 9단의 연속되는 실수
<기보3>
창호와 趙 9단은 다같이 1분초읽기. 바둑은 백의 필승지세에서 끝내기 장면.
여기서 창호는 흑1로 덤벼들었는데 여기까지 가지못하면 어차피 진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안되면 던질 생각이다. 그런데 趙 9단의 백2가 최초의 실수. 5로 씌우면 바둑은 끝이었다.
8로 A에 두었어도 역시 백이 이겼다. 12로 13에 끊었어도 백승.
이 장면에서만 연속 3번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100수 안에 시간을 다 쓰고 나머지 200수를 1분에 두면서도 별 탈이 없던 趙 9단이 이날은 술에 취한듯 비틀거린 것이다. 스스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보4> = 다시 3번의 실수, 합계 6번의 실수 끝에 반집패.
<기보4>
趙 9단도 속이 상한듯 3으로 몰았는데 이수가 또 실수다. 4로 끊었을 때 5로 따낸 것도 불각의 실수. 보통은 때리는 것이지만 지금은 6에 빠져야했다.
창호의 흑6이 날카롭다. 대개 이렇게 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수로 되어있지만 지금은 6으로 넘은 다음19로 재차 넘으면 흑이 오히려 이득이다. 趙 9단의 실수도 실수지만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한눈에 알아보는 창호의 능력 또한 놀랍다.
실수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면 실수는 그냥 묻힐 것이다. 승부세계에서 그렇게 묻힌 실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21로 A에 두기만 했어도 흑이 이겼다. 21이 6번째 실수이자 최후의 패착으로서 창호는 B의 마지막 큰 끝내기를 차지하여 기어이 반집을 이기게 된다.
<반집, 또 반집>
조치훈 9단으로선 기막힌 반집패였다. 그런데 왜 하필 반집일까. 실수가 많았으면 그 이상도 이길 수 있을텐데 왜 하필 반집일까. 패배한 쪽으로선 아예 많이 졌더라면 억울함도 덜 했을 것이다.
3국은 두달후 서울에서 두어졌는데 趙 9단은 이번에도 바둑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속 실수하여 또 반집을 지게 된다. 겉모습은 창호의 3대 0 완승. 그러나 내용은 거리가 멀다. 趙 9단은 이 패배를 도저히 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호는 이때의 얘기를 하면 "내가 세판 다 나빴는데요."하며 웃는다.
趙 9단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바둑은 분명 좋은데 왜 이겨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이 소년강자에겐 아주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을까. '반집'에 대해선 아마도 귀신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천하의 대 승부사 조치훈으로서도 이창호란 소년은 불가사의한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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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림맹주 현은 약관의 내제자 호에게 연전연패하는데..
일본의 무림맹주 훈이 현에게 농을 건넨다.
"어찌 스승이 제자에게 진단 말인가 ?"
"일단 겨루어 보게나."
훈은 호에게 일본을 제패한 절정무공을 시전하며 세번을 겨룬다.
훈의 공세는 천하를 뒤엎는 기세였고 호는 수세에 급급한듯 하였다.
그러나 세번의 대결은 모두 호의 승리였다.
"내가 더 좋았는데 어찌 졌단말인가?"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