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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9/29 19:36:21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천하무적의 군인 황제, 혹은 옥좌에 앉은 광대-후당 장종 이존욱 (수정됨)



기나긴 중국의 역사에서 존재하던 수많은 왕조들의 흥망성쇄를, 일반적인 시대구분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은주 삼대 - 춘추전국시대 - 진한시대 - 위진남북조시대 - 수당시대 - 오대십국시대 - 송나라시대와 정복왕조인 요금의 대두 - 원나라 - 명나라 - 청나라 - 중화민국- 현 중화인민공화국...



물론 여기서도 세세하게 나누면 거의 신화에 가까운 하나라 대와 주나라가 다르고, 전한과 후한이 다르고 위진남북조도 남조와 북조가 다르고 오호십육국이 발흥하던 시대와 북제와 북주로 나뉘던 떄가 다르고 송나라도 북송이 다르고 남송이 다르고 등등 끝이 없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구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덩어리도 크고, 좋건 나쁘건 주변국가에 지난 세월동안 워낙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나라이기도 해서 그런 중국사의 대략적인 역사는 상당히 네임맬류가 있는 편인데.... 게중에서도 인지도가 바닥에 가까운 시대가 있습니다. 바로 '오대십국' 시대 입니다.



오대 십국은 중세의 대제국이었던 당나라가 멸망하는 와중, 각지에서 난립한 절도사들이 세력화 하여 국가까지 건설하여 쟁패하던 시대입니다. 이 시기 중원에서는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에 이르는 다섯 나라가 이어졌고, 주로 강남을 기점으로 한 지역에서는 '10국' 이라 불리는 여타 소국들이 자발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문화적으로 보면 이 10국의 성립과 송나라 시기를 거치며 중국 강남이 크게 개발된 시기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오대십국 시대 자체가 워낙 짦은 시대이기도 하고, 이미 당나라 중기부터 난립하던 절도사들의 폭주가 극에 달했다는 점에서 그냥 싸그리 '당 말의 혼란' 으로 묶이는 풍조도 있고 해서 여러모로 언급이 많지 못합니다. 자연히 오대 십국 시대 주요 인물들에 대한 인지도도 그리 많지 못하구요.



오대 십국 시대에서 그래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면 당나라를 무너뜨린 머슴 출신 황제-후량의 주전충, 오대십국시대 후반부에 통일전쟁을 개시한 후주의 세종 시영, 오대에 걸치는 혼란기를 관통하며 관직생활을 한 처세술의 달인 대신 풍도와 같은 이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대의 역사, 특히 전반기의 역사를 서술할때 절대 뺴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후당' 의 '장종', 이존욱이라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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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욱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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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에서 우연히 본 이존욱 팬(?)아트





이존욱이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선, 우선 이존욱이 대두하게 된 상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당나라가 무너지며 수 많은 군웅들이 난립을 했고, 게중에서 가장 먼저-그리고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사람은 바로 머슴 출신 황제, 주전충이었습니다. '후량'의 개국 군주가 된 주전충은 중원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큰 세력을 갖추었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여타 군웅들을 힘으로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주전충의 가장 유력한 적수는 바로 '이극용' 이라는 인물입니다. 이극용은 독안룡(獨眼龍), 즉 애꾸눈 용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인물이었는데, 그 말마따나 한쪽 눈에 장애가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나라 말기 소수민족이었던 사타 튀르크 족의 족장으로, 그 휘하에는 무시무시한 튀르크 군단이 대거 포진해 있던 막강한 군벌이었고 휘하에는 용장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 을 진압하는 1등 공신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런 막강한 면모와는 별개로, 대국을 보는 면에서 이극용은 주전충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특히 '술버릇' 이 좋지 못한 것도 약점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극용의 세력 '진나라' 는 점차 후량에게 밀리는 양상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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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용 사망 직전 판도.



주전충의 후량은 황하 중 -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약 70여주. 실질적으로 옛 당나라 제국의 4분의 1가량을 가지고 있는 큰 나라였습니다. 중원의 알짜 땅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후량이었고, 또 폭군이지만 의외로 내정가였던 주전충에 의해 농사가 강조되어 제법 탄탄한 저력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점점 진나라는 밀리고 있었고, 급기야 후량과 진나라 사이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노주' 가 후량군에게 포위 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 포위가 지속되는 와중, 이극용은 사망합니다. 그 뒤를 이은 이존욱은 즉위하자마자 자국 내에 물밑듯이 밀려온 적군을 몰아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



문제는 막 즉위한 군주, 이존욱의 적이 눈 앞의 후량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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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뒤통수를 근질근질하게 건드리는 후방의 연나라.





진의 바로 앞에 있는 중원에 후량이라는 대적이 있다면, 그 후방에는 유인공, 유수광 부자라는 군웅의 세력지였던 연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나라와 진나라의 외교 관계는 가히 최악이었습니다. 그 아비인 유인공 시절부터 이극용과 분쟁이 잦았던 세력이었고, 그 아들인 유수광이 내전 끝에 형제와 부친을 쳐부수고 연나라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유수광 역시 진에 대해서는 호전적이고 적대적인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연나라의 세력은 유수광이 (허세를 섞어서) 말하길 사방 2천리에 대갑(帶甲)이 30만에 이르는 수준으로,  그건 과장이긴 했지만 실제로도 수만 병력 정도는 우습게 동원하며 상당한 수준의 기병전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연나라의 세력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위협적이었지만, "남쪽의 후량과 전쟁을 하고 있는" 진나라의 입장에서는 이중전선이라는 요소 때문에 더욱 부담스러웠습니다. 삼국지로 치자면 원소가 아직 공손찬을 때려눕히지도 못했는데 중원의 조조가 북벌한다고 올라오는 셈입니다. 그나마 연나라가 자신들 후방의 거란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게 위안거리였지만...



