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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4/04 23:55:43
Name 王天君
File #1 steel_flower.jpg (116.3 KB), Download : 59
Subject [일반] 스포) 스틸 플라워 보고 왔습니다.


젊은 여자가 트렁크 가방을 끌고 어디론가 향합니다. 사납게 끌고 다니는 통에 트렁크 가방은 손아귀에서 도망칠 것만 같습니다. 정처없이 발걸음을 따라가던 트렁크 가방이 선착장에 도착합니다. 철조망 바닥에 부딪히며 트렁크 바퀴가 카랑카랑 소리냅니다. 배를 타려고 했다가 놓친 건지, 누군가를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자는 정처없이 사방으로 트렁크를 끌고 어지로운 발걸음만 계속합니다. 트렁크는 급회전에 바쁘고 스스로를 가누지 못해 쓰러지기도 합니다. 시퍼런 해수면을 뒤로 하고 트렁크는 여자의 손에 거칠게 붙들린 채 끌려갑니다. 음식점에서 남은 전 쪼가리를 훔치고, 집세가 적힌 종이를 바라보는 여자의 곁에서 트렁크는 잠깐씩 멈춰있습니다. 여자의 방랑은 달동네 문도 열리지 않는 어느 폐가에서 멈춥니다. 수도를 틀어보니 물이 나옵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닦고 음식 쪼가리를 먹은 후 여자는 눈을 붙입니다. 아침이 밝고, 트렁크는 고이 놓여있지만 여자는 여전히 걸음을 서두릅니다. 떨어진 운동화 밑창을 접착제로 붙이고, 여자는 "직원 구함" 이라는 쪽지가 붙은 가게들을 찾아다닙니다.

<스틸 플라워>는 주인공 "하담"의 배경을 설명해주진 않습니다. 영화는 하담이 처해있는 현재만을 그립니다.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담이 머무를 곳이 없다는 것, 핸드폰이 없다는 것(기계는 있지만 연락처로 쓰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다는 것, 같은 부재의 정보 뿐입니다. 친구나 가족도 없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저런 삶을 사는 사람이 도무지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죠. 거지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담은 들개처럼 거리를 쏘다니며 뭔가를 찾아헤맵니다. 이 여자가 삶을 헤치고 다니는 과정은 야생동물을 방불케 합니다. 영화 내내 길거리를 쏘다니고, 소리지르고, 먹을 것을 찾고, 어두운 곳에 웅크려 있고, 사람들을 훔쳐 봅니다. 동물과 다른 건, 하담이 두 발로 걷고 화폐개념이 있어서 노동력을 팔 줄 안다는 것 뿐이죠.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하담이 찾아 헤매는 것은 일자리입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오늘날 오포세대나 취업난에 대한 우화를 그리는 건 아닙니다. 그건 "미래"에 대한 고민이고 "더 나은 선택지"에 대한 이야기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의미와 생계의 유지를 길게 내다보고 하는 고찰에 가깝습니다. 하담에게는 앞날을 내다 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쫓기거나 불안해하지도 않아요. 하담의 하루하루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축적의 재료가 아닙니다. 하루는 하루로 끝나고 하담은 그 사이클 안에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짐승은 1년 후, 5년 후를 예측하며 살지 않지요. 하담도 마찬가지로 하루를 살아나갑니다. 그에게는 상대적 우열에서 오는 불만도, 남은 인생에 대한 불안도 없습니다. 이 모든 불안과 부족함은 매일매일 당면하는 생의 과제입니다. 불행이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공백이죠. 배가 고프니까 뭘 먹어야 하고, 뭘 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고, 그래서 하담은 도시 사이사이를 돌아다닙니다. 하담은 지극히 원초적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일을 찾습니다.

