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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전장의 상황
음... 이게 사실, 청색 작전과 바르바로사 작전 사이의 텀이 상당히 깁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종료일이 12월 5일인데, 청색 작전의 개시일은 6월 28일이거든요. 물론 청색 작전이 입안되기까지의 전장 상황을 고려해볼 때 프롤로그로 적어도 석 달 정도는 봐야 할 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석 달이 남습니다. 워낙 이 사이의 긴 텀을 무슨 능구렁이 담장 넘어가듯이 넘어가서 그렇지, 이 기간 중에도 특기할 만한 치열한 전투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괜히 역대 최악의 전쟁이었겠습니까. 실제로 아예 제 방에는 《First Winter of Eastern Front》라고 하여, 두께는 좀 얇은 편이지만(190페이지) 전장 상황을 생생하게 찍은 사진집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전장 지도도 중간중간에 있습니다) 사진만으로도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고작 첫 겨울, 그것도 석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다 이야기하면 에필로그가 적어도 글 두셋으로 불어날 판이라(아니, 아예 이 부분만 따로 떼서 연재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입니다), 간략하게만 짚어봅니다.
12월 5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종료되고 독일군의 공격이 멈추자, 스탈린은 이것을 대대적인 반격을 할 절호의 찬스라 여겼습니다. 사실 스탈린의 판단도 여기서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이 알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군의 공격이 멈추었다는 것은 공세를 할 여력이 소진되었다는 것이고, 실제로 독일군은 월동 장비와 보급품의 부족으로 전 전선에서 이리저리 고생하는 신세였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깨지고 깨지면서 소련군은 배운 게 많았고, 이는 그 콧대 높은 구데리안조차 투덜대면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므첸스크(Mtsensk)에서의 반격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우선 수도 주변부의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스타브카는 12월 5일에, 마침내 북부-중부 전역 전 전선에서 대반격 공세를 시작합니다. 12월 5일 ~ 12월 11일, 이 일 주일 동안 무려 다섯 곳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는데, 북쪽부터 순서대로 볼호브 - 티흐빈(對 북부 집단군 제18군, 12월 11일), 칼리닌(現 트베리, 對 중부 집단군 제9군, 12월 5일), 클린 - 이스트라(對 중부 집단군 제3기갑집단군 및 제4기갑집단군, 12월 6일), 툴라(對 중부 집단군 제2기갑집단군, 12월 7일), 리브니(오룔-쿠르스크와 보로네시 사이, 對 중부 집단군 제2군, 12월 6일)이었습니다.
아래 다섯 개의 지도는 위의 반격작전을 나타낸 것이며, 축척을 같은 크기로 맞춘 것입니다.
12월 11일, 볼호브 - 티흐빈 전선. 사실 이쪽은 이미 11월부터 반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12월 5일, 칼리닌 전선.
12월 6일, 클린 - 이스트라 전선.
12월 7일, 툴라 전선.
12월 6일, 리브니 전선.
대반격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독일군은 아주 그냥 뒤로 확확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2월 5일 반격을 개시할 당시의 기온은 영하 26도(영하 15도라고 되어 있는 건 화씨 온도이고, 이걸 섭씨로 변환하면 약 영하 26도 가량이 됩니다)였고, 그래서 손꼽히게 추운 동계 전투였던 것이죠. 그러니 평시라도 버티는 걸 장담 못 했을 독일군이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아 물론 소련군도 극한의 추위에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만, 적어도 독일군보다는 확실히 고생을 덜 했습니다. 그 양반들이야 툭하면 동장군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는 게 일상 아닙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소련군 자체가, 겨울전쟁 때의 한심한 공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일례로 이미 7월부터 소련군에서는 대전차포를 흩뜨려서 수행하는 선형 방어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상대가 기갑군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며, 소수의 대전차포가 각개 격파당하는 것보다는 첩보를 통해 적의 공세를 예측하고 그 예상되는 지점에 대전차포를 싹 모아서 강력한 방어를 구축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한 결과입니다(비록 전술적 미숙과 통신의 부족으로 바르바로사 작전 내내 실패하긴 했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12월이 다 지나갈 때쯤 되자 짧게는 수 km에서 길게는 무려 100 km에 육박하는 밀어붙이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는 전장 지도로 매우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지도들과 직접 비교해 보시죠.
