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를 태운 버스가 사라지고 난 뒤, 상태창과 함께 검은 기류같은 것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처음 타임 슬립(?)했을 때랑 똑같은 상황이다. 아직 제대로 뭔가 이뤄낸 것도 없는데, 설마
이대로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약간 걱정은 되지만, 역시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다시 돌려 보낼 거라면, 굳이 저런 상태창을 띄울 필요가 없었을테니까.
거기에 '1일차 종료'라는 말은 시작할 2일차도 있다는 말일테니.
- 키득키득. 머리가 빨리 돌아가네요. 역시 재밌네요.
내 앞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그 때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다.
물론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적응이 빠르네요. 이제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네요.
잠시지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봤다.
하지만, 역시 그럴 리가 없다. 이 생생한 감각들, 감정들.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이미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있는데, 이 이상 놀랄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둠 속에서 이렇게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역시 생각도 빠르고, 이해도 빨라요. 짝짝.
뭐 별건 없어요. 이건 튜토리얼 라운드니까, 이를테면... [중간 점검이라는 건가.]
- 그렇죠. 보통 이런 경우에 본인한테 일어나는 일을 현실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쿡쿡.
충격적인 말이다. 이 말 뜻은 즉, 나 말고도 이런 일이 겪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 뭐 아저씨한테는 굳이 뭘 자각시키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겠네요.
그럼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죠. [뭐지?]
- 간단한 거에요. 헤헤. 2일차의 시점을 선택하는 거죠.
2일차의 시점을 선택한다라. 그렇다면 다음 타임 슬립 시점을 정한다는 말인가.
['오늘' 다음 날은 2일차로 안 되는 건가?]
- 음. 설명하기 곤란한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생략할게요.
어쨌든 다음 날을 2일차로 시작하는 건 어려워요.
어렵다는 건 완전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굳이 다음 날을 2일차로 열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결국 다른 시점을 2일차의 시점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점이 하나 있다.
- 와아. 아저씨 보기와는 달리 정말 머리가 좋은데요?
벌써 거기까지 간파한 건가요? 키득키득.
1일차와 2일차 사이의 공백. 그 공백에 대한 행동은 지금의 내가 하는 것인가,
20살의 내가 하는 것인가. 그리고 또 그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즉, 하루만 내가 달라져봤자 공백 기간동안 20살의 내가 원래의 나로서 행동한다면, 1일차의 쌓아올렸던 것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 키득키득. 저희도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런 점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 시점과 시점 사이의 공백은 현재의 아저씨를 기반으로 한 인격이 채울거니까요.
아니, 정확히는 아저씨 본인이면서 아니라고 해야하나? 키득키득. 어쨌든 그 기간을 채우는 게
아저씨 본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해요. 그리고 그 사이의 기억은 2일차로 돌입하면 자연스럽게 알겠지만,
자연스럽게 생각하려고 하면, 본인 기억처럼 떠오를 거에요.
이런 저런 생각과 여러 질문거리들로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다음 시점만 결정하면 문제 없이 다시 이 사건이 굴러간다는 말이다.
[오늘 내가 한 행동으로 미래의 사건이 바뀔 수도 있는거 아닌가?]
- 글쎄요? 아저씨하나 행동이 달라졌다고해서 커다란 틀이 달라질까요?
물론 인간들은 인과율이라는 무시무시한 힘을 모르니 그럴 법도 하네요.
어쨌든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인과율 때문이 아니어도 우리 쪽에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조정 작업을 거치니까요.
점점 복잡해지는군. 어쨌든 커다란 틀의 사건은 큰 변화가 없다는 건가.
그럼 나비효과라는 말은 틀린건가?
- 너무 많이 나가시네요. 뭐 나비효과도 틀린 말은 아니죠.
어쨌든 이제 선택해주시겠어요? 아, 참고로 미션을 공략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 수록 좋아요. 저한테도, 아저씨한테도요.
뭐 이건 직접 겪어보면 아실테니. 자 빨리 선택해요.
슬쩍 고개를 내민 의문을 꾹 누르고 생각을 전환한다.
어느 시점으로 가야 가장 내게 유리한 2일차를 만들 수 있을까.
빨리 공략할 수록 내게 어떤 이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게 질질 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고백이란 것도 타이밍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1일차에서 은하의 확실한 호감을 샀다. 그렇다면 일주일에서 이주일 사이의 텀을 두고 2일차에 쐐기를 박는다면?
사람마다 상대의 연애 감정을 받아들여주는 데 필요한 최소 기간은 다르다. 누군가는 하루만에 아니, 몇 분만에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한 달, 일 년의 긴 시간을 두고 사랑하고, 연애 감정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1일차의 받은 느낌대로라면...
