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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10/30 22:45:24
Name 계층방정
Subject [일반] 저지대 군주에서 스페인 왕의 지배로
중프랑크 왕국의 잔해에서 점차 하나의 경제·사회 권역으로 묶인 저지대는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통합 노력으로 부르고뉴와 묶여 왕국으로 승격할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 기회는 허무하게 사라졌고, 왕위를 노린 용담공 샤를은 지나치게 공격적인 정책으로 주변국의 반감을 산 끝에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카를 5세 제국의 핵심, 저지대
Maximilian_I_and_Maria_von_Burgund.jpg
그림 1 부르고뉴의 마리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의 혼인. Anton Petter 작, 1813년경.
샤를이 아들 없이 죽으면서 부르고뉴 복합국은 순식간에 해체 위기를 맞았다. 복합국의 중핵인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실의 왕자령(아파나주)이었으므로, 프랑스 왕은 후사가 끊긴 봉토를 왕국에 편입한다는 명분으로 복합국 전체를 병합하려 했다. 이 수법으로 이미 프랑스는 발루아-앙주 가문의 선량왕 르네를 협박해 왕자령인 앙주에 신성 로마 제국령인 프로방스까지 덤으로 획득한 적이 있었다.
샤를의 유일한 자식 마리 드 부르고뉴(Marie de Bourgogne, 1457-1482, 네덜란드어 이름은 마리아 판 부르혼디어Maria van Bourgondië)는 루이 11세가 요구한 혼인을 거부했고, 루이는 겐트 시민들을 움직여 그녀를 감금해 압력을 가했다. 마리는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마리에게는 불행 중 다행히도 그녀가 겐트에 있었던 덕분에, 곧바로 프랑스의 손에 넘어가는 대신 겐트 시민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만약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에 있었다면, 프랑스 왕에게 저항하기 어려운 디종 귀족들에 의해 곧장 루이 11세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Karte_Haus_Burgund_5.png
그림 2 부르고뉴 계승 전쟁의 결과. 주황색은 마리와 막시밀리안이 지킨 영토, 보라색은 루이 11세가 획득한 영토다.

이를 구한 인물이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후일 황제 막시밀리안 1세, 1459-1519)이었다. 샤를은 생전에 딸에게 자신이 죽을 경우 막시밀리안과 혼인하라고 일러두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왕 마차시와의 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음에도, 막시밀리안은 사비를 들여 군대를 조직해 마리를 구출하고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는 1477년부터 1482년까지 5년간 지속된 부르고뉴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군을 막아내며 저지대를 지켜냈고, 루이 11세는 결국 본래 왕실 봉토였던 부르고뉴 공국에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저지대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아르투아와 프랑슈콩테는 막시밀리안이 되찾았으나 17세기에 프랑스에 다시 넘어간다.)

저지대는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처음부터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플랑드르에서는 1483~1485년, 1487~1492년 두 차례에 걸쳐 막시밀리안의 아들 펠리페 명의의 통치에 맞선 반란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펠리페의 이름으로 주화를 발행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고, 두 번째는 과중한 세금과 물가 상승이 불만을 키우면서, 막시밀리안이 사로잡히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홀란트에서는 갈고리파가 1488년 최후의 갈고리·대구 전쟁인 ‘스콰이어 프란시스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들은 결국 진압되었고, 그 뒤로 합스부르크의 저지대 지배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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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카를 5세가 상속한 영토. 주황색이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가 물려준 부르고뉴 복합국에 해당한다. 붉은색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물려준 오스트리아, 진한 파란색은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물려준 아라곤 연합왕국, 옅은 파란색은 외할머니 이사벨 1세가 물려준 카스티야 왕국이다.