문제는, 거란은 진나라와도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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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북방, 거란의 세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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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영웅, 요태조 야율아보기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거치며 북방에 대한 중원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던 때, 거란은 당대의 준걸이었던 '야율아보기'의 손에 의해 통합되어 상당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시각각 남하할 기회만 엿보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거란의 전력은 휘하 병력이 30만을 일컫을 수준으로, 실제로도 수만 병력 정도는 어렵지 않게 동원했습니다. 또한 이 거란 역시 진나라와 원한이 깊었습니다. 이존욱의 아버지 이극용은 야율아보기를 초청해 "우리 같이 힘을 모아 주전충을 치자." 고 약조한 적이 있었고, 이때 신하들이 "저들을 믿을 수 없으니 이 기회를 틈타 야율아보기를 사로잡아 협박해야 한다." 고 요청했지만 "신의를 어기면 되겠는가." 하고 거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놓아준 야율아보기는 돌아가자마자 뒤통수를 쳐서 이극용을 분노케 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중전선도 아니고 무려 삼중전선이 형성된 상태에, 좀 준비할 시간을 주는것도 아니고 국경의 핵심 요새가 적에게 매섭게 공격을 당하던 상황. 그 상황에서 즉위한 이존욱의 나이는 고작 18세 였습니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갈 나이였습니다.



삼중전선, 국경의 적들,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호시탐탐 권위에 도전하려하는 전대의 호걸들. 그런 상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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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뒤 상황.



저 초록색이 전부 진나라, 이때는 이름을 당나라(후당)의 판도 입니다.





삼중전선에 위협을 받으며 맹렬하게 공격 당하던 이존욱은 즉위한지 딱 15년 만에 70여주를 가진 후량을 오히려 멸망시켜버려 씨도 안남게 해버렸습니다. 그나마 완전히 공식적으로 멸망시키는게 15년이었지, 실제로는 즉위하자마자 전쟁을 해서 그 15년 동안 단 한번도 진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압도적이었냐면, 15년 동안 싸우면서 한번도 제대로 못 이긴 후량이 그나마 그렇게라도 버틴게, 주전충이 정치를 잘해서 국력을 키워놓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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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전쟁을 그냥 해서 이존욱이 이겼는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진은 이면도 아니고 삼면이 전선이었고, 후량의 주전충과 유수광의 연나라와는 제법 적극적으로 협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진나라 군이 남하할때마다 기회를 놓칠새라 쳐들어오려고 하기 일쑤였습니다. 심지어 뜬금없이 남쪽의 십국 중 오나라에서 야율아보기에게 '전쟁에 잘 써먹으라.' 고 석유 기름을 바치며 은근히 충동질을 하는등 천하가 모두 편을 잡아먹고 진나라를 집어삼키려는 형국이었습니다.



때문에 진나라 - 후당은 숱차례 양면전쟁을 펼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승리했습니다. 후방인 연나라를 평정하고 하북을 통합하는 전쟁을 하기 위해 이사원, 주덕위 같은 장수들에게 병사를 주어 전쟁에 나서도록 하고, 이존욱 본인은 남은 일부의 병력만 가지고도 주전충을 무찌르는가 하면, 후량과 전면전을 펼치는 동시에 침공해오는 거란의 침입을 한번도 아니고 수차례나 막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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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론의 군단마냥 미친듯이 남하하는 거란족들.




그 거란의 침입이라는것도 무슨 일개 야만인이 노략질 하러 온 수준이 아닙니다. 917년 무렵, 이존욱이 후량과 전쟁하는 사이 '호왈 100만' 을 일컫고, '100만은 거란족들이 쳐들어오며 겁먹으로 과장한 소리고 한 30만쯤 되었다' 정도로 사서에 기록된 거란군이 대규모로 침공을 가해왔습니다. 또한 922년에도 거란의 침공이 있었는데, 이때 역시 "야율아보기가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온다." 는 "소문" 만 듣고도 도망치는 부하들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거란 군단들이 중원으로 남하 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대규모 군대가 쳐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히 오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나중에 거란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유명한 석경당 이전 "오대 시절 펼쳐진 수십만 거란 군단의 침입" 에 대해 대부분 잘 알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거란이 쳐들어와서 이겼으면 중원의 왕조가 교체되고 이민족 군단이 중원을 장악한 큰 일인데, 이존욱에게 져버렸기 때문에 별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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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막혔기 때문에 르네 그루세의 명저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에서 한줄짜리 사건으로 끝났지만, 이겼으면 한줄로는 끝나지 않았을듯..




일반적으로 유목 민족이 기를 떨치고 중원으로 남하하는건 중국의 분열기, 혼란기에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막강한 통일제국이 있을때는 그 힘에 눌려 있거나, 혹은 그 영향력 때문에 유목민족들도 잘게 분열되어 통합되지 못하지만, 분열기에 초원에 대한 중원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세력을 규합한뒤 혼란을 노려 침공해서 성공하는 식입니다. 


