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이야기.
오늘은 야곱 인생의 9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주제로 적는 “소설”입니다.
성경 세계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동감을 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땅 헤브론에서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남을 속이는 간사한 야곱이 아니고 진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땅에서의 생활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악한 라헬은 결국 슬퍼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라헬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냉정히 라헬을 잊었다고 생각하며 헤브론에서 새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야곱)은 여러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욱 사랑해서 그를 위해서 특별히 채색옷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앞전 세겜 사건때도 설명했듯이 야곱의 형제들의 우애는 일반적인 형제들의 우애보다 조금 더 강한 유대감이 있었습니다.
(마치 광신도들끼리의 유대감과 비슷합니다)
그 지나치게 강한 유대감은 =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덮어줬습니다.
반대로 자기들 편이 아닌 사람의 잘못은 더욱 오버해서 벌을 주려고 했습니다.
이런 형제들의 내로남불에 대한 예로
야곱의 큰아들 르우벤은 능력 있는 인물로써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장남이었습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라헬의 여종인 빌하 - 즉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와 잠자리를 가집니다.
집안의 장남이 아버지의 첩과 잠자리를 가졌고, 큰형님이 동생의 친어머니와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이것을 율법 상으로도 반드시 죽일 죄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것에 대해 침묵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추장이 자신들의 여동생 디나를 범하여 창녀처럼 대했다며 분노해 세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실제로 세겜 추장이 행한건 작은 잘못이고, 절대로 디나를 창녀처럼 대하지 않았으며 디나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율법 상 죽을만한 죄도 아닙니다.
하지만 야곱의 형제들은 이 세겜 추장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크게 보응했지만,
반대로 아버지의 처이자 형제들의 친어머니를 범한 큰형님 르우벤에게는 찍소리 안하고 형님 대접을 해줬습니다.
좋게 말하면 유대감이 그 정도로 강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저하게 자기편이 한 잘못은 눈감고 넘어가는 내로남불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형제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이 형제들의 강한 유대감은 -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았던 상처로 인해 강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특별히 사랑했고,
결정적으로 요셉은... 눈치 없이 지나치게 정직해서 형제들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야곱에게 고자질 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것과는 비교되는 장면입니다.
당연히 형제들은 요셉에게 “니가 뭔데 우리가 잘못했다고 뭐라 하는 거냐!!?“ 라며 요셉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요셉의 꿈 사건이 펼쳐집니다.
이건 나름 유명해서 간단히 그림과 함께 설명합니다.
첫 번째 꿈은 밭에서 형님들의 곡식 단이 내 곡식 단에게 절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꿈은 해, 달, 그리고 열한 별이 나에게 절했다는 것입니다.
해 = 아버지
달 = 어머니
열한 별 = 요셉을 제외한 11형제들
이렇게 모두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어째보면 그냥 웃어 넘길 수 있는 개꿈이라고 하겠지만
문제는 이때 요셉의 나이가 17살이라 이미 성인이나 마찬가지였고
농담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하는데 이때 이미 형제들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요셉을 시기하는 상황에서
요셉이 눈치 없게 이런 말을 했다는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역시나 이런 방면에서 쪼잔한 야곱은..
첫 번째 꿈 :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두 번째 꿈 : 막상 자기도 요셉에게 절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약간 열 받았는지 요셉을 살짝 꾸짖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야곱은 10명의 형님들의 권위를 요셉 앞에서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신의 권위가 위협받자 살짝 꾸짖은 게 정부입니다.
형제들은 이렇게 요셉만 편애하고 자기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 야곱에게 실망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요셉만 특별히 사랑한게 큰 잘못이었을까요?
흔희들 요셉이 나이가 어린 막내라서 사랑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때 요셉의 나이는 17살 - 사실상 성인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한 아들만 편애하는 것 - 어째보면 성경적이지 않고 진정한 부모로써 해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면 아버지로써 자녀들을 차별하며 사랑하는 것이 딱 봐도 좋아보이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차별의 사랑이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앙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창세기가 끝날 때 이 차별의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창세기의 주제이자 성경의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성경은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욱 사랑했다고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전에 설명했듯이 야곱의 새 이름이자 능력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앞으로 성경에서 야곱이라고 표현하면 이 때의 야곱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아직 육적인 상태의 야곱인것이고,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하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영적인 상태의 야곱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요셉을 더욱 사랑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을 사랑한 이유는 아마 그의 친엄마 - 라헬이 일찍 죽었지만 혼자서 정직하게 잘 크고 있는 모습이 기특해서 였을겁니다.