이주일쯤 되는 시점이 적당할 것 같다. 2주 정도면 충분히 은하가 날 받아들일 예열시간이 될 거야.
개강하고 2~3주차 되는 지점에서 은하와 오래 있을 수 있고, 고백할 틈을 엿볼 수 있는 시점이라면, 역시 그 날 뿐이다.
[좋아 결정했어. 해오름제. 그 날로 나를 보내줘.]
- 어디보자... 해오름제라...
학교의 행사 중 하나인 해오름제는 명칭같은 거창한 축제같은 건 아니다.
단지 단과대 학생 전부가 건물 전체에서 술파티를 여는 느낌의 행사일 뿐.
- 좋아요. 그럼 건승하길 바라죠.
쏴아아아아.
시야를 덮었던 검은 기류들이 다시 한점으로 빨려들어간다.
순간, 어지러움이 핑 돌고, 토할 것만 같은 느낌에 구역질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대로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2.
<<< >>>
2일차.
메인 미션 - 현은하 공략
서브 미션 - 박재신 엿멕이기! 키득.
으으. 눈을 뜨자마자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어디보자, 시점은?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달력을 살핀다.
3월 둘 째주 목요일. 제대로 온 것 같다.
은하와 첫 만남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된 거지?
으윽.
아주 미약한 두통과 함께, 마치 내가 '직접'했던 일들처럼 머릿속에 그대로 기억이 틀어박힌다.
헤어진 날부터 시작된 문자 주고 받기부터, 가끔은 만나서 밥도 먹었다. 틈틈이 은하의 마음을 끌만한
농담이나 이야기도 했고. 호감을 잘 유지하긴 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도 없었다.
아마 그 결정적인 한 방은 내가 '직접'하라는 소리겠지.
나이지만 내가 아닌, 공백을 채워준 나에게 한 가지 가장 고마운 점은 아주 머리를 깔끔하게 쳤다는 점이다.
더불어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깔끔한 차림새의 옷들까지 구비해뒀다는 것도.
화려하지도 않고, 촌스럽지도 않은 적당한 옷들을 골라 입고 거울 앞에 선다.
역시 머리는 짧고 단정하게 깍은 편이 훨씬 낫다. 옷도 요란하지 않은, 적당한 수준으로 프린팅 된 맨투맨에
슬림 스트레이트핏 바지, 거기에 스포티한 야구잠바로 마무리.
거 참, 내가 봐도 나 대학생이오 써 있는 차림새다.
[어쨌든 가볼까.]
학교에 도착하자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정문에서부터 느껴졌다.
오늘은 저녁부터 시작될 해오름제가 있는 날이기도 하지만, 학교 체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정문부터 들려오는 열띤 응원과 함성소리가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했다.
- 은하야 어디야?
체전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루고 문자를 통해 은하의 위치를 살핀다.
진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오늘 하루인 만큼 최대한 은하와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 체전 응원하고 있어. 선배들도 그렇고 동기들도 다 같이 응원하자고 해서.
여기 농구장이야.
오케이.
은하에게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가볍다. 어쩐지 이런 날은 옛날부터 운도 좋고, 뭐든 잘 됐었다.
거기에 농구라니. 완전 날 위한 셋팅이잖아?
이래뵈도 어릴 때 부터 농구를 즐겨온 몸이다.
옛날에 나는 애석하게도, 이 체전에 그 어떤 종목에도 출전하지 못했었다.
출전하기 위해서는 사전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하는데, 당시 용기없던 나로서는
괜히 나갔다가 못해서 욕만 먹을 것이 걱정되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었다.
결승까지 올라간 우리 과팀에서 부상자가 발생해, 예외적으로 사전 명단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경기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자신있게 손들어 볼 용기조차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를 거야.]
부상당한 게 정확히 누군지는 기억 안 나지만, 미리 사과한다. 미안합니다.
그 빈 자리 고맙게 받고 활약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은하의 호감까지 받아 가겠습니다.
그러니 잘 다쳐주세요.
6 끝. 7에 계속.
헉헉. 힘듭니다. 글쓰기.
그래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유유.
튜토리얼 현은하편 아마 9편정도에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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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 아기목소리가 거슬립니다.
1. 먼 훗날 딸(?)이 엄마를 만나게 하기위해서 타임슬립을 했다던가..
2. 주인공이 로또라던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투기를 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흐흐
3. 인과율이라니 무섭네용 .. 저렇게 착한 은하가(?) 마나님이 된다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