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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4/16 00:07:30
Name 王天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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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스포] 브루클린 보고 왔습니다.


에일리스는 마귀 같은 켈리 할멈의 식료품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고약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지만 1950년대 아일랜드에서는 주말에 두세시간씩만 일 할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지요. 그렇게 못된 켈리 아주머니의 핍박을 견디고 가난을 지고 살던 에일리스에게 기회가 옵니다. 어떤 신부님이 에일리스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게 한 것이죠. 살 곳도 직업도 모두 정해져있다고 하니 에일리스가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족들과의 이별이 괴롭지만 옷 한벌도 못사입는 이 처지를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하죠. 눈물을 참으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에일리스는 배에 올라탑니다. 엉망인 식사, 멈추지 않는 멀미, 이래저래 승객들을 흔들면서 그 배는 미국에 도착합니다. 아주 살짝 촌티를 벗고, 아무 것도 모르는 걸 모르는 척 에일리스는 세관을 통과합니다.

살던 곳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떤 최악의 장소에 뿌리내렸건 거기에는 성장의 역사가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옆에 있지요. 싫은 사람이 있다한들 그것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에일리스는 떠나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요. 야망을 펄럭이는 모험담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통과 통신의 조건을 본다면 그 당시의 이민이란 정말 생이별이 될 수 도 있었을 겁니다. <브루클린>은 그 시절 이민이라는 도전의 어려움과 슬픔을 보여줍니다. 도착 이후의 삶이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영화 속 브루클린은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거주하는 일종의 아일랜드 타운입니다. 교활한 내지인이 선량한 외지인을 괴롭히는 식의 핍박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기까지 에일리스 개인의 애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에일리스에게는 백화점 손님들에게 사근사근 말을 건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뒤에서는 한 카리스마 하는 매니저가 눈치를 장전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이 같이 머무르는 하숙집의 주인은 이래저래 말을 잘라먹고 참견하기 좋아합니다. 이민 고참들인 다른 하숙생들은 에일리스를 촌닭 취급하며 거들먹거립니다. 언니에게서 온 편지를 읽은 에일리스의 눈에서는 며칠동안이나 눈물이 가득합니다. 불친절한 브루클린 안에서 에일리스의 하루는 주눅들거나 서글퍼지거나 하며 흘러갑니다.

토니가 나타나기 전까지 에일리스 주변에 그렇게 정이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들은 퉁명스럽거나 거만합니다. 다른 영화가 그렇듯 에일리스의 심리적 고립을 보태는 존재로 기능하죠. 보통 영화라면 이들이 서서히 에일리스에게 마음을 열고 친해지는 과정을 그리며 에일리스의 적응을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갑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별로 바뀌는 게 없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만난 승객, 하숙집의 아주머니와 갈굼쟁이들, 이들은 에일리스를 무시하고 불편하게 하죠. 그러나 비웃고 난 다음에는 화장하는 법을 알려주고, 스파게티 먹는 법도 알려줍니다. 영화는 에일리스가 이들을 어떻게 바꿔나가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은 때론 에일리스와 가깝게 지냅니다. 친해질 것 같은 인물과는 에일리스가 적극적으로 거리를 두는 모습도 보여주죠. 이들은 딱히 덜 못되지거나 더 착해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에일리스가 바라보는 브루클린이란 낯선 공간의 표상입니다. 쌀쌀맞고 어렵지만, 알아갈 수록 이전처럼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에일리스 주변의 인물들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변하는 건 이들을 바라보는 에일리스의 시선입니다. 10분 전의 못된 이들이 의외의 조력자가 되어 에일리스의 성장을 돕습니다. 때문에 에일리스의 관계는 더 입체적이고 변화무쌍합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에 섞여서 에일리스는 덜 울고, 덜 흔들리며 브루클린에 뿌리내리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에일리스의 삶을 담은 편지를 읽는 로즈를 보여줍니다. 짝을 만나고 점점 행복을 찾는 에일리스의 삶 뒤로는 남겨진 사람들도 있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이 과정은 한 개인으로서의 삶이면서 한 "여자"로서의 삶이기도 합니다. 에일리스의 삶을 채우는 사람들은 신부님을 제외하면 거의 다 여성입니다. 영화는 떠나지 못하거나, 먼저 자리잡았거나, 떠나지 않은 채 그대로의 삶을 누리는 다양한 여성들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서로 돕고 이해하며 살아가죠. 이 영화는 여성들의 세계에서 한 여성이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특히 에일리스의 언니 로즈처럼 회계사가 되겠다는 에일리스의 꿈은 주체적인 여성의 삶이 세대를 넘어 계승되는 상징이기도 하지요. 에일리스의 삶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토니와 짐 역시 "여성의 사랑"이라는 테마를 보여주는 대상입니다.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 찾아온 남성으로서, 그리고 여성에게 선택받는 사람으로 이들은 존재합니다. 특히 에일리스의 마지막 선택을 고려해본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나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닌, 자립해나가는 개척자로서의 여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에일리스는 브루클린에서는 토니를, 고향에서는 짐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잘 생기고, 다정하고, 에일리스의 의견을 존중하는 남자들입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에일리스의 로맨스를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토니는 에일리스가 처음 보는 이탈리아 사람입니다. 에일리스와 같은 처지의 이민자이고 plumber라는 다소 낮은 사회적 계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짐은 에일리스가 숱하게 봐왔던 고향의 럭비 클럽의 남자이고, 안정적인 삶이 약속된 사람입니다. 토니는 에일리스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공간에 함께 적응해나갑니다. 짐은 에일리스에 의해 변화되고, 익숙한 공간으로 다시 에일리스를 끌어들입니다. 언니 로즈의 죽음 이후 잠시 들렀던 고향에서 에일리스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 싶은 짐에게 점점 끌립니다. 이것은 단지 삼각관계나 부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이민이라는 도전의 가치와 독립적인 삶에 대한 시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풍요로워보이는 선택지를 두고 고집피우며 버티던 인생이 느슨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에일리스는 고향의 삶에 젖어가다가 다시 토니에게 돌아갑니다. 이는 연인간의 신뢰와 책임이기도 하지만, 나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남자보다도 나와 그의 행복을 함께 찾아갈 수 있는 삶,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뜻하기도 합니다.

