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보기
https://pgr21.co.kr/?b=8&n=75242 작전과 작전 사이 (0) - 프롤로그
李代桃畺
적전계(敵戰計 - 적과 아군의 세력이 엇비슷할 때 쓰는 계략) 제5. 병법36계 제11.
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 대신에 쓰러진다.
작은 손실은 내주고 큰 승리를 노려라.
오늘 이야기할 것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복습입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끝나는 12월 5일에도 모스크바에서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이걸 잘라서 이야기하기도 뭣하더군요. 12월 5일까지 소련군과 독일군이 어떻게 싸웠으며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짚어봐야 향후 모스크바 전투가 뭔 이야기가 되건 말건 할 테니까요.
라스푸티차의 계절이 오고 슬슬 레닌그라드 함락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는 그냥 포위하는 것으로 끝내고 기갑 부대를 중부 집단군으로 돌려서 중부의 티모셴코를 박살내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열어버리는 작전, 일명 태풍 작전(Operation Typhoon)을 입안합니다. 마침 남쪽에서의 키예프도 점령하면서 어마어마한 적군을 섬멸했겠다, 우크라이나 방어선에 구멍이 그냥 뻥 뚫렸겠다... 제1기갑집단 정도만으로도 손쉽게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고 목표인 하리코프를 석권할 수 있으리라 보고 키예프 포위망에 동원된 제2기갑군을 다시 중부 집단군으로 배치시켰죠. 그렇게 세 개의 주먹이 준비됩니다.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 호트의 제3기갑집단(10/5 라인하르트로 교체), 회프너의 제4기갑집단. 이 중 제4기갑집단은 북부 집단군으로부터 차출되어 배속되었는데, 이 차출된 부대가 가운데의 주먹이자 주력부대(Schwerpunkt)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집결된 독일군의 병력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에 준하는 병력이었는데, 병력이 약 2백만, 사단 78개, 포문 1만 4천 대, 전차 1천 대, 그리고 항공기 약 1천 4백 대가 동원된 대부대였죠.
한편 소련군은 그동안 하도 두들겨맞은데다가 스탈린의 어이없는 명령 - 바로 사지인 키예프로 계속해서 방어선을 지킬 병력을 꾸역꾸역 들여보냈다가 모조리 섬멸당하고 포위되어 포로로 잡힌 것을 말합니다 - 으로 인해서 전 전선에 걸쳐서 방어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소련군도 나름 현명했습니다. 소련군은 가만히 앉아서 개죽음을 당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독일군의 발목을 잡는데 주력한 것이죠. 이전에 제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재하면서 므첸스크에서의 카투코프와 렐류셴코 콤비를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들도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 다시 언급해 드리면, 가짜 부대를 동원하여 진지에 포격을 가하도록 한 차례 발을 묶고, 위협이 사라진 것으로 판단한 독일군이 진격해 올 때 옆구리를 기습하여 박살냅니다. 그리고 적당히 전과를 올린 직후 군사를 뒤로 물려서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련군은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태풍 작전 개시 당시 소련군의 총 병력은 독일군의 60% 정도인 125만 명. 사단은 95개였습니다만, 이는 바꿔 말하면 그만큼 제대로 충원된 병력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 방향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한 전 전선에 걸쳐서 병력을 얇게 펴는 것을 강요당하는 입장이었다는 거죠. 소련군의 첩보 부대는 이 때에는 단지 평균적인 수완만 발휘했을 뿐이어서, 적군이 스몰렌스크-모스크바 측선을 따라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상당수의 사단과 기계화부대를 르제프 - 뱌지마 - 키로프 측선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은 세 측면에서 일제히 진격을 개시했으니 이야말로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격이 되고 말았죠.
이렇게 말입니다.
뱌지마, 10월 2일. 가뜩이나 이렇게 양쪽에서 집게발로 공격해 오는 것도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브랸스크, 10월 3일. 아래쪽이 상대적으로 허술함을 눈치채고 "빈틈!"을 외치며 구데리안이 남쪽에서 육박해 들어온 겁니다. 이것 때문에 소련군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죠. 남쪽의 구데리안을 박으러 병력을 뺐는데, 북쪽에서 전차 3백 대를 동원한 볼딘의 반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또다시 거대한 가마솥(Kessel, 포위망)이 완성되어 버리면서 또다시 엄청난 피해가 나 버린 것이죠. 아까 125만 명의 병력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 중 33만 2천 명이 사망하고 66만 8천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살아서 탈출한 것은 겨우 10만. 반면 독일군의 피해는 4만 8천 명. 무려 20대 1에 가까운 압도적인 교환비를 내고 말았습니다. 키예프에서 이미 엇비슷한 수의 병력을 잃었으니, 9월과 10월 동안 50만 명의 소련군이 전사하고 13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포로로 잡힌 것이죠. 참고로 우리 국군의 총 병력이 - 창원 등지의 후방사단까지 다 포함해서 - 닥닥 긁어모아 60만 명입니다. 거의 그만큼이 죽었고, 그 두 배에 달하는 수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실로 끔찍한 피해를 입었죠. 어차피 이 때까지 재앙의 연속이긴 했습니다만 뱌지마 측선에서의 전투도 여지없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눈치를 챘는지 어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렇게 엄청난 피를 뿌려 가면서 최대한 발목을 붙잡고 진격을 늦추려고 애쓰는 방향성 그 자체는 정확했습니다. 비록 숙련도에서 상대가 안 되었던데다가 계속된 전투로 엄청난 손실을 보면서 약체화된 소련군이라 그렇게 반격이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만... 독일군은 공세 개시 불과 48시간 만에 보급 문제로 인해 심각하게 진격이 느려졌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포위망을 섬멸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죠. 키예프에서도 이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날려먹었는데, 뱌지마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이런 개활지 내지는 중규모의 도시(솔직히 키예프는 좀 많이 큽니다만)를 접수하는 것에도 심각한 피해와 시간이 소요될 판인데, 거대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백병전으로 접수한다? 독일군으로서는 절대로 어림없는 일이었죠. 그래서 이미 10월 7일에 히틀러는 시가전을 아예 금지해 버립니다. (이랬던 양반이 왜 1년 후에는...) 이는 필연적으로 독일군이 대도시를 빙 우회하여 크게 포위하는 전략을 수립하도록 했죠. 역시 전술적 내지 작전술적인 성공이 전략적인 성공에 앞섰던 것입니다.