일을 찾아다니며 하담은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하담이 원시적인 인간입니다. 일할 사람을 찾는 세탁소에 다짜고짜 들어가 일하고 싶다며 세탁소 주인 앞을 떠나지 않습니다. 일본식 식당에 일자리를 찾으러 가서도 하담은 답답하리만큼 침묵을 지킵니다. 거짓말로 이력서를 채워넣지도 않습니다. "이랏샤이맛세~"를 따라해보라는 직원의 말에 활기찬 인사 대신 악다구니를 내지릅니다. 단 한번도 이런 가게에서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아니면 이제야 언어 능력을 깨우친 사람처럼 냅다 소리를 지릅니다. 엉뚱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하담의 이런 면모에 직원은 질려버립니다. 채용거부의 의사에도 하담은 뚱한 얼굴로 가게를 나서지 않습니다. 마침내 직원은 하담을 끌어내려 하고, 하담은 나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버팁니다. 한참 몸싸움을 벌인 끝에 하담은 쫓겨납니다. 직원은 욕지거리를 쏟아부으며 돈을 쥐어주고 하담을 보냅니다. 하담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다시 일자리를 찾아 헤맵니다.

저런 사람에게 어떻게 일을 시킬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자연스레 타산적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소 몇개월간은 일을 해줘야 하는데, 연락처도 집도 없고, 고객들에게 생글거려야 하는 일을 21세기 모글리에게 맡길 순 없겠지요. 그렇다고 이 체념을 결론으로 이을 순 없습니다. 일을 못 할 것 같고, 믿기가 어려우니까 일을 하고 싶은 하담이 굶어죽는 게 당연하지 않지요. 하담의 눈에 작은 가능성이 하나 들어옵니다. 길거리에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딱히 우렁차게 인삿말을 건넬 필요도, 튼튼한 몸뚱이를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영화 바깥의 관찰자들도 생각하게 됩니다. 저 일이라면 하담도 할 수 있겠다, 하담은 저 일을 하고 싶어하는구나.

영화는 하담의 시선을 통해 전단지 돌리는 아주머니를 길게 보여줍니다. 이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늘 마주치는 풍경입니다. 노상 한복판을 점령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단지를 나눠주지만 무표정한 행인들은 갈 길을 서두르고, 주머니 속에 꽂은 손을 빼내지 않지요. 강요와 애걸의 순간들이 반복되고, 아주머니는 낮은 확률로 일감을 덜어냅니다. 전단지 돌리는 일은 한 인간이 수백 수천의 인간에게 계속 외면받는 일입니다. 어떤 감사도 받지 못하고, 귀찮은 존재 취급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우습게도, 하담은 이 아주머니에게조차 무시당합니다. 하담은 아주머니의 시야 안에서 우두커니 서있지만 아주머니는 계속 눈을 마주치면서도 전단지를 나눠주진 않습니다. 왜 보냐고 말도 걸지 않아요. 힐끔거리고, 다른 행인에게 전단지를 내밀고, 거절당한 전단지를 다른 고객에게 다시 들이밀고, 시야 바깥으로 하담을 밀어냈다가 다시 힐끔거리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영화 속 세상은 이렇게 차갑습니다. 하담은 그 차가운 밑바닥 세계에도 끼지 못합니다. 전단지 한 장의 의미도 갖지 못한채 세상을 밟고 서있는 게 바로 하담의 위치입니다.

