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전부터 영등포 스타리움까지 가서 재개봉판을 관람했네요.
다시 보니까 펠렌노르 평원 전투 시퀀스는 두 개의 탑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전투장면 찔끔 보여주다가 딴 얘기 하고, 또 찔끔 보여주다가 딴 얘기 하고...확장판이라서 이런가? 싶었는데 극장판도 크게 다를 건 없는 부분이더라구요. 물론 원작이 다중 플롯을 가지고 있는만큼 다른 얘기도 해야 했지만, 이제와서 보니까 뭔가 전투의 스케일에 비해 세부적인 묘사는 많이 스킵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시각적으로 인상깊은 장면들은 많은데, 두 개의 탑에 나온 나팔산성 전투가 훨씬 긴박하고 디테일하게 묘사되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로한군의 돌격씬은 다시 봐도 찌릿찌릿 합니다. 흐흐


사실 왕의 귀환은 전투장면보단 프로도와 샘 파트에서 괜찮은 장면들이 더 많았네요
샘의 소드마스터 각성이라던가(...)
프로도와 샘이 모르도르에 진입한 후 지쳐 쓰러져서 하늘을 보는데, 시커먼 구름 사이로 반짝 보이는 별이라던가...
원작엔 폐허가 된 모르도르 땅에 한 송이 피어있는 꽃을 프로도와 샘이 보는 장면이 있죠. 이게 각색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블록버스터에서는 이런 서정적이고 감정을 건드리는 장면을 찾기가 참 힘든 것 같군요.

그리고 아라곤의 간지 터지는 연설 장면과 간달프의 궁극기(...) 독수리 소환 장면 등등 대단하다 싶은 부분은 전부 후반에 몰려 있습니다.
절대반지를 파괴했지만 그게 영웅적인 일마냥 기뻐하는 게 아닌, 바닥에 누워서 조용히 고향마을 샤이어를 회상하는 프로도의 모습도 굉장히 현실적이어서 맘에 드는 장면이구요.
프로도, 샘, 메리, 피핀 4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술을 마시는 장면도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 한 자리에 모였는데, 그 기분을 차마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그건 표정으로 말해야 하는 거죠.


이번 <왕의 귀환>을 보면서 느낀 게,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피터 잭슨의 분명한 인생작품이고, 다시는 이런 수준의 영화를 뽑아낼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서 성공한 데에는 감독의 연출력 이전에 원작이 가진 힘과 그 당시 한창 꽃을 피우던 CG/모션캡처 같은 디지털 기술 등 다른 이유도 있다고 보거든요. 관객들이 각종 시각효과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요즘 반지의 제왕이 나왔다면 아마 <반지 원정대> 단계에서 흥행이 고꾸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적이고 문학적인 대사들도 최근의 블록버스터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이구요.

살아생전에 이만한 대서사극을 또 볼 수 있을까요? 판타지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재개봉작이라 그런가...마스킹은 전혀 안 해주더군요. 좌우 커튼이 걷히지도 않은 걸 보고 아연실색했네요. 뭐 CGV니까 기대도 안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