유독 흉노의 묵돌, 금나라의 아골타, 원나라의 칭기즈 칸, 청나라의 누르하치 등이 통합을 시켰다는 측면에서 '개국 군주' 이면서 중원에 대한 압박을 떨친 군주로도 이름을 날린 것은 이런 탓이 있을 겁니다. 분열기이니까 유목민 통합이 가능했고, 분열기이니까 바로 공격해올 수 있으니까요.




끊임없이 전투가 펼쳐지던 오대십국 시대 초반부는 분명히 그런 요소가 완벽하게 갖춰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율아보기는 거란족을 통합하는데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원 진출에 있어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공격을 안한것도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찔러댔는데, 이존욱에게 다 막혔습니다. 때문에 요나라의 중원 진출은 수십년이 지난 후, 자기가 황제가 되고 싶었던 석경당이 거란의 힘을 빌리기 위해 '연운십육주'의 땅을 때준 뒤에나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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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짤로 보는 후당(진)의 세력 확장.




이존욱은 그렇게 거란의 끊임없는 큰 규모의 침공을 당하면서도 삼중전선을 극복하고 오히려 세력을 확대, 후량을 멸망시키고 연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이무정의 기나라를 복속하고 형남의 고계흥은 직접 복속까진 아니더라도 그 세력의 주인인 고계흥이 이존욱을 만나러 직접 수도로 와 입조하기까지 하는등, 사실상 영향력 아래 놓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후량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당나라가 거의 200년 가까이 제대로 손을 대지 못했던, 6주 43현을 차지하는 초강력한 번진이었던 위박천응군, 위박번진을 완전히 장악해버렸습니다. 이 위박 번진이는 곳은 대대로 번진이 이어지며 독자세력화된 군사세력으로, 당나라 황제도 제대로 건들지 못했고 이후에 들어선 후량의 황제들의 명령도 무시하던 곳이었습니다. 200년동안 누구도 제대로 손을 못 대던 세력이었지만, 이존욱은 코 한번 킁하고 풀듯 위박번진을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정권 말기에 이르면 장군 곽숭도를 파견하여 전촉까지 복속시켜, 일개 지방 정권이 아닌, 가히 제국에 걸맞는 영토를 압도적인 판도를 구축합니다. 그 직후 이존욱 본인이 쿠데타로 죽어버리고 말지만....아무튼 전촉을 일시 복속시킨 이 판도는, 후주 세종 시영이 통일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이전까지 오대 십국 중 최대의 판도였습니다. 사실상 통일에 거의 다다갔던 수준이었는데....




「臣聞李亞子繼位以來,於今十年,攻城野戰,無不親當矢石,近者攻楊劉,身負束薪為士卒先,一鼓拔之」

소인이 듣건데 이아자(이존욱의 아명)은 왕이 된 후로 10년간 성을 공격하고 들판에서 싸웠지만, 화살이나 돌을 맞은 적이 없는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를 공격하면서 몸소 땔나무를 짊어졌고, 사졸보다 앞장서서 북을 쳤다고 들었습니다.

- 후량 대신, 경상의 발언




「吾有西樓羊馬之富,其樂不可勝窮也,何必勞師遠山以乘危徼利乎!吾聞晉王用兵,天下莫敵,脫有危敗,悔之何及!」

 "우리에겐 양과 말이 풍부한데 어찌 병사들을 피곤하게 하십니까. 또한 듣기로 진왕 이존욱은 군사를 부리는데 있어 천하에 대적할 적수가 없다(천하막적天下莫敵)고 하는데, 만일 패배가 있다면 후회한들 어찌되겠습니까?"

- 야율아보기의 부인, 술률후의 발언



지휘관으로서 이존욱에 대한 당대의 평가들. 무슨 '천하막적' 이라는 무협지스러운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분열된 것도 아닌, 통합된 거대 유목 국가가 바로 출현, 


삼국지로 치면 한창 때 원소 이상 급으로 대세에 가까운 거대한 반대세력이 존재, 


국경 바로 옆에 제 3의 위협이 존재, 그리고 이 모든 적대적 요소들이 동일한 시기에 위협해 옴 - 이런 위기를 모조리 극복해낼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 지도자였던 이존욱이었지만, 하지만 이존욱은 결국 통일 군주가 되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이름이 잘 각인되지도 못했습니다. 왜?


그럴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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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시대의 연회 장면을 묘사한 그림.





여기까지 이존욱의 업적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개인적은 면모로 들어가보자면 훌륭한 군사 지휘관였던 이존욱은 전형적인 천재형 사람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주 자체가 많았고, 본인 자신의 흥도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노는것도 좋아했고, 시나 노래를 읆거나 예능을 하는 일도 즐겼습니다. 여러모로 톡톡 튀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이 그리 튀니 아랫 사람들은 고생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이 젊은 군주는 겁을 내는것도 없어서, 일국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부대만을 이끌고 직접 적진을 정찰하는 무리수를 자주 감행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임무가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북의 유수광을 무찌르고, 위박 번진을 굴복시켜 강력한 세력을 이존욱이 일구었을 무렵, 이에 경계심을 느낀 후량에서는 유심이라는 장수를 파견하여 이존욱을 공격케 했습니다. 이에 이존욱 역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유심을 상대하러 나섰는데....



