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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10/02 22:22:14
Name nickyo
Subject [일반] 11층의 난간 밖으로 걸음을 반 발자국 내딛어.

덜컹.

텅 빈 냉장고에는 덩그러니 생수병 몇개만이 굴러다닌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간지럽히는게 싫어 재빨리 냉장고를 닫았다. 패트병을 입에 물고 꿀꺽거리며 냉수를 들이켰다. 몸 속으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금세 비워버린 500ml짜리 생수병을 방 아무데나 던져놓고 간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형광등 한 쪽이 나가서 약간은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굳게 닫혀있는 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쥔 핸드폰은 새까만 색 그대로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무너져가는 이 곳에 마지막 구원을 건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일말은 금세 사라졌다. 알고 있었다. 구원은 그리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방금 막 받아온 편지봉투를 주욱 뜯어보았다. 그 곳에는 아주 예의바르고 상냥한 장문의 글이 씌여져있었다. 간단하게 네 글자로 압축을 해 보자면, '쓸.모.없.음' 의 내용이었다. 네 삶은, 네 형태는, 네 생각은, 네 가치같은건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라는 판정을 굉장히 그럴듯하게 해 낸 것이었다. 서랍에 이 봉투를 고이 모시려하니, 이미 가득 찬 편지지들에 들어갈 곳이 없었다. 나는 덤덤하게 손으로 꾹꾹 밀어서 새 편지지가 들어갈 곳을 마련해냈다.


언제,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온 것인지 모르겠다. 몸의 어딘가에서부터 스멀스멀 거무죽죽한 것이 나를 잠식해 들어온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버틸 수 있다는 강단, 내일을 맞이하려는 패기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매일 저녁에 바라는 것이라고는 그저 내일이 오기전에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뿐. 현실을 벗어나기위해 이어폰을 귀에 밀어넣고 음악을 틀었다. 각종가사가 흘러나오지만 그런건 어찌되어도 상관없었다. 어떤 노래든, 그냥 이 현실세계로부터 날 유리시켜줄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절대로 이 현실세계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다.


약해진다. 무너진다. 겁이난다. 무서워진다. 주저앉으려 하지만 내 모습은 벽과 벽의 틈새사이에 끼워져 억지로 서있는 모습. 눕지도, 주저앉지도, 쓰러지지도 못해서 그저 이대로 퇴화하여 바스라지기를 바라마는 기다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이럴땐 좋은 약이 있다. 녹색 병에 찰랑거리며 들어있는 술이라는 녀석. 다행이 찬장안에는 몇 병의 술이 있었다. 그래, 이거면 오늘은 잠들 수 있겠어. 단숨에 물처럼 벌컥벌컥 목을 데우자, 어두운 방 안이 조금은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핸드폰을 열고 새로운 메세지가 없다 돌려보고 있었는데, 어떤 번호에서 멈칫하고 손이 멈춘다. 지난 메세지들 속에는 많은 기억들의 조각들이 흩어져있다. 그러나 멍청하게 돌려보지는 않았다.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아까의 수많은 편지지들처럼, 그 메세지들을 네 글자로 요약하면 역시나 '쓸모없음'이었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던져버리려고 손을 치켜들었지만, 순간 생각나는 수리비따위의 현실적인걱정에 다시 살며시 손을 내려놓는다. 역한 기분이 들어 다시 술병을 입에 밀어넣는다.


내일이 오고있다. 내일에게서 도망쳐야겠다. 11층의 난간 밖으로 걸음을 내딛자. 그러면 날 더이상 쫒아오지는 못할것이다. 샤냥꾼들의 몰이를 피해서 난 필드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고리를 끊자. 이곳엔 발판이 없다. 날 뒤쫒아올수는 없겠지. 난 밤하늘의 별빛을 타고 날아갈테야. 바보같이 멍한 눈으로 놓쳐버린 사냥감을 바라보고 있어라. 한 발짝, 두 발짝 별빛을 밟는다. 바람이 온 몸을 세차게 밀어올린다. 나의 도주는 성공이다! 행복감에 겨워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콰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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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도시전설처럼, 매주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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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제일
10/10/02 22:49
수정 아이콘
하하. 심장이 덜컥 했네요.
적잖은 나이에. 일 때려치우고. 먼 곳까지 나왔는데.
방 안에 콕 박혀서 막막해만 하고 있는 자신에게 한참 화가 나 있는 중이었습니다.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 거린 것도 같았구요.
다른 거라곤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정도 일까요.

하루 종일 자다 일어났습니다.
그럴때마다 대는 핑계인 몸이 좋지 않다를 스스로에게 하고선 또 화가 났지요.

하지만. 내일에게서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오늘과 싸울 자신이 없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간만에 맛있게 된 커피와 치즈케잌 한조각에 고민을 잊는 대책없는 성격 덕에.
혹시라도 내일은 싸우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고 말아버립니다. 하하
10/10/02 23:02
수정 아이콘
11층 난간, 볇빛을 향해 한 걸음 더.

저 역시 종종 우울한 생각이 들 때마다 느끼곤 합니다.
이 지독한 삶에 과연 행복과 사랑이라는 것이 스며들 수 있을까?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하는 것이 또 우리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위안부 할머니를 다뤘던 영화 포스터가 생각이 납니다.
거기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지요.
저 할머니가 웃는 것은 슬픔과 좌절이 없어서 웃는 것일까?

쉽사리 대답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좌절과 슬픔들을 이겨내기에는..
이겨내고 닿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에는..
어떤 경험과 성숙이 뒷받침 된 어느 경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통은 사람을 성숙해지게 한다고 하죠.
저는 nickyo님을 모르고, 또 그보다도 더 어리지만
이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때때로 멋져보이기도 하지만,
우울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피트리
10/10/03 00:16
수정 아이콘
...
Grateful Days~
10/10/03 22:17
수정 아이콘
저도 한때 자신을 버리려고 했던적이 있어서리. 남말같지 않네요.

글쓰신분 자신의 스토리인지 다른분의 스토리를 쓰신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그분이 힘내시길 바라겠고..

인간은 은근히 죽음을 앞에두면 살고싶다는 인식이 엄청나게 증가한답니다. ^^;;

제 의지문제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왜 그렇게 강하게 들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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