12월 27일, 티흐빈 - 볼호프 전선. 티흐빈이 일시 점령되면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물자 수송로가 막힐 대위기에 처한 소련군은 성공적인 반격으로 다시 레닌그라드의 숨통을 틔워놓을 수 있었습니다.
12월 25일, 칼리닌 전선. 이 공세의 성공으로 칼리닌, 즉 트베리는 오늘날 유럽의 주 도시 중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가장 먼저 탈환된 도시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스토프의 경우, 일시 점령으로 끝난데다가 이후의 청색 작전에서 함락되어버리는 바람에 완전 탈환이라고 하기는 좀 뭣했죠.
12월 25일, 클린 - 이스트라 전선. 이 공세의 성공으로 모스크바는 그런대로 한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
12월 17일, 툴라 전선. 툴라의 중요성은, 툴라 자체가 모스크바의 남익을 닫는 곳이자 공업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매우 높다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U자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툴라 지역의 측면을 향한 대공세로 돌출부가 사라지게 되자 툴라 역시 한시름 놓게 되었고, 이 결과로 중부 집단군을 상대로 한 소련군의 모스크바 전역에서의 반격은 큰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비록 적 전열 자체를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리고 진짜로 큰 대성공. 12월 16일, 리브니 전선입니다. 공세 시작이 옐레츠(Yelets)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옐레츠 전선으로 볼 수도 있는데, 여하간 보시다시피
독일군의 일부가 포위 섬멸당하는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정확하게 후방을 닫고 전방으로 공세를 가해 적을 찢어서 분쇄하는 방식이었는데, 《독소전쟁사》에서는 이 포위 섬멸당한 군단이 제34군단이라 하는군요. 여하간 이는 소련군이, 적어도 수뇌부, 즉 장성들에 있어서는 독일군에 전혀 밀리지 않는 대등한 입장에 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여기에 모스크바 남단에서의 대공세, 툴라 남쪽에서 회전문 돌리듯이 북쪽을 향하는 공세, 마지막으로 크림 반도의 케르치 대공세까지 이어져서 12월 한 달만 해도 무려 여덟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이어지는 성공으로 스탈린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버리면서, 가뜩이나 일련의 대공세로 상당히 지쳐 있던 소련군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강제로 전 전선에서 벌어지는 총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주코프나 티모셴코 등이 반발을 했지만 소용없었죠. 그 결과가 바로 일련의 이어지는 비극입니다. 류반 공세 실패, 제2충격군의 고립 및 항복, 르제프에서의 박살(오죽하면 이 일대에 붙은 별명이 르제프 고기분쇄기, Rzhev Meatgrinder였겠습니까), 그리고 좀 멀리 나가면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까지... 그래서 소련군은 능력 밖의 것을 노린 탓에 제대로 실패했고, 이걸 또 자기가 현지사수 후퇴불가 명령을 내려서 먹혀들어갔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이후 내내 이 명령을 반복하다가 깨지는 거죠. 뭐 하긴 그런 명령을 반복하지 않았더라도 깨졌겠지만, 히틀러 덕에 몇 년 일찍 전쟁이 끝났다고 해 둡시다.
아, 지도상에서 충격군(Shock Army)이라는 것이 이쯤에서 등장하는데, 충격군은 적의 방어진을 향한 강력한 포병사격 및 정예 보병의 돌격을 바탕으로 전선의 구멍을 뚫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러한 군대가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종심 전투 교리의 완벽한 부활 및 소련군의 공세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처음 충격군이 결성된 게 1941년 11월 25일입니다. 원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충격군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독소전 직전에는 없었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르제프와 하리코프는 꼭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는데, 하리코프는 시기가 좀 멀고(1942년 5월), 르제프는 다루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서 별수없이 나중에 청색 작전 혹은 동계 전역을 다룰 때나 연재해야 할 판입니다. 독일군 장성 중에서 발터 모델을 가장 좋아하는 저로서는 좀 눈물나는 상황입니다만...