아시다시피 요셉의 형제들은 다들 친엄마가 있음에도 세겜 사건과 르우벤 사건에서 보듯이
큰 잘못을 밥 먹듯이 하며 아비의 속을 상하게 했지만, 정직한 요셉은 친엄마 없이도 야곱을 즐겁게 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보기에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아버지가 사랑하던 아내 - 라헬의 아들이고,
요셉이 그 라헬을 꼭 닮은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미움은 받는 이유는 자기들이 행한 잘못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가 자신들의 어머니 - 레아, 빌하, 실바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녀들의 자녀인 자신들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착각했습니다.
괜한 피해 의식입니다.
(이 역시도 사이비 광신도들에게 자주 보이는 현상입니다. 여러 방면에서 야곱의 아들들과 사이비 광신도들은 닮았습니다.)
결국 요셉을 제외한 10명의 형제들은 (베냐민은 어렸으니) 가출을 결심합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요셉을 포함한 11명의 아들들이 같이 양을 치러 가야하지만,
이들은 요셉을 왕따 시키고 자기들끼리 아버지의 양을 데리고 떠납니다.
아버지한테는 자기들은 [세겜]에 가서 양을 치고 있을거라고 통보만 하고 떠나버립니다.
이 세겜이 어떠한 곳입니까?
바로 얼마 전에 시므온과 레위가 사람들을 학살 했던 그 동네입니다.
근데 거기에 가서 양을 친다고요? 죽으려고 가는 겁니까??
[이스라엘]은 10명의 아들들이 매우 걱정되었습니다.
당장 그들을 찾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이스라엘은 에서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절고 있서 장거리를 가기 힘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요셉을 시켜 세겜에 가서 형제들이 잘 있는 확인해보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 이때의 이야기를 대충 보신 분들은 요셉과 베냐민의 이야기를 혼동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들만 양을 치며 일하고
요셉은 혼자 아버지 밑에서 재롱 부리며 놀던 것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닙니다.
분명히 요셉은 17살의 어른으로 평소 형님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형제들의 잘못을 보고 야곱에게 말할 수 있었고, 형님들의 곡식 단이 내 곡식 단에 절했다는 꿈도 가능한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10명의 형제들을 찾기 위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요셉을 과감히 세겜으로 보냅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10명의 형제들도 매우 사랑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가는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부모의 말에 순종해서 혼자 겁도 없이 그 먼 거리를 형님들을 찾으러 갑니다.
하지만 세겜에 도착해보니 형님들은 없었습니다.
부모의 명령은 세겜에 가서 형들을 찾아보라는 것이었으니,
요셉은 이제 헤브론으로 돌아가 야곱에게 형님들이 세겜에 없었다고 고하면 임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버지가 형님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겜에서 사람들에게 형님들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수소문을 합니다.
아마 매우 조심스럽게 수소문 해야 했을 것입니다.
무턱대고 나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고, 나는 야곱의 나머지 10명의 아들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간 세겜 사람들이 원수를 잊지 않고 요셉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요셉은 철저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 형제들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듣습니다.
알고 보니 형제들은 세겜에 있지 않고 그보다 더 위인 도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기어이 여기까지 가서 형제들을 찾아냅니다.
형제들은 최대한 아버지랑 헤어지기 위해 일부로 먼 곳 도단까지 도망 와서
자기들끼리 행복하게 양이나 치면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 징글징글한 요셉이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요셉이 멀리서 순진무구하게
“형님~~~ 나 요셉이 왔습니다~~~ 형님들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하면서 기뻐 손을 흔들며 오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보자 이런 생각만 들었습니다.
“저 꿈쟁이가 기어이 여기까지 왔네.
보나마나 여기 왔다가 아버지한테로 돌아가서 또 우리들 잘못을 고자질 할텐데... 이제 질렸다.”
그래서 요셉이 도착하자마자 요셉의 상징 - 야곱이 지어준 채색옷을 벗기고 요셉을 구덩이에 던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형제들의 의견은 갈립니다.