그런데 이 싸움 직전, 이존욱은 고작 군사 백여명만을 이끌고 적진을 염탐하러 나왔습니. 이를 눈치챈 유심은 무려 5천여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이존욱을 포위했고, 그대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천재적인 지휘능력을 보이는 이존욱을 죽인다면 향후 후량과 후당의 전투에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존욱은 놀라지도 않고 되려 소리를 지르며 휘하 기병들을 이끌고 적진을 수차례 돌파했습니다. 수십겹의 포위망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며 버티고 있을때, 마침 지원군이 와서 이존욱은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기에 처했던 본인 왈,


"아, 이거 까딱하면 망신 당할 뻔했네."


무모한 짓을 해서 이런 꼴이 되었다, 자제해야겠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잘못하면 개망신 당할 뻔했다, 정도의 반응입니다. 보통 이런 경험을 하면 그 후부터는 자제 하기 마련인데, 이존욱은 겁을 상실한 인물이라 그런것도 없었습니다. 되려 그 후로도 스스로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기를 밥 먹듯이 했고, 그걸 지켜보는 수하들 입장에서는 애간장이 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존욱의 수하들은 때만 되면 이존욱을 붙잡고 말려댔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이존욱의 이런 태도가 "군주라면 몸소 사졸들의 앞에 나서야..."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놀이 기분' 이라는 점입니다. 거의 철부지 같은 이존욱을 설득하려고 이존욱 군단에서 잔뼈가 깊은 무장인 '이존심' 이 직접 나서서 충고할 정도였습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천하를 위해 자중하셔야 합니다! 먼저 올라가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장수와 사졸들의 직분, 저 이존심 같은 무리가 해야 할 것이지 대왕께서 할 일이 아닙니다."



군대의 베테랑인 장군마저 이렇게 말하자 딱히 반대할 명분도 궁색하던 이존욱은 "걱정마시오. 안그러겠소." 하면서 들어가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조용히 나오더니 하는 말,


"야,  지금 이존심 있냐?"


"없는데요."


"없어? 좋아! 그럼 적군 기습이나 하게 기병들 수백명만 모아라!"


그렇게 흡사 못하게 말리는 어른이 사라진 틈을 타 장난 치려는 얘들처럼 재빨리 말에 오른 이존욱은 이런 소리를 지껄이며 미친듯이 출격했습니다.


"늙은이가 다른 사람의 놀이를 방해하는구나!"


저 위의 말은,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재미있거나 보기 편하라고 순화하거나 고친 말이 아니라 이존욱 본인이 한 말 그대로입니다. "내가 놀러가는데, 왜 막느냐" 는 거의 개념상실한 정도의 말로, 이 사람에게는 전쟁이나 싸움 같은건 그냥 재미보는 행위나 다름없었던 겁니다. 



이 정보를 얻은 후량군은 다시 5천여명의 병사로 이존욱을 포위하여 거의 끝장을 볼 지경이 되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이존욱은 개죽음을 당하고 교훈을 안기는 시나리오가 되겠지만, 뒤늦게 소식을 알아챈 이존심이 놀라 구원을 하러 오는 바람에 작전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이존욱은 이존심의 말을 충성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끝나면 훈훈하지만, 이존욱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안들었습니다. 좀 악의가 느껴지게 무시하면 모르겠는데, 거의 철부지 꼬맹이마냥 무시하기를 계속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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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욱 휘하 최고의 명장이었던 주덕위.



하루는 이존욱의 군대가 후량군과 마주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먼저 공격해 들어가는 쪽이 불리해질 것이 뻔하기에 양군이 서로 치열하게 대치만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던 중,


갑자기 이존욱이 수하들을 불러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저 놈들 자기들끼리 내분 일어나는걸 보니까 여기서 이럴 필요가 없겠다. 저놈들 무시하고 후량 수도 대량으로 쳐들어가면 쩔거 같지 않냐?"


아니, 지금 전선에서 대치하는 중인데 눈앞의 적군을 그냥 내버려두고 적 수도를 향해 진군한다니? 하물며 그런 위험천만한 임무를 본인이 나서겠다고 자처하는 겁니다. 그러자 후당 군의 맹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주덕위는 당연하게도 "적 군대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함부로 움직이는건 위험합니다!" 하고 거의 절규하듯 애원했지만 이존욱은 상큼하게 그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군사를 몰아 후량의 수도 대량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러자 당황한것은 후량군입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눈 앞에 있던 적이 사라지고 자기 나라 수도로 진격하는 모습을 본 후량군은 황당해하다가, 급히 군사를 몰아 후당군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적국의 깊숙한 곳에 들어와서, 후방에는 적군이 있는 상황. 일반적인 형세라면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고, 주덕위 역시 이런 상황에 맞추어 다시 신중한 제안을 올렸습니다.


"이곳은 적의 깊숙한 영토이니 행동에는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일단 군사를 싸우게 하지 마시고, 저 주덕위에게 기병을 주어 적을 교란하여 휴식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이 사태를 초래한 이존욱은 오히려 주덕위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야, 왜 이렇게 겁이 많냐! 내가 후위를 맡아 직접 박살낼테니까 걱정 말아라!"