여하간 여기에 라스푸티차를 거쳐, 이런 식으로 청색 작전 이전의 상황과 연계되는 겁니다.
에필로그 - 장군들
그 수많은 장군들을 일일이 다 보는 건 솔직히 넌센스고...; 적당히 특징적인 인물 몇몇 정도, 그러니까 잘 알려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짚어봅시다.
우선 독일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집단군의 지휘자였던 세 장군들부터 이야기해 보죠.
북부 집단군의 사령관인 빌헬름 리터 폰 레프(Wilhelm Ritter von Leeb) 원수는, 북부 집단군이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서(!!) 진격을 정지하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돌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레닌그라드를 점령할 능력이 안 된다며 나치 당 차원에서 비판받는 신세가 됩니다. 애초부터 히틀러와 사이가 별로였고,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프로이센의 전통적인 귀족 무인이었던 그가 히틀러가 고까웠던 것은 뭐 말할 필요도 없었던 터라, 아예 그 김에 히틀러에게 직접 예편을 요청합니다. 이게 받아들여지면서 북부 집단군의 전면에는 제18군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그 폰 퀴흘러가 부임합니다.
아 이게, 생각난 김에 찾아봤더니 나무위키에서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야만적인 학살을 혐오했다고 하고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절멸 명령서를 받아들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게 지금 영문 위키피디아는 물론이고 외국 사이트를 뒤져봐도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심지어 독일어 위키피디아에도 없구요. 이것 참... 이래서 출처 표기가 중요한 겁니다. 제가 나무위키를 절대로 신뢰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구요(그래서 제가 연재한 글 내내 나무위키는 출처로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겁니다). 솔직히 영문 위키피디아도 그렇게까지 신뢰할 만한 수준은 못 되는데, 얘들은 최소한 책을 바탕으로 한 출처는 제시하거든요.
단, 독일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나치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며, 뉘른베르크의 재판도 서류가 뒤바뀌는 바람에 유죄 판결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폰 레프 본인과는 무관했다는군요. 이는 독일어 위키백과 및 독일 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 일부(
https://www.dhm.de/lemo/biografie/wilhelm-leeb)에서 확인이 가능한 바, 재판에 관한 이 내용은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여하간 빌헬름 폰 레프는 이걸로 군 경력을 종료하게 되고, 중부 집단군의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 역시 일련의 방어전에서 줄줄 밀렸다는 이유로 해임됩니다. 다만 폰 보크는 폰 레프와는 달리 이후 청색 작전에서 남부 집단군의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죠. 그러나 청색 작전은 다들 아시다시피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한 번 해임된 폰 보크는 결국 복직되지 못하고 역시 그렇게 군 경력을 마무리합니다. 히틀러가 죽고 되니츠가 불렀을 때 사령부로 돌아가다가 사망하는 바람에...
페도르 폰 보크에 관한 기록 중 특이한 건 전쟁범죄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자료가 미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마는,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는 그가 전쟁범죄와는,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전쟁을 기획한 범죄가 아닌(이 점은 어느 누구라도 빼도박도 못하는 범죄 맞습니다), 인간성을 상대로 한 범죄, 예컨대 포로들의 무자비한 처형이나 절멸 수용소행, 아인자츠그루펜으로 대표되는 민간인 학살 등과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죠. 절멸 명령으로 유명한 코미사르 명령이 떨어지자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최소한 저항은 했다고 휘하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이 책으로 남아 있는 바(2차 출처는 독일어 위키피디아), 현재로서도 그에 대한 별다른 혐의점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희한한 것은 그가 앞서 언급했듯이 남부 집단군의 사령관을 맡았다는 것이고, 아시다시피 남부 집단군은 엄청난 전쟁범죄 행위로 도배가 되어 있는 수준인데, 이 사람이 전쟁범죄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건 놀랍다 못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죠.
