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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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십년 뒤까지 기다릴 것 있나. 안병한도 설마 죽을 생각은 없을테고, 잠시 숨겨뒀다가 변성명하면 되지. 아들을 여기 맡긴다는 걸 보면 달리 갈 곳도 없구만. 슬쩍 너스레를 처본다.
ㅡ 개방이 사람 둘 숨기는 건 일도 아니오. 관상을 보아하니 도독은 구걸시키면 허탕만 치겠구려. 적당한 곳에서 지내게 해드리리다. 껄껄...
그러자 안병한은 만월개에게 정중히 절하고 말했다.
ㅡ 소장은 부족하나마 대명의 무장. 목숨 부지하겠다고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청 들어주신 것만으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저승에서라도 이 은덕은 꼭 갚겠습니다.
그리고 안국헌을 보며 말했다.
ㅡ 너마저 죽으면 우리 집안의 대가 끊어진다.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라. 네 어미와 누이도 찾아서는 아니된다. 아비의 명이다. 알겠느냐!
종으로 박힐 어머니와 누이를 찾다가는 동창의 눈에 띈다. 내가 금하지 않으면 아이는 어머니와 누이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고 그러면 모두 죽는다. 절대 잊지 말고 일러줘야 한다고 몇번이나 다짐했던 말을 끝내자, 말문이 막혀버렸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되자 필사적으로 수를 찾았고, 아내와 딸은 포기하고 아들 하나라도 개방에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이 받아들여지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개방에 접근할 지 궁리하느라 감정은 제 목소리를 낼 여지가 없었다. 이제 해야 할 모든 것을 끝내자, 안병한도 감정이 치받혀 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가족이 몰살 당하는데 홀로 남을 열살짜리 아들에게, 죽으러 가는 아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ㅡ 부디...자중자애하거라.
한마디 간신히 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니, 안국헌도 겨우 한마디하고는 눈물을 감추려 얼른 고개숙여 절을 올린다.
ㅡ 명심하겠습니다.
안병한은 아들이 일어나기 전,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ㅡ 허. 저런 사나이가 고자 놈들의 농간으로 죽는구나... 끌끌...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진화개, 들어와라. 장로님들도 들어오시구. 배사지례부터 올리고 길을 떠나야지. 거기 너, 열두세살 짜리 애들 열명만 데려오너라.
방주가 안병한을 만날 때 뒤꼍에 대기하고 있던 개방 최고의 고수 진화개가 들어왔다.
ㅡ 밖에서 다 들었지? 니가 얘 스승이다.
ㅡ 아따, 성님. 내가 이 나이에 애새끼를 가르...예, 알겠습니다.
거지 아이 열이 불려오자, 만월개는 엄숙하게 말했다.
ㅡ 너희들 모두 개방에 들어오고 싶다고?
거지가 개방의 제자로 일결을 받기는 쉽지 않다. 일결은 커녕 백의개도 하고 싶다고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어린 거지들은 백의개라도 되는 것이 꿈이었다. 무공을 펼쳐 하늘을 날고 아무리 사나운 개도 차버리는 고수. 저승사자 같은 하오문의 무리도 개방의 매듭 하나 보면 슬그머니 꼬리를 뺐다. 일결 제자도 우러러보는데, 들어본적도 없는 오결의 당주가 오더니 그 높으신 방주님께서 부르신다고 한 것이다.
ㅡ 예, 저희는 모두 개방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ㅡ 개방에 들어오면 개방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그럴 수 있겠느냐!
ㅡ 예! 저희는 모두 개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ㅡ 그래, 이 방주가 친히 너희에게 일결을 내리고 임무를 내리겠다. 할 수 있겠느냐!
ㅡ 예!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신나서 대답했다.
그렇게 장로들과 고수 몇이 아이 하나씩을 데리고 서둘러 떠나자, 진화개와 좌호법 취영개, 좌순단 차례였다. 6결 이하로 아이의 얼굴을 아는 모든 사람은 아이와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너무 많이 붙여서 눈에 띄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게 의표意表를 찌르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만월개는 엄숙하게 말했다.
ㅡ 너희들 구파일방이 왜 구파일방인지 생각해봤냐? 소림사도 '사'로 끝나지만 구파에 넣는다. 근데 개방은 '방'으로 끝나니까 못 넣겠대. 이게 말이 되냐! 우리가 제대로된 고수만 많았어도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개방에서 천하제일인 하나만 나와봐! 우리가 겪은 설움, 다 갚아줄 수 있다. 너희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죽어도 이 아이는 살려야 한다.
너희는 굶어도 이 아이는 고기반찬 먹여야 한다.
알겠느냐!
좌호법! 그럼 부탁드리겠소. 진화개! 너도.
뭔가 멋있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방주도 학식이 깊지 못해 그게 잘 안되었다. 일부러 목적지도 정해주지 않았다. 나야 분골착근이라도 견디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혹시 모르는 거 아닌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사석으로 던져 이대도강李代桃僵의 계책을 쓰는 건 사람 할 짓이 못된다. 그러나 아무도 방주를 말리지 않았다. 말리기는 커녕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이 서린 사람들이 한을 풀려들면 무서워지고 못하는 짓이 없다. 내 욕심 채우려 아이 하나를 죽이면 마교 같은 놈이지만, 모두를 위한 일이라면 열을 죽여도 욕 안먹는다. 안병한도 딸이 미워서 버린 것이 아니다. 안병한은 딸을 끔찍히도 아꼈지만, 집안의 대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가문과 방파를 위해 내가 죽는 것,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당연함은, 어쩌면 사람이 무리지어 사는 짐승이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열흘 뒤.