맏형 르우벤은 요셉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요셉을 구덩이에 몇일 동안 가두어 그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싶었습니다.
반대로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을 죽이고 아버지한테는
“요셉이 오다가 다른 짐승한테 잡아 먹혔나 보네요. 안타깝네요” 이렇게 변명하자고 합니다.
이렇게 결정을 못 내리는 동안 르우벤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가 다른 제의를 합니다.
그는 르우벤의 의견대로 굳이 살인을 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반대로 요셉을 이대로 풀어주는 것에도 반대하고 마침 옆에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데 이들한테 노예로 팔자고 건의합니다.
어차피 죽여 봤자 우리한테 이득 되는 것도 없는데 걍 돈이나 벌자는 현실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에 동의하고 맏형 르우벤이 없는 사이에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버립니다.
르우벤이 돌아와 보니 요셉이 없었고 이에 매우 당황합니다.
그는 분명 요셉을 살리려고 하는 선한 마음이 있었지만, 결국 그는 선한 마음보다는 형제들의 유대감을 선택합니다.
형제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요셉의 채색옷을 가져다가 짐승의 피를 묻히고,
아버지에게 돌아와 피 묻은 옷을 보여주면서 요셉의 옷이 맞는지 확인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야곱은 이성을 잃습니다.
야곱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라헬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봉인 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앞전에 봤듯이 라헬의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무리한 일정으로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결국 라헬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제 믿음의 조상 - 이스라엘로 살 결심을 했었기 때문에
라헬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않고 빨리 헤브론으로 들어갑니다.
이 모든 것은 야곱이 진정한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니까요.
요셉은 라헬을 꼭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 야곱은 요셉을 볼 때마다 라헬이 생각나서 특별히 아꼈습니다.
말로는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정직히 행동해서라고 했지만,
사실 요셉이 라헬의 남은 유산이었기에 알게 모르게 그에게 더 마음이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야곱의 우상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다른 형제들을 찾기 위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요셉을 과감히 내보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면 응당 그렇게 행동 했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그랬듯이 복을 내려 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셉이 죽어 돌아왔습니다...
야곱의 신앙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미쳐버립니다.
야곱은 몇일이나 자살 기도를 하면서까지 (성경에서 자살은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요셉을 그리워합니다.
야곱은
이제 이딴 신앙 생활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기껏 라헬을 잊고 하나님을 섬겼더니 지금 내 신세가 뭐란 말이냐~~?
난 차라리 지옥에 가서 요셉을 만날란다...
라는 고백을 하며 미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이 문제의 시발점인 10명의 형제들을 아들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의 아들은 마지막 라헬의 유산인 베냐민 밖에 없다고 믿으며
베냐민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편애합니다.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에게 인간적으로 집착했습니다.
미친 것은 야곱 뿐이 아니었습니다.
10명의 아들들이 보기에 야곱의 행동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들을 잃었으니 어느 정도 슬퍼할 것이라고는 충분히 예상했으나,
이정도로 요셉에 대한 사랑이 컸을 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10명의 아들들 중 한명이 죽었더라도 아버지가 이렇게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 하셨을까?
아니, 10명의 아들들이 모두 죽었더라도 아버지가 이렇게 슬퍼 하셨을까?
10명의 아들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 요셉은 10명의 아들들보다 더 큰 존재였다는 것을요.
10명의 아들들 - 그중에서 이 사건의 주동자였던 넷째 아들 유다는 특히 더 분노했습니다.
아버지가 되어서 자녀들을 차별되게 사랑하는 그 마음에 유다는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유다는 자신은 절대 아버지 같이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를 떠나 독립합니다.
창세기 37장은 요셉이 노예로 팔리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아시다 시피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이제 이집트에서의 성장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스토리는 38장이 아닌 39장에서 시작됩니다.
중간 38장은 바로 위에 말한 유다가 아버지를 떠나 어떻게 독립된 삶을 살았는지를 기록합니다.
아버지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던 넷째 아들 유다.
제가 단연코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분량이 많은 편인 창세기.
그 창세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고 결국 유다입니다.
창세기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결국 유다로부터 시작해서 유다로 끝납니다.
창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 요셉을 팔고,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떠난 유다의 삶.
창세기 38장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