어이가 없어진 주덕위는 아들에게 "내가 이러다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겠다." 고 푸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벌어진 추격군과의 격전은 대단한 난전이라 정신이 없었고, 그 주덕위 역시 아들과 함께 난전에 휘말려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개념 못차리고 이 사태를 초래한 이존욱은 망해야 하지만...


안 망했습니다. 오히려 이겼습니다.


무슨 주인공 버프를 받은듯한 이존욱은 오히려 대승을 거두었고, 다만 이후 정비를 위해 물러나 바로 수도를 노리는 계획이 실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당시 후당군에 이름 높은 장수였던 이사원 등은 '당연히' 이존욱이 대패한줄 알고 물러나 있다가 멀쩡히 돌아온 이존욱을 보고 경악해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물을까봐 머리를 숙이며 빌었는데, 이존욱은 껄껄 웃고는 벌주 한번 하라고 권하고 일을 끝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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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절 궁중의 여자들 그림.




이존욱의 이런 천진난만한 태도는 일상생활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존욱의 후비였던 유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훗날 후줄근한 아버지가 찾아오자 이런 아버지와 엮이면 자신이 미천하게 보일까봐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라며 만나주지도 않는 극도의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충격받은 유씨의 아버지는 돌아가버렸습니다.


봉통 일반적인 멘탈의 황제라면, 이러한 일에 대하여 "아니, 내 부인이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여자에 빠져 앞도 뒤도 안 보일 정도로 매달리는 황제라면, "우리 자기, 걱정하지마." 라고 하며 싸고 돌거나, 여하간 그 둘 중에 하나의 반응을 취하는게 보통일 겁니다.


그럼 이존욱은?


비범한 멘탈을 지닌 이존욱은 그날 부터 유씨를 만날때마다 일부러 후줄근한 옷을 입고, 후궁에 들어설때마다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비다. 아비가 우리 딸을 보러왔다!"


가히 실로 비범한 멘탈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 많은 전투에서 백전백승하며 항우와 같은 모습을 보인 이존욱은, 불행히도 정치에 있어서도 항우와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만 이존욱은 항우 수준의 악랄한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이존욱의 문제점을 말하자면, "뇌가 너무 청순" 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노래하고 노는것을 좋아한 이존욱의 궁정 생활은 자연 많은 재물이 필요했는데, 이존욱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공겸이라는 신하를 찾았습니다. 이 공겸의 특기는 백성을 쥐어짜 창고를 채우는 기술이었는데, 이 "뇌가 청순한" 황제는 꽉 찬 창고를 보고,


"야! 우리 백성들이 정말 잘 사나보다! 창고가 이렇게 가득차니 말이야! 내 마음도 뿌듯한걸!"


...이런 태도를 보이면서, 공겸에게 "재물을 넉넉히 하고 나라를 살찌게 한 공신" 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습니다. 그 정도로 이존욱은 나라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라일을 모르는 이존욱의 취미는 노래나 연극이었고, 특히 그는 연극을 대단히 좋아서 스스로 "이천하" 李天下 라는 예명을 만들고 배우로 활동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이존욱과 같이 연극을 한 배우들은 이존욱의 환심을 사 정치를 어지럽혔습니다. 순진한 이존욱은 그들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간신들 중에 게중에 "경신마" 라는 정신 똑바로 박힌 배우가 한 명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존욱이 한참 배우 노릇을 하다가 아주 흥에 겨워 "이천하! 이천하!" 라며 자신의 예명을 무슨 미친 사람처럼 부르짖으며 황제의 체통이고 뭐고 없이 날뛰고 있을때, 그 모습을 본 경신마는 이존욱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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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욱의 뺨을 후려 갈겼습니다.



당시 이존욱은 하북, 전촉 등을 평정한 가히 중국 최강의 사나이였고, 경신마는 궁중의 일개 배우에 불과하니 이는 중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명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 좀 먹고는 평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이존욱도 너무 놀라 경신마를 바라보며 황망하게 "넌 왜 천자의 뺨을 떄리느냐" 하고 물었고, 이에 경신마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理天下'은 하나 뿐인데 어찌 다른데서 이천하를 찾는단 말이냐?"



이존욱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포복절도하면서 기분이 좋아 "그 말이 맞다. 정말 그렇구나!" 하면서 경신마를 칭찬했습니다. 뺨 맞고도 좋아하는 황제는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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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는 이존욱이 사냥을 하며 놀고 싶어 말을 타고 나섰을 때의 일입니다. 한참 사냥에 열이 오른 이존욱은 멧돼지를 보자 수하들과 함께 논밭으로 이를 추격했고, 덕분에 엄한 논밭이 아주 아작이 나버리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현령이 목숨을 걸고 "폐하의 백성들의 논밭이 이러다가 다 망가지겠습니다" 며 길을 막았습니다. 한참 재미나게 노는데 왠 놈이 나타나 기분이 잡친 이존욱은 현령을 손봐주려고 했지만, 이존욱을 수행하러 따라 왔다가 분위기를 깨달은 경신마는 이존욱이 무슨 명령을 내리기도 전 자기가 먼저 현령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image.jpg


이번엔 현령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현령이란 놈이 천자가 사냥을 좋아한다는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어찌 알면서 백성들에게 경작을 시켜 천자의 사냥을 방해되게 하였느나. 안다면 어째서 밭을 그냥 뒤집어서 천자의 말이 통쾌하게 달리도록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곡식을 거두는 일 따위가 천자의 흥보다 중요하단 것이냐?"



