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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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수학여행, 수련회, 소풍의 재미는 어디로 가서 무얼 했냐보다는 누구와 갔는가가 좌우한다. 따라서 총원 80명에 같은 학년 24명, 학급당 2명만 가는 이 간부 수련회가 성공적인 추억이 되는 데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학급에서 같은 학급 행사위원으로 뽑힌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버스 내 옆자리에 앉아 나와 한쪽 귀에 이어폰을 나눠 끼고 정일영의 로맨스를 나눠 듣고 있는 그 사람은 작년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내 눈을 빼앗고, 2년 내내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며, 그러므로 내가 나를 학급위원으로 뽑아준 담임 선생님께 감사의 절을 마음속으로 20번도 넘게 하는것이다. 참 스승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할줄이야!
"넌 음악 듣는 거 엄청 좋아하는 애가 어떻게 이런 데 MP3를 안 가져오니?"
내가 아마도 조금만 자신감이 있었다면, 소위 말하는 바람둥이 스타일이었다면 지금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너랑 이러려고' 라고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이야기했을거야. 그러나 나에겐 그 정도의 자신감은 없다. 사실 자신감은 없어도 만용은 있는 스타일이라 단둘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앞뒤 옆으로 같은 학년 친구들이 타고 있는 지금은 무리였다.
사실 안 그래도 주위의 시선이 따갑기 시작한 참이기도 하다. 학급위원은 반마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고, 버스 자리는 같은 반끼리 타고 가는 게 기본이지만, 사실 그렇게 앉아서 가는 게 맘 편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연히 남자는 다른 반 친한 남자를 찾아, 여자는 다른 반 친한 여자를 찾아 남자끼리, 여자끼리 앉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이성 같지 않고 편하다는 이유로, 또 나는 MP3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자리를 바꿔 앉지 않았고, 이슈만들기 좋아하는 16세 청춘들은 그런 우리를 곱게 내버려두지 않았으니까. 안 그래도 앞뒤로 좋아 죽겠냐고 한마디 거드는 지금 저런 발언이라도 했다간 대의를 그르칠 수 있다.
"야!……. 미안하다. 그래도 그 덕에 네 음악 취향도 알고 좋네. 무슨 MP3에 만화주제가가 이렇게 많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살짝 흘겨본다. 그 시선마저 너무나 눈이 부시다. 당장에라도 빨갛게 익을 것 같은 얼굴을 숨기기가 힘들 것 같아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다. 평소였으면 흥미로웠을 창밖의 풍경이 반대편에 더 흥미롭고, 더 아름다우며, 더 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인지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아, 신이시여,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
간부 수련회 내용은 거의 특별할 게 없었다. 도착해서 짐을 풀고, 간단한 입소식, 식사 후에 숙소에 들어갔다가 가벼운 레크리에이션. 특이사항이라면 아무래도 소규모 인원인 데다가 그래도 학급위원이랍시고 온 사람들이라 짐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사실 1박 2일의 일정에 목숨 걸고 술·담배를 숨겨올 가능성도 높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학년별로 진행하는 뻔하디뻔한 레크리에이션 도중 잠깐 난 짬에, 나와 같이 체육복을 입고 강당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는, 평소와 같은 수련회를 이렇게 특별하게 만드는 바로 그 사람이 뭔가 고민하며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야, 나 상담하고 싶은 거 있는데 말하면 도와줄래? 대신 비밀 꼭 지켜야 하는데"
난 눈치가 빠른 편이다. 척하고 들으면 감이 온다. 그래서 이번에도 감이 왔다. '이건 연애 얘기구나!' 하는 감이, 하지만 태도가 생각보다 침착한 걸 보면 내가 직접 대상이 되는 얘기는 아닌 거 같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대답한다. 무슨 일일까?
"정화하고 서인이 게네 지난달에 헤어졌잖아, 근데 나랑 정화랑 애들이랑 있을 때 얘기해봤는데 정화는 아직 서인이한테 맘 있는 거 같아. 걔들 헤어진 이유도 솔직히 별것도 아닌 무심함 때문에 그런 거고, 너네랑 우리랑 어차피 방학 때도 놀러 가야 되고 계속 같이 놀건대 솔직히 엄청 불편하고"
"우리가 걔들 다시 연결해주자, 여자애들은 그렇게 도와주자고 다 얘기했는데 아무래도 남자들 도움도 받아야 될 거 같아서…. 근데 누구한테 얘기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데 너 서인이랑 친하잖아"
다행히도 상상했던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도 좋은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본인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답답하게 구는 친구놈을 비웃는 것도 질려가는 참이었고, 남자 여자 섞여서 노는 교두보 역할을 하던 둘이 사귀었다 엑스가 되는 남녀 관계상 최악의 상황이 되면서 우리끼리 노는데 심하게 어색해진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단 부탁을 받은 건 내 쪽이고, 갑의 위치에 서면 뭐라도 하나 빼먹는 게 교섭의 기본 아니었던가, 좋아! 그러자! 라고 바로 답하는 대신, 슬쩍 튕겨본다.
"나 그런 거 잘 못 하는데 대가도 없이 도와주긴 좀 그렇구 그럼 일 잘되면 네가 내 소원 하나 들어주라. 그럼 할게"
"대박…. 정화가 잘 되는 일에 왜 내가 니 소원을 들어줘야 돼?"
