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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11/23 23:45:15
Name 잊혀진영혼
Subject [일반] [책추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 횡단기 (21세기북스)

성년이 되자마자 따분한 대평원에서 시끌벅적 런던으로 튀어버린 작가 빌 브라이슨은 15년이 지난 즈음 고향 아이오와주 디모인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20년 간의 추억을 되살리며, 여름마다 떠났던 가족여행의 길을 더듬으며 아버지의 낡은 똥차를 몰고 미국 횡단을 떠납니다.

우리가 흔히 봐왔고 상상했던 동부와 서부의 대도시가 아닌 중서부와 남부 위주로 진행되는 미국 횡단길은 기본적으로 지루함만이 가득합니다.
이 지루한 여정 속에서 작가의 목표는 어린 시절 TV에서 봐왔던 그런 이상적인 카운티를 찾는 것입니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 4인의 행복한 백인 중산층 가정이 분수대 앞 광장을 지나가며 거리엔 밝은 미소의 신문 배달부가 빵모자를 쓰고 인사를 건네며, 노인은 안락의자에서 고양이를 품고 꾸벅꾸벅 조는 그런 풍경 말입니다.

이런 추억과 고향 미국의 이상향을 찾으려고 나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화된 미국인인 작가입니다.
동서고금 다시 없는 풍요와 번영 속에 자라온 작가가 다시 찾은 80년대 미국은 바로 작가 또래의 베이비부머들이 사회의 주축이 된 곳,
어린 시절 혹독한 대공황을 겪은 부모님 세대가 이끌던 6,70년대와는 다른 미국입니다.

좀 더 삭막해지고, 좀 더 뚱뚱해지고, 좀 더 정신없어졌습니다.
광고는 환각제를 맞은 듯 정신 없으며, 사람이 빠져버린 빈 카운티와 도로는 진정제를 맞은 냥 정적입니다.
그리고 방부제를 잔뜩 쳐 비정상적으로 멀끔한 상품들. 속칭 약 빤듯한 80년대 미국이 날 것으로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유쾌합니다. 재밌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터지는 미국식 조크와 적절한 번역이 맛을 살려줍니다.

몇 줄 뽑아보겠습니다. 참 좋아하는 작가의 참 좋아하는 책인데,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여전히 재밌어서 추천합니다!

[나는 가방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다음 텔레비전을 켜봤다. TV를 켜자마자 치질 연고인 푸레파레숀 H 광고가 나왔다.
다급한 톤이었다. 광고 문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랬다. "이봐 당신! 치질 있지? 그럼 푸레파레숀 H를 발라봐! 명령이야! 이 주의력 결핍 등신하곤, 이름 꼭 기억해 둬! 푸레파레숀 H라고! 치질 없다고? 그래도 사놔! 혹시 모르니까!" 그러곤 검은 화면에 목소리만 잽싸게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신제품 체리 맛도 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여행 중에]


[<플레이보이>는 우리 세대에게는 형과 같았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면서 세상 모든 형들이 그렇듯 <플레이보이>도 변해갔다. 두어 차례 경제적인 위기와 약간의 도박 문제가 있었고, 마지막엔 결국 서부 해안으로 이사를 나갔다. 진짜 형들이 그러듯이. 그리고 우리는 연락이 끊겼다. 몇 년이나 그에 대해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곳 미시시피 주 옥스포드에서 내가 바로 그 <플레이보이>를 만나지 않았는가.
-미시시피주 여행 중에]


[또한 백인들이 가난하게 사는 걸 보는 기분도 이상했다. 미국에서 백인이면서 가난하기란 진짜 힘든 일이다. 물론 여기서 가난이란 미국인의 가난이며 백인들의 가난이니 다른 곳의 가난과는 다르다. 터스키지의 가난과는 비슷하지도 않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64년에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 초점이 애팔래치아였던 것도 이곳이 너무 가난해서가 아니라 너무 백인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냉소 섞인 지적도 있었다.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당시의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 중 40퍼센트는 차가 있고, 그 가운데 3분의 1은 새 차였다. 1964년이면 잉글랜드에 살던 내 미래의 장인에겐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아직도 첫 차 장만이 요원한 일이었고, 장인은 지금까지도 새 차는 한번도 사본적이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가난하다고 하거나 크리스마스에 뜨개실이나 공짜 밀가루를 보내준 일은 없다.

그렇다 해도 미국의 기준으로 볼 때 지금 내 주변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판잣집들이 단연코 허름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마당에 위성 안테나도 웨버 바비큐 그릴도 없고, 진입로에 스테이션왜건도 없었다. 감히 말하지만 가련한 그들의 부엌에는 전자레인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미국인 기준으로는 대단히 가난한 것이다.-테네시 주 애팔레치아 산맥 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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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니까 로아 대기가 끝났군요. 그런데 12시 다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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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세요
18/11/24 00:01
수정 아이콘
여름, 1972 미국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도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리벤트로프
18/11/24 01:11
수정 아이콘
교양작가의 모범
18/11/24 01:12
수정 아이콘
이 작가 재밌죠...!
세인트루이스
18/11/24 03:52
수정 아이콘
미국이 워낙 넓기도 하지만, 동/서부랑 중부의 발전 정도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이게 정말 같은 나라인가 싶죠...
빌 브라이슨 유럽 여행기도 재밌게 읽었네요 크
닭장군
18/11/24 04:10
수정 아이콘
미국 환단고기인줄
18/11/24 08:42
수정 아이콘
번역된 책이 여러권 있는데 특유의 "깐죽"대는 브라이슨의 문체가 잘 번역한 것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성석제가 조금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그의 특징을 요약하면

- 일상적이며 다양한 소재
- 가볍고 유괘한 해석 (이문열류와 같이, 준엄하게 뭔가를 남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 점이 제일 좋습니다.)
- 깊고 화려한 역사적 지식 (성석제에게서는 볼 수 없는 면.)

저도 이런 책은 한번 쓰고 싶습니다.
제목: < 룸싸롱 잠입 탐방기 >
사업드래군
18/11/24 10:04
수정 아이콘
이 사람 책은 발칙한 유럽여행기가 대박이죠. 보다가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영국여행긴가? 그건 좀 별로 재미가 없어서 읽다 그만둠.
잊혀진영혼
18/11/24 11:11
수정 아이콘
유럽여행기도 재밌죠! 미국횡단기, 유럽산책, 나를 부르는 숲, 거의 모든것의 역사가 저는 제일 맞더라구요.
모든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요.
Zoya Yaschenko
18/11/24 11:31
수정 아이콘
심지어 지금도 팔리는 푸레파라숀H..
18/11/24 13:38
수정 아이콘
이 사람 책은 '나를 부르는 숲'이 최고죠. 교양서적을 대굴대굴 구를 정도로 웃으며 보기는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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