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속 김치에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하얗게 피어난 그 자태가 지금 생각해도 참 혐오스럽네요.
놀란 저는 곧바로 "엄마 이거 버려야겠다. 곰팡이 피었어 으....." 소리쳤습니다.
냉장고 속에 넣어둔 김치에 대체 왜 곰팡이가 핀 건지 지금 생각해도 참 의아하네요.
그런데 엄마의 대답은 저를 벙찌게 만들었습니다.

[어 그거 물로 잘 닦아서 국 끓여 먹으면 돼]

지금까지 제가 뭘 먹어온 것일까요.
그래서 엄마의 아까우니 버리지 말자는 만류를 뿌리치고, 엄마와 함께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고, 곰팡이 슨 김치는 어려운 합의하에 버렸습니다. '우리집 김치냉장고에 내년까지 먹을만한
충분한 양의 김치가 있으니, 이런 꺼림찍한건 버리자!' 강하게 주장했거든요.

엄마와 티격태격하면서 냉장고속 오래된 반찬과, 썩어 문드러진 과일들 그리고 상추, 깻잎 등을
버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말 폐급의 사과였는데, 엄마가 보기에는 멀쩡한 부분만 잘라 먹을 수 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음식 양념할때 쓸 수 있는 아직 쓸모가 있는 아이였나 봅니다.
이런 시각적으로 테러를 일으키는 음식은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사과 사줄게" 말하고 버렸습니다.


이제 냉동실의 차례입니다. 엄마에게 게임의 재능이 있다는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테트리스 초 고수였습니다.
어쩜 이렇게 빈틈없이 가득가득 채워놓으셨는지... 정말 열자마자 다시 문을 닫고  '우리집은 냉동고가 없어,
항상 신선한 재료들을 금시에 먹어 치우기위해 냉장보관만 하거든 하하하' 합리화 하고 싶었지만, 기왕 시작한거
끝을 보기로 했습니다.

정체를 알수 없는 기묘한 조합의 물체가 보입니다. 무슨 양파껍질, 파뿌리, 생선뼈, 고기조각, 그리고 그외의
야채들이 함께 얼려져있었거든요. 당연히 엄마에게 물었죠. 정답은... 국을 끓일때 쓰기위한 어머니의 비법육수
였다면 감탄했겠지만 그녀의 대답은 제 상상의 범주를 뛰어넘었습니다. [음식물쓰레기]

아니 왜 음식물 쓰레기를 냉동실에 모셔놓지? 라는 의구심에 묻자, 음식물을 얼려서 버리면 냄새도 안 나고
편하다는겁니다. 사실 저는 음식물 쓰레기가 냉동실에 들어간다는것 자체가 아주 찜찜한데, 밀봉도 제대로
안되있는 아이들이요. 하지만 가치관이 다를수 있죠. 어머니의 비위는 저보다 훨씬 튼튼하셨나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음식물 쓰레기라게 한 봉지만 있는게 아니라 아주 많이 있더군요.
버리려다 까먹으셨나봐요.

뭐 일단 그것부터 버리고, 또 엄마와 한참 실랑이를 하면서 아주 오래된 음식들을 버렸습니다.
2년쯤 지난 곶감을 정말 버리고 싶었는데(날짜가 씌여있었습니다.) 결국 못 버린게 천추의 한입니다.

20리터짜리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9장 사용했습니다. 버리러 가는데 참 묵직하더라구요.
그리고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집 식구들 입이 정말 짧으니, 한번에 왕창 사오지 말고 딱 해먹을것만
사서 해먹고 버립시다. 냉장고는 음식을 신선하게 먹으려고 쓰는거잖아요.

우리집은 다 성인이라서 모두 다 일을 합니다. 그래서 집밥도 잘 안 먹어요. 입은 정말 어찌나 짧은지 초우지단(달걀오이볶음)
해먹으려고 오이 두개를 사면, 볶는데 오이 반개를 사용하고 나머지 1.5개는 아무도 안 먹어서 버려요.
새벽에 배고프다고 냉장고 뒤지면서 일단 오이 하나 통째로 잡아서 씹어 먹으면서 야식을 찾는 사람이 없어요.
오이 하나 통째로 잡아서 씹어 먹으면 그걸로 야식은 끝이거든요. 크크크크크

반면에 엄마는 손이 아주 큽니다. 정말 아주 아주 커요. 김치찌개 하나를 끓여도 그냥 냄비에 안 끓이고, 김치 한포기
통째로 넣어서 끓입니다. 당연히 냄배는 밥솥보다 더 큰 솥단지를 사용하구요. 보통은 같은거 계속 먹기 싫잖아요.
그래서 한 두번 먹으면 질려서 잘 안 먹고 그래서 버리게 되요.

지난주 화요일쯤이었나 생선조림을 한다기에 제가 솥단지에 하지 말고, 우리집에 전골냄비 하나 있으니 여기다가 해먹자
이야기 했는데, 어디서 또 조기새끼를 왕창 사와서 웍(중국식팬)에다가 한아름 했습니다.
어제 엄마랑 같이 냉장고 정리도 하고, 웍에 아직 많이 남았지만 먹기에는 깨름직한 생선조림마저 버리는 저를 보고
이번에는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내더라구요. "우리집 애들은 음식 잘 먹지도 않고, 다 버리네, 이제 조금만 해야겠다."

냉장고 정리는 항상 누나랑 제가 함께 (엄마몰래) 해왔는데, 엄마랑 같이하고 실제로 버리는 모습을 보니 엄마도 생각이 달라졌나
봅니다. 아니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정리]정돈된 냉동실을 보니 뿌듯하네요. 제가 항상 엄마에게
역설하는 부분이거든요. "엄마 정돈 아무리 열심히해도 정리 안하면 다 소용 없어"


다음에 엄마와 휴일이 맞을때는 집안에 살림살이들 정리를 먼저하고 정돈을 함께 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