남부 집단군의 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남부 집단군은 절멸 부대가 활개치고 다닌 것을 생각해 보면 바로 아실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전쟁범죄가 많이 일어난 곳이었고, 이 당시의 군권을 가지고 있던 폰 룬트슈테트가 여기에 책임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최소한 그에게는 아인자츠그루펜의 행동을 막을 만한 권한이 있었습니다. 결국 최소한 암묵적으로 전쟁범죄에 동의한 셈입니다. 여하간 로스토프의 후퇴를 계기로 해임된 그는 서부 전선으로 발령받아서 대서양 방벽을 세우는 일을 하게 되고, 그래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사령관의 이름에 그의 이름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번의 파면과 재임을 거쳐서 1945년 3월에 최종적으로 군 생활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이후 연합군측에 포로로 잡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도 피고로 참여하게 되죠.
이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각각 게오르그 폰 퀴흘러, 귄터 폰 클루게, 그리고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임명됩니다. 그런데 폰 라이헤나우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면서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게 다시 페도르 폰 보크였던 것이죠.
군 단위의 사령관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무진장 갈려나갔습니다.
북부 집단군의 경우 제16군 에른스트 부슈만 자리를 지켰고, 제18군 게오르그 폰 퀴흘러는 북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했기에 게오르그 린데만이 사령관직을 이어받게 됩니다.
중부 집단군의 경우 제2군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제국남작은 자리를 지켰고, 제4군 귄터 폰 클루게는 중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 제9군 아돌프 슈트라우스는 발터 모델로 교체됩니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이게 신의 한 수였죠.
또한 제2기갑집단군의 하인츠 구데리안도 루돌프 슈미트로 교체됩니다. 1년 가량 후방에 있던 구데리안은 이후 기갑총감을 거쳐 총참모장의 자리에 오릅니다. 후방에 있던 때에 아프리카의 로멜이 자기를 대신할 사령관으로 구데리안을 요청하지만 본부로부터 거절당하죠. 이외에 제3기갑집단군의 헤르만 호트는 이미 남부 집단군의 제17군으로 가 있던 터라 게오르그-한스 라인하르트가 사령관으로 있었고, 제4기갑집단군의 에리히 회프너는 리하르트 루오프를 거쳐 청색 작전 개시 당시에 다시 호트가 집단군 사령관을 맡습니다.
남부 집단군의 경우 제1기갑집단군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자리를 지켰고, 제2군이 1942년 1월 15일에 중부 집단군에서 남부 집단군으로 배속됩니다. 제6군의 발터 폰 라이헤나우는 남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관계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그 자리를 꿰찼고, 제11군은 여전히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맡고 있었으며, 제17군은 1942년 4월까지 호트가 맡았습니다.
독일군은 엄청나게 길게 이야기했는데, 소련군은... 아 이게, 군부터 40개 가량인 소련군을 언제 다 본단 말입니까? 이거 다 이야기하면 정말로 이야기가 산으로 갑니다. 그래서 다는 못 이야기하고, 전선군 단위로 이야기할 수밖에요. 1941년 12월 기준으로 이야기해 봅니다.
북부 전선군에서 나눠진 두 전선군 중 하나인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사령관은 미하일 호진(Mikhail Khozin)이었습니다. 헌데 이 사령관은 무리한 공세로 인해 포위당한 제2충격군의 구원에 실패하고, 그래서 1942년 6월부로 레오니트 고보로프(Leonid Govorov)로 교체됩니다. 제법 뛰어난 포병장교였던 그는 모자이스크 탈환의 공을 세워 이미 중장을 달고 있었고, 북부 집단군을 상대로 한 전역에서 레닌그라드 해방과 북부 집단군 섬멸이라는 큰 공을 세워 소련군 원수의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이전 글에서 카투코프 이야기를 했는데, 카투코프의 원수는 기갑원수라서 원수는 원수이되 그 급이 4성 장군과 동일했는데, 고보로프는 문자 그대로 5성 장군이었던 것입니다(실제 계급장은 큰 별 하나였지만요).
