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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2/14 18:28:00
Name 아케르나르
Subject [일반] MRI 찍던 날.
처음 MRI를 찍고 나서 그 결과를 듣던 날, 나는 내가 뇌종양이라는 사실보다 다른 것에 좀 더 놀랐다. 내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것은, 의사가 말해주기 전엔 물론 몰랐지만, 약 한달여의 기간에 걸쳐 안과와 신경과, 또 MRI를 찍는 절차(?)를 밟으면서 '내가 뭔가 큰 병에 걸렸나 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병명을 고지받았을 때는 놀람이나 당황 같은 것보다는 막연한 뭔가가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오히려 당시 내 관심을 더 끌고, 또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MRI로 찍힌 내 두개골의 단면이었다.

내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못생긴 편이지. 하지만, TV등에서 학습된 내 두상의 이미지는 거의 구형에 가까웠던 것에 반해, 실제로 본 내 두개골의 단면은 뒤통수가 거의 일자에 가깝게 찌그러진, 마치 고릴라의 그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처음 그것을 봤을 때 나는 저으기 당황했다. 저게 내 것이 맞나? 뭐 저렇게 생겼지... 머리 중앙에 박힌 종양 이야기는 사진을 본 순간부터 내 관심의 가늠자에서 살짝 비껴났다. 내 초/중/고등학교 시절의 반 친구들은 과연 통찰력이 대단했다.. 나를 한 눈에 알아보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니, '오랑우탄'이니 하는 별명을 지어낼 줄 알았으니 말이지.. 어쩐지 일반 사진을 찍어도 내 머릿속 이미지랑은 영 딴판이더라.. 아기였을 때, 내가 워낙 고집이 세서 바로 눕혀놔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곤 했다던데. 부모님이 그 때 아예 엎어 놓고 길렀으면 좋았을 걸. 난 왜 그렇게 고집이 셌던 거야.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나는 이후 2년 마다 MRI를 찍고 있다. 진단과 수술 후 확인 같은 것 까지 합치면 대충 일곱번쯤 찍은 것 같다. 검사를 기다리면서, 폐쇄 공포증 때문에 이걸 못 찍는 사람도 실제로 보곤 했지만, 난 익숙해져서인지 들어가면 한숨 자고 나온다. 처음 찍을 때만 해도 가격은 비싸고, 환자를 위한 편의 같은 건 거의 없었는데, 얼마 전 찍을 때는 귀마개도 끼워주고, 덮고 자라고(?) 담요도 준다. 환자가 올라가서 눕기 편하라고 기계가 알아서 낮게 내려와 있기도 하고... 2년마다 찍다 보니 이런 변화들도 눈에 띈다.
며칠 후 결과 보러 외래를 가면 나는 아마 다시 한 번 내 두개골 사진과 마주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 찌그러진 뒤통수는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저게 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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쎌라비
13/02/14 18:39
수정 아이콘
나으셔서 다행입니다. 저는 뒤통수는 잘생긴 편인데 얼굴이 좀 그래요. 예전에 두상보고 잘생겼다고 쓰다듬던 어르신이 얼굴보고는 그냥 말없이 조용히 가시더라구요.
자기 사랑 둘
13/02/14 18:40
수정 아이콘
저도 큰 수술 3번이나 해봐서 그 마음 100번 이해합니다.
토닥토닥 ..힘내시길 바랍니다.
승시원이
13/02/14 20:57
수정 아이콘
디스크로 MRI 한번 찍어봤습니다. TV에서만 나오선 디스크 모양이랑 똑같은게 내 허리에 있다는게 신기하더라는... (함 더 찍어봐야 하는데...)
자전거세계일주
13/02/14 22:54
수정 아이콘
본인이 처한 상황도 가벼운 농으로 긍정적으로 보시는 걸 보니 틀림없이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날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전 군용 전투 62호도 안 맞는데다, 오른쪽 뒤통수만 튀어나온 짱구 머리입니다.
아, 앞쪽은 차...차마...ㅠㅠ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셨길...
아케르나르
13/02/15 10:14
수정 아이콘
덧글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름 유머스럽게 써본다고 했는데, 좀 무겁게 받아들여주셔서 괜히 멋적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쓰는 투병기를 저도 자주 보곤 했는데, 저걸 왜 공연히 인터넷에 올리는 걸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제가 올리고 보니 이해가 됩니다. 혹 불쾌하신 분이 있더라도 이해 바랄게요.
13/02/15 18:02
수정 아이콘
저도 척추 디스크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던 터라, 처음의 그 공포감과 상실감을 전부는 아니라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병이라도 본인이 겪게 되면 아주 커다란 상처가 되기 마련인데 하물며 뇌종양이라면 그 힘든 고통의 시간들이라니...
힘내셔서 완치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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