자, 여기서가 문제입니다. 일단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병력이 많았습니다. 이거 절대로 거꾸로 쓴 거 아닙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엄청난 병력의 공백이 발생하면서 제한된 시/공간에서 독일군이 수적으로 우세를 점한 것이죠. 그러니 소련군은 병력을 어떻게든 긁어모아야 하는데, 대체 어디에서 병력을 끌고 온단 말입니까? 여기에서 소련의 위대한 영웅,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가 한 통의 전문을 보내옵니다. 가히 역사를 바꾼 전문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일본이 연해주를 침략할 의사는 없는 것 같음."
이 한 통의 전보 덕분에 소련군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의 관동군이 극동군의 3배나 됨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빼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렇고, 11월이 되어 라스푸티차가 끝나고 날이 추워지며 대지가 얼어 길이 열리면서 독일군의 진격이 다시 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모스크바의 관문(뱌지마)이 날아가버리자 이제 모스크바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고, 이를 막기 위한 구원투수로 주코프가 등판합니다. 주코프는 과연 최고의 사령관다웠죠. 그는 즉시 수도가 심각한 위협에 빠졌음을 직시하고, 얇은 방어선으로 손쉽게 격파당하게 두느니 수도 근처로 적이 몰려올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확실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죠. 다만 모든 것이 주코프의 계산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 주코프가 생각했던 것은 모스크바 북서쪽 약 60 km 정도 되는 모스크바 해(Moscow Sea, 공식 명칭은 이반코보 호(Ivankovo)입니다) 및 그 지류에서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적을 막으려고 했는데... 아래 지도처럼 말이죠.
이게 초기 배치였고 수도 외곽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어야 하는데... 소련군 제30군이 박살나면서, 그야말로 모스크바 코앞에 독일군이 진격해 들어옵니다. 전쟁이 무슨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수도 코앞까지 독일군이 진격해 오는 사태에서 주코프가 얼마나 긴장했을지는 뭐 두말하면 잔소리였겠죠.
한편으로 구데리안의 진격(위 지도 남쪽의 화살표)은 이 때까지는 그런대로 상당히 순조로웠는데, 그건 10월 말까지의 이야기고, 툴라 인근으로 갈수록 구데리안은 더욱 지독한 소련군의 반격과 맞서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지독한 보급 문제로 골머리를 썩혀야 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카투코프-렐류셴코 콤비도 바로 이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죠.
앞서 히틀러가 시가전으로 병력을 밀어넣는 것을 금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놓고 빙 둘러서 포위망을 만들어 공략해 나가야 했는데, 이를 위하여 반드시 점령해야 할 필수적인 도시이자 중요 철도 결절점이 바로 툴라였습니다. 구데리안이 여기를 점령하기 위해서 애쓴 건 이런 이유였죠. 더구나 주코프로서도 툴라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개활지인 모스크바 남쪽의 최종 방어선이 바로 툴라였습니다. 공업지대고 인구고 규모고 자시고 툴라를 사수해야 할 이유는 굉장히 많았던 셈이죠. 한편으로 툴라에서 알아서 적을 빼게 만들기 위해 일부 구데리안의 병력이 툴라를 우회하여 모스크바로 가는 중요 길목인 카시라(Kashira)로 보냈는데, 주코프 역시 이를 눈치채고 급하게 기병부대를 카시라로 파견했고, 이 시간 싸움에서 주코프가 승리하면서 구데리안은 결국 실패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지독한 보급난으로 인한 얼마 안 되는 자원을 바로 이 교두보 확보에 몰빵하는 게 구데리안으로서는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로버트 커추벨(Robert Kirchubel) 미군 예비역 중령은 그의 저서 《Atlas of the Eastern Front 1941~1945》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하여간 12월 3일에 개시된 클루게의 공격마저 주코프에게 막히면서, 모스크바를 빙 돌아 양익 포위를 한다는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12월 5일이 되자 바르바로사 작전은 끝났습니다. 11월 1일까지 동원된 양측의 병력은 각각 독일군 270만 명, 소련군 220만 명. 단, 사단 수는 독일군이 136개, 소련군이 269개(+ 여단 65개)였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만큼 소련군의 병력이 심각하게 갈려나갔다는 이야기죠.
12월 5일까지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제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갈 준비가 되었군요.
P.S 제가 글 수정(퇴고, 태그 수정 등)이 상당히 잦은 편입니다. 앞으로 연재할 글 내내 (수정됨)을 달고 다니게 생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