볼호프 전선군의 사령관은 키릴 메레츠코프가 임명되었습니다. 볼호프 전선군은 1941년 12월 17일에 처음 편성되었는데, 앞서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던 류반 공세를 위한 편성이었습니다마는, 깔끔하게 박살납니다. 그리고 이 패전의 책임을 두고 왈가왈부했는데, 이미 한 차례 NKVD에 걸려서 모진 고문을 당한 적이 있는 - 황당하게도 그 이유는 서부 전선군의 패장 드미트리 파블로프와 친했다는 이유였습니다 - 키릴 메레츠코프는 이번에 패전의 책임을 자기 것으로 돌렸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격렬하게 패전의 책임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습니다. 이게 먹혔는지 어쨌는지 하여간에 그는 유임됩니다. 이후에 레닌그라드 해방을 거쳐 카렐리야 전선군을 맡으면서 핀란드군을 밀어내고, 종전 직전에는 만주 방면군 사령관이 되죠. 어쨌든 그래서 그는 가까스로 영웅으로 남는데 성공했습니다. 비아냥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죽을 뻔한 것을 그의 통찰력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죠. 본인의 능력 자체도, 다른 소련군의 장군들보다는 좀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습니다만 최소한 군을 말아먹을 정도는 아니었구요.
칼리닌 전선군의 사령관은 그 유명한 이반 코네프(Ivan Konev)였습니다. 확실히 능력이 있는 장군이었던 그는 모스크바 북부의 성공적인 반격을 수행하여 상장(3성 장군)의 자리에 올랐고, 서부 전선군, 북서 전선군 및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직을 두루 거칩니다. 그는 쿠르스크 대전투에도 참여했고, 벨고로드, 오데사, 하르키우, 키예프 등 굵직한 남부의 대도시들을 탈환할 때 모두 그가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굉장히 많은 전공을 쌓았고, 그래서 1944년에 그는 별 다섯 개를 답니다. 게오르기 주코프와의 베를린 경쟁에 참여하지만 아쉽게 베를린의 점령이라는 영광은 주코프에게 내줘야 했습니다. 원래는 그 영광이 코네프가 될 수도 있었는데 당시 베를린을 향해 가던 바실리 츄이코프가 강행군으로 앞질러가버리는 바람에...
서부 전선군의 사령관은 더더욱 유명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더 설명이 필요할까요? 그는 서부 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이후에 그야말로 소련군의 두뇌가 됩니다. 주코프에 대해서는 하도 잘 설명해 놓은 책들이 많아 굳이 제가 이야기할 게 없는 수준이죠.
브랸스크 전선군은... 12월 24일에야 재편성되기는 했습니다. 여하간 당시 사령관은 야코프 체레비첸코(Yakov Cherevichenko)였죠. 근데 이 사람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뭐 눈에 띄는 전공도 없고, 금방 갈려나가기도 했고(4월에 후임자 골리코프로 교체됩니다)... 후방의 북캅카스 전선군으로 부임한 것으로 보아 특기할 만한 점은 없었던 인물이지 싶군요.
남서 전선군의 사령관은 12월 당시에는 표도르 코스텐코(Fyodor Kostenko)였는데, 이 사람은 불행하게도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실종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다시 티모셴코가 부임하게 되죠. 그 아들은 전투기 조종사였는데,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전사합니다. 2대가 모두 독소전에서 전사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남부 전선군의 사령관은 위에서 언급한 체레비첸코였는데, 그가 재편성된 브랸스크 전선군으로 부임하면서 남부 전선군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가 맡게 됩니다.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스탈린과 티모셴코의 지나칠 정도로 큰 기대 때문에 실패하는 역할을 맡습니다만, 이후에 스탈린그라드 사수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남부 전선군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남부 우크라이나의 큰 도시들인 도네츠크, 자포로제, 헤르손, 미콜라이우 등을 줄줄이 탈환하면서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으로 잃었던 신뢰를 완벽하게 회복하죠. 결국 1944년에 별 다섯 개를 달았고, 이어서 그는 루마니아와 헝가리에 이어 관동군까지 박살냅니다.