희망도 의미도 희미한 세상이 누구에게는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정답이 됩니다. 아주머니는 결국 하담에게 말을 겁니다. 너 이 일 하고 싶어? 이거 해볼래? 하담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담은 열심히 전단지를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공격적으로 사람들의 앞을 막고 전단지를 내밀곤 하죠. 하담의 할당량은 금새 없어집니다. 그런데, 하담에게 일을 시킨 아주머니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담은 쌩고생만 실컷 하고 아무 결실도 얻지 못합니다. 세상 가장 시시하고 하잘 것 없어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하담은 뜯어먹힙니다. 영화 속 노동과 급여의 먹이 사슬에서 하담은 우리가 최하위로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약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노동에 그렇게 배신당하고 하담은 다시 헤맵니다. 그리고 골목 그림자 속에 숨어 훌쩍거립니다. 그런 하담에게 어떤 중년의 남자가 다가옵니다. 돈 필요하냐, 일 해보지 않을래. 하담은 그 남자를 따라갑니다. 횟집에는 부엌행이 예약된 손님들의 잔반과 식기들이 잔뜩 있습니다. 하담은 열심히 치우고 닦고 땀흘려 일합니다. 그렇게 일이 끝나고 사장은 봉지 하나를 건넵니다. 수고했어, 내일도 나와. 하담은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도 봉지 안에 먹을 게 있으니 일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결과물을 얻긴 했습니다. 다음 날도 하담은 횟집에서 치우고 닦고 씻고 문지르며 일을 합니다. 어떤 여자가 들어와 하담에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하담은 그저 일만 합니다. 여자는 이제 그만 가보라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하담에게 슬슬 화가 납니다. 하담은 어거지로 닦던 도마에 매달려 계속 수세미질만 합니다. 하담은 일을 해야 합니다. 미친년이라는 욕설과 다그치는 고성에 일일히 반응할 틈이 없습니다. 말이 안통하는 하담에게 여자는 몸싸움을 겁니다. 하담의 노동은 다시 위기에 처합니다. 다행히 사장이라는 작자는 그 여자를 쫓아내줍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담에게 돈을 주진 않습니다. 내일 준다는 약속만 들은 채 하담은 은신처로 돌아옵니다.

하담은 횟집에서도 끝내 쫓겨납니다. 하담을 미심쩍게 여긴 그 여자가 하담의 뒤를 밟았고, 그 여자의 뒤를 사장이 미행했던 거죠. 쓰레기 투성이의 폐가에서 사는 여자애에게 베풀 노동의 기회는 없습니다. 하담은 일자리를 박탈당합니다. 그럼 그동안 일한 만큼의 돈이라도 받아야겠죠. 사장은 단호합니다. 가라고. 안 가? 꺼지라고. 하담은 별 다른 껀덕지가 없습니다. 돈 주세요. 돈 줘요. 악이 서린 하담의 주장은 점점 애처로워지고, 사장의 단답에서 어떤 협상의 여지도 없습니다. 가라고!! 하담은 다시 내팽겨쳐집니다. 하담의 내일과 내일 모레는 다시 위기에 처합니다. 하담은 전단지 돌리는 아주머니에게 찾아갑니다. 같은 장소 같은 일을 하는 여자에게 하담은 다짜고짜 소리 지릅니다. 돈 줘요. 돈 줘요!!!!!!!! 여자는 경찰에 신고하고, 하담은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담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아무런 증거도 설득력도 없이 하담은 일 한 만큼의 돈을 받아야 합니다. 하담은 전단지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있을 때 다시 한번 습격합니다. 돈 내놔. 돈 내놔!! 짧은 요구로 사정없이 물고 늘어지는 하담에게 아주머니는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돈을 몇만원 쥐어줍니다. 하담은 돈을 채갑니다. 횟집에도 복수를 겸하고 싶지만 사장은 강력하고 가게도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하담은 물고기 한 마리를 훔칩니다. 봉지 속에서 퍼덕이는 물고기는 하담의 손에서 바다로 옮겨집니다. 시시한 절도, 눈치못챌 타격, 무의미한 해방. 이 의식이 끝났으니 하담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지단한 하루 속에서도 하담의 흥미를 끄는 게 있습니다. 따가닥따가닥, 하담의 귀를 간지럽히며 기어이 훔쳐보게 만든 곳은 탭댄스 학원입니다. 하담은 강의실을 몰래 들여다보고, 신발을 신어보고, 경쾌해진 발자국 소리를 잠깐 즐겨보기도 합니다. 결국 하담은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몇장을 학원 신발장에 놔두고 신발을 멋대로 사갑니다. 하담은 웃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담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바쁘지만은 않습니다. 이전까지 카메라는 하담의 걸음걸이를 지독하게 쫓아다녔고 스크린 바깥의 사람들은 처절한 삶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담이 걷는 장면은 더 이상 투쟁의 연속만은 아니에요. 하담의 걸음에는 리듬이 싹트고 가끔씩은 한 군데 멈춰서 그저 소리만 울려퍼지기도 합니다. 하담의 걸음에 음악이 깃들고, 피로와 스트레스 뿐이던 삶은 조금씩 빛납니다. 본능뿐이던 삶에 또 다른 이유가 생긴 거죠. 하담의 걸음걸이는 가끔씩 곡선을 품습니다. 빙그레 돌고, 고요한 밤은 맑은 소리로 채워집니다. 하담은 마음씨 좋은 전집의 사장 아래서 일자리도 구합니다. 무뚝뚝한 만큼 싹싹하게, 테이블을 치우고 계산을 도우며 하담의 삶은 충만해집니다.

