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스파이더맨 : 홈커밍>에 대한 약간의 스포 있습니다.*






[영화공간] 마블에 질리다



​<시빌 워>즈음부터였을까? 마블 스튜디오의 히어로무비 시리즈가 슬슬 지겹다고 느꼈던 것이. 작품의 완성도 문제는 아니다. 마블의 히어로무비들은 지금도 여전히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연출은 영리하며 내용은 재미있다. 한마디로, 진수성찬으로 한상 떡 벌어진 ‘웰메이드 코스요리’ 느낌. 여전히 그렇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 시리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퍼스트 어벤져>로 무난하게 안착한 <캡틴 아메리카>가 속편 <윈터 솔져>로 대박을 쳤을 때, 다양한 개성의 히어로들을 능수능란한 솜씨로 한데 아우르던 조스 웨던의 <어벤저스>가 첫 선을 보였을 때, 나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환호하고 열광했다. 만화 속에서나, 혹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마블코믹스 속 히어로들을 하나하나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이 한데모여, 한 화면 안에서 서로 아웅다웅하고, 또 힘을 합쳐 악당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이렇듯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목격하며, 히어로무비 팬으로서 황홀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정말 황홀했다. 점차 윤곽을 드러내며 완성되어가는 마블 시리즈와 동세대를 공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다.




한때는 마냥 황홀했다

마블 스튜디오의 작가와 연출자들은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에 즐거워하고 감탄하는지를 이미 속속들이 다 꿰뚫고 있는 듯 했다. <어벤져스> 시리즈 이후로 선보인 <앤트맨>과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를 보면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은, 이들의 여유와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앤트맨>은 관객에게 뻔뻔스럽게 던지는 재기발랄한 유머와 깨알 같은 장난끼로 가득했으며, <시빌 워>는 히어로 무비팬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이자 메인 디시였다. 다른 한편에서 DC가 조급함에 휩싸인 채, 정신 못 차리고 죽을 쓰고 있는 동안, 마블 시리즈는 그렇게 하나의 탄탄하고 거대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화면 뒤에서 마블 제작진들이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어때? 이런 걸 기대했지?", "이래도 니가 재미를 못 느끼고 배겨?", "봐봐, 니가 원하던 그 장면이야.", "깨알 같은 유머는 덤이야."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마블 영화를 보면서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조종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블 제작진들이 ‘웃어라’고 하는 부분에서 여지없이 낄낄대며 폭소를 터뜨렸고, ‘감탄해라’라며 쏟아 부은 액션씬에선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젠 감동하자’라고 하는듯한 장면들에서는 약간의 유치함을 느끼면서도 나도 모르게 슬쩍 감화하고 감동해줬다. 뭔가 좀 오글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 수준이면 순순히 감탄하고 감동해줘도 될 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스크린 저 너머 마블 제작진들과 일심동체가 되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고, 재밌었으니까. <스파이더맨 : 홈커밍>도 마찬가지. 마블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재기발랄한 느낌, 그리고 특유의 깨알 같은 유머와 완급조절, 더불어 적당한 액션과 스릴까지. 브랜드 특유의 재미를 뽑아내는 그들의 능력은 여전했다.




​알파고의 완전식과 엄마의 손맛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이라도 자꾸 먹다보면 슬슬 지겨운 법.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은 이른바 전문 셰프들에 의해 먹음직스럽게 조리되고 화려하게 차려진 고급레스토랑의 메인 요리들과 같다. 손님들의 눈과 혀를 동시에 즐겁게 만드는 각종 산해진미들이다. 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느껴지는 헛헛한 아쉬움의 원인은 무얼까? 이 진수성찬엔 빠진 게 한 가지가 있다. 마블 시리즈에는 ‘엄마의 손맛’이 없다. 분명 셰프의 손맛은 있다. 너무나 깔끔하며 인위적으로 완벽하게 완성된 기성품의 느낌. 알파고가 음식을 만들면 이런 느낌일까? 마블의 영화들은 ‘엄마의 집밥’이 아닌, ‘알파고의 완전식’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질리지 않는 밥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엄마의 손맛이 담긴 집밥일 것이다. 마블 시리즈가 점점 진행될수록 그 한편 한편의 영화들은 여전히 재밌고 완성도가 높지만, 다른 한편으론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더 진해져갔다. 여전히 재미는 있으나, 흥미로움이 없다. 마블 영화들을 더 많이 맛볼수록 점점 더 집밥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가는 느낌. 매번 완벽한 맛은 아닐지라도 때로는 그리움에 나를 충동질하고, 때로는 깊이 모를 이끌림에 웃고 울리는 엄마의 집밥 말이다.

마블스튜디오의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재밌게 만들 줄은 알아도 치명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안전하게 만들 줄은 알아도 위험하게 만드는 법은 모르는 듯 했다.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연이은 성공에 안착한 상황에서 아예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 했다. <시빌 워>는 이러한 마블 제작진의 철학과 정수가 담긴 정점이자 상징이다. ‘초인등록법안’이라는 어둡고 민감한 소재, 원작만화의 무겁고도 치명적인 이 원재료를 가지고 제작진은 톡 쏘는 독성과 특유의 강한 향기, 위험한 가시는 전부 제거해버린 후, 특유의 유려하고 매끄러운 칼솜씨로 속살만 깨끗하게 발라내어 아주 먹기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며 깔끔한 고급요리로 내놓았다. 뭐랄까.. 불편함을 애초에 너무 깔끔하게 제거해버리니 그래서 오히려 불편한 느낌?




마블은 가시를 품을 수 있을까

'샘 레이미'식 <스파이더맨>의 어두운 정서와 페이소스를 버리고 산뜻하고 새롭게 태어난 <스파이더맨 : 홈커밍>도 마찬가지다. <홈커밍>은 그 자체로 훌륭한 팝콘무비이자 재기발랄함과 즐길 거리로 가득한 완제품이지만 <시빌 워>에서 느꼈던 그 ‘기성품’의 익숙한 맛과 향을 지우기 어렵다. 토니 스타크가 만들어준 ‘아이언맨식 수트’를 입고 어벤져스의 세계로 편입된 스파이더맨은 (배우와 캐릭터의 매력을 떠나서) 그 자체로 구조적인 틀 안에서 빠르게 관객들에게 익숙해지는 느낌이 강했고, 하이틴 무비 특유의 성장 스토리도 이제 그 흐름을 달달 외울 정도로 뻔하고 낯이 익었다. 물론 이러한 익숙하고 편안한 재미, 산뜻하고 재기발랄한 느낌이 바로 <홈커밍>의 매력이자 성공요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분명 매끈하게 잘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아쉽다.

물론 마블에서 찍어내는 히어로 무비 시리즈에 <곡성>과 같은 충격과 전율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곡성>은 <곡성>이고, ‘마블’은 ‘마블’이다. 하지만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치명적 연출과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과감하고 신선한 시도를 한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건 나만의 욕심일까? 한마디로, 맘 놓고 멍 때리고 보다가 제작진이 제거하지 않고 숨겨둔 날카로운 독가시에 푹 한번 찔려보고 싶은 게 내 작은(?) 소망이다. 목에 걸린 까시에 놀라 켁켁 거리는 그 와중에도 그러한 불편함이라면 마냥 반갑고 즐거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