에필로그 - 그리고 제 후기
시작은 정말 별 거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까짓 거 대충 집단군 단위로 나눠서 글 하나씩만 쓰면 장땡이지 했는데... 이게 왜 책 단위로 나왔는지 연재하면서 정말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평소에도 일은 잔뜩 벌려놓고 마무리를 잘 못 짓는 스타일인데, 이번에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이리저리 이를 악물고 연재를 했습니다. 그 결과로 처음으로 제가 시작한 일을, 비록 작은 연재이지만 그것이나마 제대로 마무리를 지었고, 그래서 참 감회가 새롭군요.
글을 쓰면서 더 느꼈던 것은, 일종의 절실함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꽤나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그러니까 연재를 시작했죠), 전장 전황도와 각종 책 및 외국어 위키피디아를 이 잡듯이 뒤지면서, 제가 아는 부분이 수박의 겉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죠. 더 많은 책, 더 좋은 책, 최신 연구자료를 구해야 한다는 절실함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그 덕분에 독일군 각 지휘부대의 사령관 목록을 줄줄이 적어놓은 사이트와(심지어 어느 대대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느 사단 소속이었는지까지 다 찾아놓았더군요), 러시아 국방부에서 운용하는 - 본문 지도의 출처가 된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사이트도 찾아낼 수 있었죠.
박사학위를 따려다가 연구실을 나온 입장입니다만 연구실을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이야기해 보자면, 결국 이것도 연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똑같은 것 같더군요.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해서 논문을 내고,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것을 찾아내고...
정말 아쉬운 것은, 국내에 독소전과 관련된 우리말 서적을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겁니다. 당장 제가 주로 인용한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도 얼마 안 있으면 10년이 된 책이 됩니다. 이걸 최신 자료라고 하기는 어렵죠. 몹시 아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독소전은 문자 그대로 광산입니다. 언젠가 자료가 고갈되기는 하겠지만, 전술, 전략, 인사(Appointment), 정치, 국제 정세 등등 굉장히 많은 분야에서 시사해주는 게 많은 전쟁입니다. 그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정수(Essence)라 할 수 있죠.
독소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많은 서적들은 대부분 냉전 시기의 서방측 자료에 기반하여 쓰여 왔고, 이는 곧 독일군의 시각을 엄청나게 반영한 자료였기 때문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 독일군 팬들이 많았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당장 저만해도 독일군 팬이었고, 여전히 여러 장군들 중에서 발터 모델을 가장 존경하며(침략 전쟁에 가담했다는 행위는 부인할 수 없는 범죄였지만 그가 전쟁 기간 동안 보여준 리더십이나 탁월한 전략전술을 존경한다는 겁니다), 가장 좋아하는 전차는 판터죠. 그러나 시일이 많이 지났고, 이러한 시각은 조금씩 그 균형추를 찾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욱 소련군의 역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것도 이 시리즈를 연재한 한 이유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중에서 독일군이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고 보이는 바르바로사 작전 시리즈를 연재하기는 했습니다만.
다음 연재가 언제가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일단 제가 하는 일이 있고, 군 문제가 여전히 해결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연재할 기회가 있다면, 다음 시리즈는 우선 청색 작전 이전인 첫 동계-춘계 전황, 그러니까 12월 5일부터 6월 초까지에 이르는 독소전쟁에서의 크고 작은 전투를 리뷰하는 시리즈가 될 것 같습니다. 글 너다섯 정도로 연재하기에 딱 적당한 사이즈가 되겠다 싶더군요.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쪽으로 뵙겠습니다. 제목을 정하는 데 있어서 고민 좀 해야 할 것 같기는 하군요.
끝으로, 지금까지 읽어 주시고 잘 읽고 있다고 댓글 남겨주신 분들, 피드백을 남겨주신 분들, 추천해 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시리즈를 끝까지 연재함에 있어서 가장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역시 작가는 독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더군요. 제가 연재를 끝마치겠다는 약속을 지킴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