개방의 서안분타주 백훈개는 너럭바위 위에 누워있었다. '괜히 앉아 있다가 눈에나 띄지'라는 핑계로, 볕을 쬐며 졸고 있었다.
풀꾹 풀꾹 멀리서 뻐꾸기가 울었다.
ㅡ 아, 이런 &₩! 진짜 오네.
백훈개는 벌떡 일어났다. 팔척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 손도 컸고 여기저기 흉터와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말이 손이지 주먹을 쥐면 철퇴같았고 손날을 세우면 도끼같았다.
그냥 좀 넘어가나 싶었더니...왜 또 여기로 와. 투덜거리며 댓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백훈개가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거지 열댓이 일어났다. 모두 4결로 서안 거지들 가운데에서는 물고 뽑은 정예들이다. 잠시 뒤 산길 모퉁이를 돌아 베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걸어온다.
검을 차지 않았다. 허리띠를 보니 면검도 아니다. 수공을 익혔나? 손을 보니 닭 모가지도 비틀어 본 적 없을 고운 손. 아마 여름철 모기를 빼고는 뭘 죽여본 일은 없을 모양.
소매 속에 암기가 있겠군. 차륜진을 펼쳐라. 둥글게 둘러싸되 나무와 바위 뒤에 서. 만천화우라도 펼치지 않는한 두려울 건 없다.
그 사람이 멈춰서고, 백훈개는 씩 웃으며 한소리한다.
ㅡ 수염이 없구만. 변장이랍시고 농사꾼 옷을 입었는데 손이 곱고 신발이 가죽신이네?
ㅡ 하...앞의 변복이 무관복이라 이걸 신었었는데....서두르다가 깜빡했군. 다음부터 유념하지.
ㅡ 다음? 흐흐흐... 저승에서도 고자로 살게?
그러자 그 사람은 픽 웃으며 마치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슬쩍 두 팔을 벌렸다.
순간 백훈개는 뒤로 삼장을 빠지면서 7권拳을 때려박았다.
아무 소리도 없다! 무슨 톱밥더미에 주먹을 찔러넣은 기분.
백훈개가 숨을 몰아쉬며 신형을 바로 세우자, 허리께 위가 없어진 부하들이 모두 쓰러졌다. 옆의 바위와 나무들도 허리 높이 위로는 사라졌다.
이, 이건 뭐야...
십성 공력으로 7권을 몰아쳐 간신히 막았다. 소리도 없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 장력인지 권격인지도 모르겠다.
타구봉법이나 항룡십팔장과 같은 정종무공은 초기 성취가 느리다. 백훈개는 그걸 견뎌낼 끈기가 없었고, 손쉽게 실력이 쑥쑥 느는 맛에 철포삼과 흑살권을 익혔다. 타구봉법이나 항룡십팔장은 법개 쯤 나서서 한소리 해야 익히는 시늉만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큰 문제가 없었는데, 오늘 후회하게 된 것이다. 어려웠어도 항룡십팔장을 익혔으면 이렇게 무력하진 않을텐데...
ㅡ 쩝, 손맛 좀 보나 싶었더니... 덩치가 크고 철포삼에 흑살권이라...니가 여기 분타주냐?
ㅡ .....
ㅡ 하하, 굳은 입 여는데는 이게 최고지.
종환이 가볍게 손가락을 퉁기자 백훈개는 살짝 밟힌 지렁이처럼 몸부림을 쳤다. 철포삼이 깨져나가서 오른쪽 어깨가 흐물거리는데 뭘 어째야 할 지 알 수도 없어서 허둥거리다 간신히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았다. 백훈개가 정신 차릴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종환은 다시 물었다.
ㅡ 어디야?
ㅡ 무, 무슨 말씀입니까?
ㅡ 하하, 아직 정신 못 차렸고만.
ㅡ 아, 아닙니다. 뭘 물어보시는지 몰라서 그럽니다.
ㅡ 끌끌끌... 낙양분타주도 그러다 갔지.
ㅡ 낭리취개가요?
ㅡ 뭐야, 아직도 몰라? 하기사 내가 좀 빨리 움직이긴 했다만.... 너도 따라갈래?
ㅡ 아닙니다. 말씀만 하시면 바로 알아다 바치겠습니다.
ㅡ 하, 이놈 봐라. 그래도 잔머리 굴려?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퉁기고 종환은 돌아섰다. 백훈개는 진심이었지만, 개방 분타주의 충성심을 과대평가한 종환은 알아보지 못했다. 무형무성인의 극의를 깨달은 동창 제이의 고수였고 높은 사람의 눈치를 보는데도 그 못지 않은 고수였지만, 약자의 눈치는 살피지 않는 강직함 덕에 기회를 놓친 줄도 모르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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