영화는 하담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횟집 사장의 애인 비슷한 그 여자가 하담이 일하는 곳으로 쳐들어옵니다. 창녀, 걸레, 갑자기 쏟아지는 폭언에 하담은 다시 야생적으로 반항합니다. 그러나 물불 가리지 않는 어른의 폭력에는 대항할 수 없습니다. 지켜줄 사장도 없습니다. 일 하고 싶어!!!!!! 여자의 오해에 단 한마디 부정도 설명도 없이 하담의 절규가 계속 가게를 울립니다. 그러나 하담은 무력합니다. 손님들은 관객으로서 제 자리를 지킵니다. 부끄러움을 잊은 여자의 손찌검에 하담은 몇번이나 내동댕이쳐집니다. 분풀이 쇼가 끝나고 여자는 자리를 떠납니다. 헝클어진 머리, 거기에 엉겨붙은 계란 노른자, 이런 저런 국물, 음식 찌꺼기들. 벌벌 떨며 하담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해봅니다. 알 수 없습니다. 하담은 열심히 일을 했고, 그 사장은 일을 시켜줬을 뿐인데. 세상을 모르는 아이도 단 한가지 감정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하담은 수치스럽습니다. 분하고 부끄러워서 더 이상 가게에 머물 수가 없어요. 따그닥거리는 발을 끌고 하담은 가게를 떠납니다.

영화는 처음의 선착장을 다시 비춥니다. 밤과 아침이 보라빛에 섞여있는 풍경 속에서 하담은 미친 사람처럼 선착장을 쿵쿵 거리며 걸어다닙니다. 바다는 훨씬 더 사나워졌고 선착장 바닥 위로 물결이 튀어오릅니다. 하담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려치는 파도에 몇번을 맞고서도 더욱 더 꼿꼿하게 서서 울분을 토해냅니다. 하잘 것 없는 몸뚱이는 몇번이나 쓰러집니다. 그 거친 따귀에 하담은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분을 다 발산했을까요. 혹은, 철썩이며 적셔준 파도세례에 서러운 기억이 다 씻겨나갔을까요.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말하는 짐승은 일거리를 찾아다닐 겁니다. 멍청하고 고집스럽게 외로운 길을 걸어가겠죠. 우리는 감히 이 소녀에게 지혜와 애정을 기도할 수 없습니다. 캉캉거리는 그 소리가, 시멘트 바닥의 따닥거리는 그 소리가 모두 마찰에서 오듯, 하담의 삶 또한 충분히 딱딱해지기를 바래야죠. 부딪히는 모든 것이 음악으로 화하기를. 모든 풍랑에 금속음을 내며 맞서고 버티기를. 강철의 꽃은 그렇게 피어서 시들지도 꺾이지도 않을 겁니다. 환희와 울분이 섞인 마지막 그 얼굴은 섞일 수 없는 세상에서도 고개를 떨구지 않을 겁니다.

@ 정하담 배우는 이 캐릭터를 <들꽃>의 하담과 완전히 별도의 인물로 생각했다더군요.

@ 정하담 배우는 <들꽃> GV 때보다 훨씬 더 활기차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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