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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1/13 19:46:10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너의 결혼, 나의 입대.
너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고등학교 시절이다.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지내던 나는, 국적에서 비롯된 특별대우가 싫었다. 누군가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춘기를 보냈다면, 난 평범해지고 싶은 사춘기를 보냈다.

"너 한국말 잘해?" "한국말 좀 해봐!"

늘상 누군가와의 첫만남은 이렇게 시작되곤 했다. 나의 이름은 "한국인"이었다. 나도 모르지만 다들 나를 그렇게 불러줘서 끝내 그런가보다 하고 순응하게 되었다. 나에 대한 호기심은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나라는 사람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뭐 그래도 딱히 따돌림을 당한 것은 아니였기에, 외톨이가 되는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에, 그 생활에 큰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안녕?"

방과 후 집에 와서 메신저를 켜고, 하염없이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던 중, 낮선 이로부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으로 화답한 나는, 그렇게 시작된 대화를 한참 이어갔다. 너무나도 평범한 대화였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처음 말하는 누군가와의 평범한 대화. 마음이 시켰을까, 그 뒤로는 방과 후 메신저를 켜는게 일상이 되었다. 그 때부터 미래의 결과가 예견되어 있었다면 그건 조금 가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때 만큼은 진심으로 행복했던 것 같다. 그 행복이 얼마 못가, 너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겨버렸고, 넌 나의 고백을 작별인사로 받아버렸지만.

질긴 인연은 가연(佳緣)만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렇게 너와 난 어쩌다보니 같은 대학교로 가게 되었고, 대학에서조차 같은 무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과거가 남긴 어색함을 깨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대학생활 2년만에 난 너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난 나름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그렇게 한참을 갈등하다 난 미련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우리는 졸업을 맞이했고, 친구들과 함께 떠난 졸업여행에서, 난 너와 내 친구가 사귀게 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졸업하여 생업을 시작해 직장을 다닌 지 4년이 흐르고, 너를 처음 만난 것으로부터 10년, 군 문제로 해외체류를 더이상 계속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귀국날짜를 잡고 외국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한 얼마 후, 나에게 페북 메시지 한통이 도착했다.

"안녕?"

난 너의 결혼소식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안녕이 무엇을 위한 안녕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한가한 일정을 물어볼 뿐, 결혼한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않았다. 대놓고 청첩장을 보내지 않은 것은, 나를 위한 최후의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귀국 직전이라 바쁠 것 같아. 뭐 그래도 꼭 행복해라."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비로소, 첫사랑에 마침표를 찍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미련은 진작에 버렸지만, 그래도 이제서야 완벽하게 정리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오고 시간이 한달 남짓 흘렀다. 앞으로 2년쯤을 더 보내고 나면 난 서른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시간 참 빠르다 느끼면서도, 다가올 군생활을 생각하자니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누군가는 새로운 삶의 단계로 넘어가는데, 난 아직도 출발선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zlCTpZL.jpg

누구는 이른 늦봄에 가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여름에 갈 때,
봉오리 속 묵묵히 제 때를 기다리다,
어느새 밖엔 가을이 한창이다.

장미는 여름이라지만,
늦가을 찬바람 속,
뒤늦게 꽃피우는 장미도 있다.

내가 늦은걸까,
평범한 여름 개화를 바란게,
그리 큰 욕심이었을까.

그 어떤 걱정도 잠시,
옆 자리 단풍보다도 붉고,
그 어떤 가을꽃보다도 화사하게,
자신의 때에 만개하는 모습을 보니,

가을의 주인공이 따로 없다.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가을장미 몇 송이가, 조금은 희망이 되어서 다행이다.




*추신: 군입대가 이렇게 늦게까지 미뤄진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는데, 사정을 서술하다보면 글의 흐름을 끊을 것 같아서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면 댓글에서 조금씩 썰을 풀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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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ecial One
17/11/13 19:52
수정 아이콘
군대 금방 갈겁니다. 건강하시길..
스타슈터
17/11/13 19:56
수정 아이콘
진심으로 금방 갔으면 좋겠습니다. 흐흐;;
감사합니다!
소린이
17/11/13 20:26
수정 아이콘
몸 건강 마음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힘내세요.
스타슈터
17/11/13 20:3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꼭 건강했으면 좋겠네요!
혜우-惠雨
17/11/13 20:29
수정 아이콘
꼭꼭 몸 건강히 다녀오시구요!!! 어여쁜 인연을 다시 만나시길!!!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위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스타슈터
17/11/13 20:32
수정 아이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자는 30대가 전성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크크;;
두지모
17/11/13 20:34
수정 아이콘
저도 군대 늦게갔습니다. 27살에 갔었네요.
군대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나이는 잊고 생활하시는게 편할거에요.
시간은 무진장 안갔지만 그날이 오긴 하더라고요.
스타슈터
17/11/13 21:16
수정 아이콘
저는 입대할때가 내년 초면 29일것 같네요... 하하 ㅠㅠ
외국생활 오래해서 나이생각은 그리 많이 안하는 편입니다. 언젠간 끝나겠죠. 크크
유지애
17/11/13 21:18
수정 아이콘
저는 25에 갔고 외국 생활하다 가서 나이 생각은 별로 안 나더라고요.
그냥 다른 사람도 나만큼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조급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불의를 못참는 성격 때문에 영창은 몇 명 보냈네요. 그냥 좀 더 유순하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듭니다.
유지애
17/11/13 20:37
수정 아이콘
윤종신 오래전 그날이 생각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aqxiVEjOlak
스타슈터
17/11/13 21:16
수정 아이콘
저도 참 좋아하던 곡입니다..흐흐
이과감성
17/11/13 20:59
수정 아이콘
시 좋네요...
스타슈터
17/11/13 21:17
수정 아이콘
시를 주로 쓰지는 않다보니 미숙한데 칭찬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Bluelight
17/11/13 22:05
수정 아이콘
시 진짜좋네요...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과 시를 떼 놓을 순 없나봅니다.
스타슈터
17/11/13 22:08
수정 아이콘
여러 복잡한 감정이 들면서 길을 지나다 장미를 보고 문득 떠오른 글귀입니다...흐흐;;
그래서 약간은 우울한 때에 좋은 글이 많이 나오는것도 같더라구요..
Multivitamin
17/11/13 22:10
수정 아이콘
시 본인이 쓰셨던 거군요. 잘 보고 갑니다.
오히모히
17/11/14 11:56
수정 아이콘
시 참 좋습니다. 직접 쓰신거라니 놀랍습니다. 부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길.
블루시안
17/11/14 13:30
수정 아이콘
항상 재미있는 글 잘 읽고 있는데 내년이면 한동안 못 본다니ㅠㅠ
조심히 다녀오시길!
스타슈터
17/11/14 14:25
수정 아이콘
댓글활동은 예전같이 못하겠지만 글은 수필로 써뒀다가 휴가나올때 하나씩 올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흐흐;
부디 마음 먹은것같이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블루시안
17/11/16 11:33
수정 아이콘
저야 좋죠 히히히
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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