아무러한 이존욱도 그 말을 듣자 꺠닫는바가 있어 그날은 그렇게 물러났습니다. 물론, 이존욱은 너무 멘탈이 초딩이라 한번 꾸짖으면 그 자리에서는 반성을 했지만 노는것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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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욱의 순욱, 장승업






이렇게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던 이존욱을 옆에서 제어해주고 도움을 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장승업(張承業)으로, 장승업은 다름 아닌 환관이었습니다. 역사상의 많은 환관들, 특히 당나라의 환관들은 나라를 망친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장승업은 극히 예외적인 환관으로 당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본인의 능력과 행실 역시 대단히 모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당나라가 주전충에게 멸망한 상태에서 주전충의 적수인 이극용에게 몸을 의탁한 장승업은, 흡사 그 옛날 순욱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타 이씨를 도와 천하의 혼란을 평정하고 당나라의 부활을 꾀하는' 일에 착수하게 됩니다. 곧 이극용이 죽어 나이 어린 이존욱이 즉위하자, 내부의 일을 잘 아는 장승업은 어린 이존욱을 도와 그가 잔뼈 깊은 전대의 무장과 친족들을 상대로 우위에 설 수 있게 도와주웠습니다. 장승업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존욱은 시작부터 힘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이존욱이 수차례 전쟁에 나섰을때, 장승업은 후방에서 내정을 원활하게 처리하고 이존욱에게 지체없이 군량을 지원했습니다. 나라 일에 어두운 이존욱이 전쟁에만 전념해도 무방했던 것은 장승업이 도움이 아주 컸다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군벌들이 다툼이 서슬퍼런 그 시대에, 장승업인 필요하면 외교가로서 다른 세력에도 자주 파견되어 좋은 협상을 자주 이끌어냈습니다. 정치에 관련해서는 실로 다재다능한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장승업의 여러 공적 중에서도 가장 큰 공적은, 철부지 이존욱을 달래는 흡사 아버지 같은 '멘토' 역할이었습니다. 미숙한 이존욱의 멘탈을 여러차례 장승업이 잡아준 덕분에 이존욱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노장 주덕위와 진왕 이존욱이 전략을 논의하다 다투는 일이 생겼습니다. 주덕위는 노장으로서 경험을 살려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는데, 즉위하고 나서부터 눈부신 승전을 거듭하던 이존욱은 속전을 통하여 재빨리 승부를 내려고만 했으니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싸우게 된 일이었습니다. 논쟁 끝에 격분한 이존욱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 장막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잠을 자버리는 채 하며, 여타 제장들이 만나려고 해도 전혀 만나주질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덕위가 찾은 사람은 장승업이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자주 승리하시다 보니, 적을 가볍게 여기며 재빨리 이기는 일에만 힘쓰고 계시오. 지금 적과의 거리는 지척인데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오직 강 하나 뿐이니, 저들이 만약에 다리를 만들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 무리는 즉각 없어질 거외다. 물러나서 고읍 하나에 진을 치고 도적을 유인하고, 저들이 나오면 돌아오고, 저들이 돌아가면 나가며, 별도로 경기병을 이용해 그들의 양식을 노략질 하면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적을 격파할 수 있소."


 장승업은 지휘관이 아니니 군사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밝지는 못하겠지만, 주덕위가 노련한 명장이라는 사실은 그로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장승업은 그 즉시 이존욱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누워 있던 이존욱은 잔뜩 심통이 났기에 휘장을 내리고 아무도 보지 않고 있었는데, 장승업은 그 휘장을 거두고 마치 애를 달래듯 이존욱의 등을 어루만지며 충고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편안히 주무실 때입니까? 주덕위는 노장이며, 군사를 아는 인물이니 그 사람의 말을 소홀하게 들으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조용히 다독이는 장승업의 말에 천성이 어린 아이 같았던 이존욱도 캥기는 바가 있어 엉거주춤 비스듬하게 일어나며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건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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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천성이 엔터테이너인 이존욱은 한때의 기분으로 수하들에게 사례를 퍼부어주거나 하는 일이 매우 잦았습니다. 그렇지만 돈 자루를 가지고 있는 장승업은 마치 마누라나 되는 것처럼 돈을 잘 주지 않으니, 이존욱은 늘 난감할 지경이었습니다. 


당나라의 풍속으로는 어떠한 사람이 연회에서 춤을 춘다면,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은 한 턱을 내야 했습니다. 어느날 연회에서 누군가가 춤을 추자 장승업은 비단과 말 등을 그 사람에게 주었는데, 살림은 고려하지 않고 늘쌍 선물 주기만이 좋아하던 이존욱은 그것이 못마땅해 한마디 했습니다.