"애초에 그럼 네가 나한테 부탁을 왜 하고 난 그걸 왜 들어줘야 하냐 서인 이만 좋은 일인데, 내가 사귈 것도 아니고…. 싫으면 마라 난 안 함"
"아 뭐 빌건데, 아 진짜…. 니 진짜 나빴다…. 뭐 빌라 그러는데, 니가 무슨 이상한 거 얘기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선뜻 알았다고 하냐"
"야 돈 빌려달라 이런 거 안 해, 뽀뽀해줘 이런 것도 안 빌어 내가 미친놈이냐? 상식적인 선에서 빌 거니까 잘 생각해보고 대답하거라~ 수련회 아직 길다.~"
소원을 들어달라는 얘기를 하고 그 사람의 눈을 보자 아주 뚜렷하게 '고백할까 봐 무섭다.'라는 감정이 쓰여 있었다.
그 고백할까 봐 무섭다는 그 사람의 눈을 나는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지난 2년간 그녀에게 고백한 사람만 내가 아는 것만 4명이고, 깔끔하게 모두 거절당했다. 그 고백이 전부 다 싫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그녀도 마음이 있었음이 분명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녀는 결국 고백을 받는 프로세스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게 고백을 거절하면 다시 이전의 친구 관계로 돌아가긴 어려웠고 어색한 사이가 되니까
따라서 이번의 두려움도 절대 내가 너무 싫어서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친한 사람과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일 것이다. 그래 그런 거야. 그게 맞아. 그렇게 생각하자.
생애 최고의 간부 수련회가 끝나고, 그녀는 좋다는 대답을 해왔다. 우리는 그날부터 헤어진 두 남녀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애쓰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자리를 열심히 만들고, 은근히 옆에서 부추기고, 때로는 대놓고 돌직구도 날려보고, 무슨 연애조작단 마냥 재결합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것을 구실로 나와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도 많아졌고, 우리는 어느새 연애감정을 떠나 반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나에게 무슨 소원을 빌지 계속 틈만 나면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번 물어볼 때마다 한가지씩 부정의 힌트만을 주었다.
'돈 빌려달라는 거 안 빌 거야'
'숙제 해달라는 거 안 빌 거야'
'누구 때려달라고 안 빌 거야'
'엎드려 뻗치라고 안 빌 거야'
처음에 그녀는 그게 무슨 힌트가 되냐며 툴툴댔지만, 언제부턴가 내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는 것을 즐기는듯했다. 때로는 스스로 소원을 추리하기도 했으며, 참 엉뚱한 발상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또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한 2~3주를 애쓴 덕에, 마침내 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서인이와 정화가 다시 사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애들은 잘됐다며 좋아했고, 남자들은 '어휴 이 새끼 그럴 줄 알았다.'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작전 성공을 위한 뒤풀이 자리를 갖기로 했으며, 며칠 후 방과 후 캔모아라는 음료수 가게에서 만났다.
"걔들 요새 맨날 대놓고 붙어 다니더라, 나는 샴쌍둥이 인줄 알았네. 괜한 짓 한 거 같지 않냐? 눈꼴 시리게"
"뭐 어때 정화가 얼~마나 행복해하는데, 애초에 그게 부러워할 일이냐, 꼬우면 너도 연애하던가~"
그렇게 우리는 지난 몇 주간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기도 하고, 내가 잘했다고 자랑하기도 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녀는 최대한 피하려고 하고 나는 최대한 꺼내려고 애쓴 그 소원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제발 이상한 거 빌지 마라, 나도 여자다, 나도 학교에서 이미지가 있다며 호소하는 이야기를 뒤로하고, 나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서인이랑 정화랑 저렇게 좋아 죽잖아, 근데 쟤네 지난 두 달간 거의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도 안 하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처럼 지냈잖아. 그러는 동안 얼마나 심심하고 답답했을까? 여자애들끼리 있을 때 정화가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서인이는 두 달간 한숨을 달고 살더라, 그게 뭐하는 짓이냐, 그렇게 친하면서, 좋으면서 뭘 저렇게 죽자사자 감정싸움까지 하고 괴로워하는지.
난 너랑 같이 지난 2주간 붙어서 놀면서 재밌었어. 서인이랑 노는 것도 재밌고, 지호랑, 정화랑 노는 것도 다 재밌어. 니들하고 별거 아닌 걸로 싸우고 싶지도 않고, 계속 놀고 싶은데 연락 안 하면서 감정싸움하고 싶지도 않아. 근데 연애하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더라, 사람 감정이 그렇더라구, 친구로 지낼때하고 다르게, 가족끼리 서로 누구보다 사랑해도 싸우는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더라구
그러니까 우린 절대 연애하지 말고 이렇게 계속 친구로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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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헝클어뜨리며, 피곤함에 침대에 대자로 쓰러지듯 누우면서 이야기한다.
"우리 내일 아침 뭐 먹고 어디가서 놀까?"
"얘 미쳤나봐 공부해야지 시험 한달 남았는데.."
"쉴떈 쉬어줘야지 무슨 토요일에 공부야, 나 오늘 무리해서 시들어서 어차피 내일 공부할 기력 없어~~ 놀자~~"
이불에 머리를 넣고 조르듯 앵기면서 그녀에게 파고든다
"아 간지러 하지마 진짜! 너 교회에서 이러다 진짜 벌 받는다! 그리고 외고는 내신 잘 보기 어렵단말이야."
"야 벌을 받았으면 아까... 하튼 이제와 이거 가지고 무슨 벌을 받아, 그리고 교회 숙소가 어떻게 교회냐 나 나쁜 사람 만들지마라 승철이한테 미안하게, 너 외고 보내준게 나잖아, 나만 믿어 이번 시험 결과도 내가 책임진다."
"너 진짜 뻔뻔하다. 하긴 그렇게 뻔뻔하니까 무슨 선서하듯 비장하게 연애하지 말자고 하더니 지금 이러고 있지."
"2년전 얘기잖아, 강산이 변했지, 그럼 다시 얘기하지 뭐, 우리 그냥 남들처럼 연애하자, 안 싸우게 내가 다 져줄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