에일리스는 다시 미국을 향하는 배에 탑니다. 짐에게는 배신의 상처만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두번 다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에일리스는 떠나야 합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 같은 게 아니라, 무언가를 버리고 다른 무언가를 좇는 스스로의 결정입니다. 미국으로 간다는 다른 여자 승객에게 에일리스는 당당히 충고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선실에서 토하지 않을지, 화장실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알고 있으니까요. 죽을만큼 외롭겠지만, 그렇다고 죽진 않아요. 참으세요. 반드시 적응할 거에요. 누군가에게 충고를 할 수 있을만큼 에일리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브루클린은 에일리스가 그렇게 인생을 배우고 얻어낼 수 있던 곳입니다. 일과 공부와 사랑을 배우며 인생을 쌓은 곳. 브루클린은 후회하지 않을 어떤 땅이 아니라, 후회하더라도 자신만의 한 걸음을 내 딛을 수 있는 그런 땅입니다. 에일리스는 브루클린으로 "돌아옵니다" 앞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사랑과 미래가 있는 그 도시로요.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을 보고 벅차게 웃는 토니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그 곳, 브루클린은 에일리스의 home이 있는 곳입니다.

@ 에일리스가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계기는 켈리 여사의 오지랖입니다. 에일리스가 미국에서 결혼한 사실을 알고 그를 협박하자, 에일리스는 이에 당당히 자신의 결혼 사실을 인정하며 켈리 여사를 나무라죠. 이는 작은 세계 특유의 정체된 삶과 위선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그럼에도 이는 에일리스의 주체적인 선택,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 - 가 이제 아일랜드에서 더 머물 수 없다 - 는 수동적인 선택으로 보이게도 합니다. 오히려 켈리 여사가 이전과는 완전히 바뀌어서 에일리스를 찬양하고, 그런 태도에 스스로 환멸을 느껴 떠나는 선택을 했다면 에일리스가 더 주체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조금은 아쉽군요.

@ 이동진 평론가는 이 날도 한국영화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아카데미 클라스의 영화를 보면 이런 갈증이 심해집니다.

@ 하숙생들의 스핀 오프 드라마가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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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시아
16/04/18 10:12
수정 아이콘
한국 영화의 각성...
올해 나올 '곡성', '아가씨' 두 영화로 판가름 날 것 같습니다...
다만 곡성은 왜이렇게 기대가 안되는지.. 걱정과 우려만 앞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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