"저 아이는 돈이 없으니, 마땅히 형님(이존욱은 장승업을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은 의당 전 한더미를 그에게 주어야 합니다. 주신 선물로는 후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장승업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저 사람에게 준 말 등은 모두 저 장승업의 봉록으로 산 물건일 뿐입니다. 전 한더미를 주시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소인의 봉록이 아니라 대왕이 전쟁을 위한 전사를 양성하는데 쓸 비용일 뿐입니다. 저 장승업은, 감히 공적인 물건을 가지고 사적으로 사례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이란 한 턱을 내고 하는 일에는 쓸데없이 자존심만 커지는 동물이라, 이렇게 사례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이 무시되었다고 여긴 이존욱은 기분이 대단히 언짢아졌습니다. 술이 더 들어간 이존욱은 잔뜩 취해서 뒤틀린 심사를 노골적으로 장승업에게 퍼부어댔습니다. 사서에서는 그저 '술에 의지하여 모욕하였다.' 고 하는데, 술이 들어간 만큼 실제로는 상당한 모욕이 있었을 거라고 예상하는건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자 화가 난 장승업도 쏘아붙였습니다.


 "이 늙은이는 자손을 위해서 돈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돈을 아껴 왕께서 패업을 이루려고 하는 까닭일 뿐인데, 그렇지 않으시겠다면 왕께서 마음대로 꺼내서 쓰시지 이 늙은이에게 무엇을 묻겠단느 것입니까? 그러나 재물이 다 없어지면 백성들도 흩어지고 하나도 이루는 것이 없을 뿐이겠지요!"


술 김에 이성을 상실한 이존욱은 "칼은 어디에 있느냐!" 고 미친듯이 소리쳐 대었고, 아들같은 이존욱이 날뛰는 것을 본 장승업은 억장이 무너져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이 늙은이는 돌아가신 왕이 임종 하실때 남긴 명을 받고 국가를 위하여 도적을 죽일 것을 맹세하였는데, 돈을 아낀 일 때문에 왕의 손에 죽는다면야 저는 지하에 가서 돌아가신 왕을 뵈어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왕께서는 저를 죽여 주십시오!"


이렇게 서로간의 감정이 폭발할 무렵, 후량에서 항복한 항장 출신이라 분위기에 민감한 인물이었던 "염보"라는 장수는 상황을 적당한 수준에서 수습하기 위해 "아이고, 이러지 마시고" 라는 의미로 장승업의 손을 잡고 물러나게 하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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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이 난 장승업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염보에게 그대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꽂아넣고 두들겨 팼습니다.


"이놈, 염보야! 네 놈은 본래 주온(주전충)의 패거리면서도 우리 진의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일찍이 충성을 다하여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아첨하여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냐?"


이렇게 연회자리에서 난리가 벌어지자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었고, 이존욱의 어머니, 태부인은 장승업이 모욕을 당한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 아들인 이존욱을 즉시 불러들였습니다. 성격이 막나가긴 해도 어머니에 관해서는 효자에 가까웠던 이존욱은 어머니가 자신을 부른다고 하자 갑자기 사태가 파악되어 깜짝 놀라 취중에 비틀거리면서도 쭈삣쭈삣 장승업에게 사과했습니다.


"내가 술과 실수하여 형님의 뜻을 거슬렸고, 또 어머니에게도 죄를 지었으니, 형님은 내가 벌주를 마신 일로 허물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 와중에 사과한다며 벌주를 마신다는 이존욱은 술을 넉잔을 연속해서 마셨고 장승업에게도 술을 권하였지만, 이 판국에 술이 넘어갈리 없는 장승업은 결국 술을 끝내 마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술에 잔뜩 취한 이존욱이 반쯤 인사불성이 되어 어머니에게 가자, 태부인은 실컫 이존욱을 야단친후 완전히 꽐라가 된 이존욱을 대신해 따로 사람을 보내 장승업에게 사죄하였다. 이때의 사과는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 싸우는 군웅과 그 가신, 인척의 사과라기보다는 집안 아이의 무례를 어르신에게 사과하는 기묘한 느낌이 납니다.


 "이 어린아이가 특진을 거슬렸기에, 이미 제가 녀석의 볼기를 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존욱이 술에서 완전히 깨자, 태부인은 철없은 아들을 데리고 장승업의 집으로 직접 행차하여, 왕과 태부인이 모두 장승업에게 무례를 사과했습니다. 얼마 후 이존욱은 미안하기도 해서 장승업을 연국공으로 추대했지만, 장승업은 이러한 벼슬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장승업은 오직, 당나라에서 받은 벼슬을 계속 지켰습니다. 





