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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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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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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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으로 간 장완은 당시 한중을 지키고 있던 왕평에게 대장군부(이후 대사마부)의 일을 처리하도록 합니다. 그 자신의 군사 경험이 일천하였기에 백전노장인 왕평에게 북벌 준비의 실무를 맡긴 것이죠. 또한 성도를 출발하면서 강유를 대동했는데, 대사마가 된 이후로 그를 사마(司馬)에 임명하고 병력을 맡겨 량주 지역을 몇 번이나 침범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평태수 요화를 보내어 공격을 가하는 등 위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 국지전을 벌입니다. 제갈량 사후 한동안 조용했던 두 나라 사이에 다시금 불꽃이 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지전이 본격적인 대규모 북벌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던 걸로 짐작되는데요. 우선은 북벌 준비의 가장 큰 계기였던 공손연의 반란이 너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사마의가 나서서 단 1년 만에 요동을 완벽하게 쓸어버리고 복귀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초에 조예가 젊은 나이로 급사했지만 위나라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또 촉한과 오나라 사이의 협력이 원활하지 않았던 문제도 있었습니다. 장완은 반드시 오나라와 연합작전을 펼쳐야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선에게 올린 표문을 보면, 오나라와 두세 번의 연합작전을 약속하였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오나라가 마냥 놀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241년에는 전종과 제갈각, 주연과 제갈근 등을 동원하여 위나라의 국경 여러 곳을 동시에 공격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러나 막상 이 때는 또 장완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 손발이 안 맞았던 거죠.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장완의 건강 문제였던 걸로 짐작됩니다. 장완에게는 본래부터 지병이 있었는데 북벌을 준비하면서 병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지요. 나라의 재상이자 북벌의 총책임자가 와병 중이다 보니 북벌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덧 장완이 한중에 주둔한 지도 무려 육 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성도에서는 상서령 비의가 내정을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의의 업무 처리 방식이 자못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갈량은 지독한 워커홀릭으로 그야말로 밤낮없이 일을 돌보며 아주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기울였습니다. 젊었던 시절에는 근무 중에 술을 마시고 사고를 쳤던 장완도 나이가 들어서는 꽤나 꼼꼼하게 일했던 걸로 짐작됩니다. 반면 비의는 성향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분명 업무시간인데도 종종 빈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팔자 좋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으며, 심지어는 바둑을 두고 잡기(雜技)를 즐기기도 했다 합니다. 주위에서 보면 대체 일은 언제 하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지요. 그러면서도 워낙 머리는 좋은지라 남들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른바 ‘똑게’, 즉 똑똑하고 게으른 상사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비의가 내정을 돌보는 동안 동윤은 유선의 곁에서 궁중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윤의 성향은 절친한 친구와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일이 생기면 그때그때 신속하게 대응했던 비의와는 달리 동윤은 항상 모든 사태에 미리 대비하려 했고, 대범하고 넉살 좋은 비의와는 달리 무척이나 꼼꼼하고 강직하여 그야말로 대쪽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바른말을 아끼지 않으니 유선마저도 그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했다 합니다.
예컨대 유선이 장성하면서 점차 여색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궁을 점점 더 늘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동윤이 나서서 예로부터 후궁을 열 두 명 이상 두는 건 옳지 않다 했으니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여 결국 유선의 뜻을 꺾었습니다. 또 환관 황호가 유선의 총애를 업고 은근슬쩍 멋대로 행동하려 하자 준엄하게 꾸짖어 혼쭐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윤의 생전에 황호는 감히 정사에 관여하지 못했고 지위도 보잘것없는 황문승(黃門丞)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네요. 과연 제갈량이 특별히 신뢰하려 유선의 곁에 두었던 인물답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상대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고 보완해 주었기에 촉한은 평화로웠습니다. 장완 또한 비의와 동윤이 나라를 지탱해 주고 있었기에 멀리 한중에 나와 있으면서도 근심을 덜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제갈량이 자신에게 후방을 맡기고 북벌에 나선 것처럼, 장완 또한 비의와 동윤에게 후방을 맡기고 북벌에 나설 계획이었을 겁니다. 하필 병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병마와 악전고투를 벌이면서도 장완은 위나라를 공격할 새로운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는 과거 제갈량이 다섯 차례나 출병했지만 항상 보급 문제 때문에 고통받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발상을 바꾸었습니다. 배를 잔뜩 만들어서 한중에서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 상용 방면을 습격하려 한 겁니다.
그러나 다른 대소 신료들은 모두 그 계책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강을 따라 내려가는 건 쉽지만 올라오는 건 어려우니, 자칫 잘못하면 병사들이 퇴각하지 못하고 전멸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유선은 그런 신하들의 논의를 전달하고자 장완에게 사람을 파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의가 강유와 함께 직접 한중까지 갔습니다. 아마도 당대 촉한을 이끌어가고 있다 할 만한 장완과 비의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직접 의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으로 짐작됩니다.
장완은 그들을 만나서 앞으로의 계책을 논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린 후 정리하여 유선에게 표문을 올립니다.
[신이 비의 등과 이렇게 상의하였습니다. 량주는 이민족들이 거주하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진퇴(進退)의 거점으로 삼을 만하기에 적들이 아끼는 곳입니다. 그런데 량주에 사는 강족 등은 우리 촉한을 여전히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고 있으며, 또 우리 병사들이 위나라의 곽회를 패주시킨 적도 있습니다. 이에 여러 상황을 헤아려 보면 량주를 점령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응당 강유를 량주자사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강유가 출정하여 하서 일대에서 적과 대치한다면 신은 본대를 이끌고 강유를 뒷받침하겠습니다. 부현은 사방으로 길이 나 있어 유사시에 군대를 움직이기 편한 곳이니 이곳에 주둔한다면 동북쪽에서 변란이 생기더라도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촉서 장완전]]
유선의 허락이 떨어지자 장완은 한중을 왕평에게 맡겨 두고 자신은 부현으로 옮겨 주둔합니다. 이게 243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부현으로 이동한 후에도 장완의 병은 여전히 낫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장완은 자신의 역할을 후임에게 넘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243년 11월, 상서령 비의는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에 오릅니다. 대사마(大司馬) 장완이 병으로 누운 상황에서 비의는 실질적으로 촉한의 신하들 중 가장 높은 자가 되어 군사와 내정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44년, 촉한에 크나큰 위기가 닥쳐오면서 비의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