이렇게 아첨 같은것도 없이 이존욱을 전심전력으로 보좌한 장승업의 덕택으로 이존욱은 승승장구했지만, 그렇게 승승장구한 이존욱은 결국 장승업의 기대를 저버리고 당나라의 황제를 자처하며 황제가 되려했고, '후당' 을 건국합니다. 실망한 장승업은 병이 깊어져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장승업이 죽고 나자 이후에는 이존욱을 위해 충언을 할 사람들이 옆에서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나마 장승업이 아직 살아있을때는 미안하기도 해서 망설이던 이존욱은 장승업이 사망하자 바로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이존욱은 전쟁에는 능했으나 사치스럽고 노는것을 좋아하는 귀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누빌때는 늠름한 영웅이었으나 이제 옥좌위에 않게 되자 형편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주전충이 파괴시킨 당나라 말기의 부패를 마치 아깝다는듯이 하나하나 주워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환관이 부활했고 황실 연극이 부활했습니다. 여력이 있어서 당나라 흉내를 내고 사치하는것이라면 몰라도, 사실 병사의 급료조차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존욱은 평소에 전쟁만 했지 내치에 관해서는 아는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불만은 각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존욱은 이런 반란 진압을 위하여 휘하 장수인 이사원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병사들은 환관들의 횡포 등에 불만이 극에 달했고, 이존욱에겐 희망이 없다며 완전히 단념해버렸습니다. 반란군은 이사원에 협력했고, 낙양에서도 이존욱을 죽이고 이사원에 투항하게 됩니다. 전투에서 패배가 없던 호걸은 이렇게 어이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사원은 사타 돌궐족 출신이면서도 사타 귀조거이었던 이존욱과는 달리 완전한 평민 출신으로, 성격이 난폭한 사람이긴 했지만 백성들의 고통은 잘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글도 읽을 줄 몰랐던 이사원이었지만, 환관을 척살하고 복잡하고 난잡한 궁정 제도를 대폭 간소화했으며. 또한 이름높은 인물인 풍도를 등용했고, 자주 사방을 순시하며 부지런히 농업과 양잠에 힘쓸것을 권하였습니다. 이런 이사원이 바로 오대의 명군 중에 한 사람인 후당 명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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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 십국 시절의 가장 유명한 명신인 풍도. 무려 5개 왕조 밑에서 재상을 지낸 인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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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17/09/29 19:58
수정 아이콘
일전에 신불해님께서 쓰신 중국 50대 전투에서 처음 알아서 일대기를 찾아 봤는데 정말 기가 찬 인물이더군요.
왜 모든 왕조 시대에 제왕학 교육이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17/09/29 20:13
수정 아이콘
오늘 신불해님의 글을 읽고 처음 알게된 인물인데,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감정 절반, 씁슬하다는 감정 절반이 교차하는 인물이네요.
고기반찬
17/09/29 20:15
수정 아이콘
화살 3개 퀘스트 완료했으면 능력치가 올라야하는데 오히려 떨어져버린...
보통블빠
17/09/29 20:17
수정 아이콘
전쟁 백날 이겨도 내정이 망하면...
이치죠 호타루
17/09/29 21:09
수정 아이콘
중국의 그랜트죠. 군재는 당대 최강, 그러나 내치는 영...
뱀마을이장
17/09/29 21:41
수정 아이콘
고우영옹 십팔사략에선 간략히 다뤄서 내정 말아먹은것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군공이 엄청났군요
설탕가루인형형
17/09/29 21:52
수정 아이콘
너무 너무 재미있는 글이었습니다!
kartagra
17/09/29 22:01
수정 아이콘
요즘 송사에 관심이 생겨서 5대 10국 쪽도 찾아보고 있었는데 타이밍 좋게 신불해님 글이 올라와있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예전에 얼핏 봤을때도 이존욱 이양반 범인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정리해서 보니 장난아니군요 크크
앙겔루스 노부스
17/09/29 22:11
수정 아이콘
기회되면 풍도에 대해서도 한번 써 주시죠. 제가 풍도같은 처세가를 좋아해서. 탈레랑 가후 풍도 이런 부류 인물들 좋아합니다~
블랙번 록
17/09/29 22:11
수정 아이콘
정말 이존욱은 아니지만 영화 황후화의 윤발따꺼 밖에 안 떠오르더군요 이존욱은
bemanner
17/09/29 22:19
수정 아이콘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는 보정을 받고 이세계로 건너온 고등학생이 날뛰는 얘기인가요;

별개로 저 당시에도 만리장성이 방어선으로 유효했나보네요? 국경선이 거의 장성과 유사하네요.
17/09/29 22:42
수정 아이콘
꿀잼 에피소드네요
모리건 앤슬랜드
17/09/29 22:50
수정 아이콘
흠. 근데 왜 야율아보기는 굳이 이존욱네 동네를 자꾸 찔렀던걸까요. 훗날에 연운 16주가 되는 연나라쪽도 훌륭한 중원 침공 루트가 되고, 하물며 저쪽 오르도스쪽을 침공 루트로 해서 후량 서북부로 침공해 들어와도 되지 않았을까요.
무무무무무무
17/09/30 09:07
수정 아이콘
처음엔 여기 프리패스야 낄낄낄 하면서 들어왔다가 깨짐. 어 이럴리가 없는데 정비하고 들어오다 또 깨짐. 그 다음부턴 악만 남아서....
Remainder
17/09/29 23:1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장승업이라니 햏자가 떠오르네요...
농담이고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리얼 초딩 멘탈인데 전투는 잘했네요 크크
경성아재
17/09/29 23:5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오대사궐문에 이극용이 이존욱에 화살 세 개를 주며 각각 주온, 야율아보기, 유인공 세 놈에 복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썰이 있던데요. 아들놈에게 필요한 것은 화살이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칼라미티
17/09/30 00:46
수정 아이콘
진짜 난 놈이었네요...이름만 알고 있던 양반인데 정말 흥미롭네요.
앙골모아대왕
17/09/30 08:4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전투력만 좋은 독재자는 역사를 보면 암살당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정치력을. 겸비해야 되요

무력 100. 정치력 25.

이런거 보면 칭기즈칸이 정말 대단합니다
꺄르르뭥미
17/10/05 10:11
수정 아이콘
알렉산더와 굉장히 흡사한 모습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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