막시밀리안은 마리와의 사이에서 펠리페(1478-1506, 스페인의 펠리페 1세)와 딸 마르그리트(1480-1530)를 낳았고, 마리는 사냥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펠리페 1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후아나 공주(1479-1555, 훗날 후아나 1세)와 결혼해 카를 5세(1550-1558)와 페르디난트 1세(1503-1564) 등을 낳았다. 막시밀리안은 두 번 더 혼인했으나 평생 마리만을 그리워했고, 다른 아내들에게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덕분에 이 형제가 막시밀리안·마리·펠리페·후아나의 막대한 유산을 모두 계승했다.
카를은 부르고뉴 공 샤를의 이름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추구했던 ‘부르고뉴 국가’의 야망과 구상을 제국의 차원에서 계승했다. 그는 저지대의 도시인 겐트에서 태어나 저지대에서 성장해 스페인·저지대·남이탈리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전통적인 군주 이름인 필리프와 샤를을 계승함으로써, 자신들이 스페인뿐만 아니라 저지대의 정통 군주임을 천명했다. 반면 페르디난트는 스페인의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스페인에서 보낸 뒤, 형의 결정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본령 오스트리아를 위임받아 중앙유럽을 경영했다.
형제의 외조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는 자기 이름을 물려받고 스페인에서 자란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사후 친(親)카를 세력의 정치적 공세에 힘입어, 카를이 저지대와 스페인 양쪽을 모두 계승하고 대신 페르디난트에게 오스트리아를 맡기게 되었다.
카를의 고모 마르그리트는 그의 유년기를 책임졌으며,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받으러 간 뒤에는 장기간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했다.
카를 5세는 샤를 사후 이탈했던 헬러 공국을 정복하고, 프리슬란트를 편입했으며, 위트레흐트 주교후국을 세속화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저지대에서 독자적 지위를 유지한 것은 이제 리에주 주교후국 등 소수의 주교후국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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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1548년 부르고뉴 제국관구의 범위. 네덜란드 17주(저지대)와 부르고뉴 자유백국(프랑슈콩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리에주 등 저지대의 독립 주교후국들은 베스트팔렌 제국관구, 전통적인 부르군디아 왕국령인 사보이아는 상라인 제국관구에 속했다.

더 결정적인 전환점은 1548년의 부르고뉴 제국관구 확대 재편성과, 이듬해 1549년 선포된 불가분 칙서였다. 이 조치로 부르고뉴 제국관구는 제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세금과 법률을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얻었다. 동시에 저지대 17주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결코 쪼갤 수 없는 단일한 상속 영토로 못 박혔다. 그 순간부터 저지대는 더 이상 ‘조각이불 같은 영토들’이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에 힘입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하나의 정치 단위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1548년의 부르고뉴 제국관구 확대는 저지대를 제국 내의 특수 지위 영역으로 재편함으로써, 제국 질서에서 사실상 분리되는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카를 5세는 이를 통해 저지대를 제국의 법적 틀에서 떼어내어 자신의 ‘사적 제국’(personal empire), 즉 저지대-프랑슈콩테-이탈리아-이베리아로 이어지는 북해-지중해-대서양 복합제국의 핵심 구성 요소로 편입하고 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카를이 유발한 변화를 국제법적으로 확인했을 뿐이며, 저지대의 탈제국화는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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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주황색)와 리에주 주교후국(자주색), 스타벨로-말메디 대수도원령(분홍색), 캉브레지 주교후국(파란색).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당시에는 ‘네덜란드’, ‘플랑드르’, ‘벨기카’ 등으로 불림)는 상공업이 번성해 프랑스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던 카를에게 결정적인 재정 기반이었다.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면서도 저지대는 대체로 카를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며, 1539년 겐트 세금 반란만이 예외였다. 이 반란은 곧 스페인군의 지원으로 진압되었고, 카를은 고향 도시 시민들에게 무릎 꿇고 항복할 것을 강요하며 황제로서의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저지대는 단순한 재정기지가 아니라 카를 제국의 정치적 심장부였다. 그는 브뤼셀의 코덴베르크 궁전을 주요 거처로 삼아 제국 통치를 실질적으로 이곳에서 운영했고, 퇴위식 역시 브뤼셀에서 열었다. 이는 저지대가 그의 제국에서 차지한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임종을 앞두고 카를은 “저지대를 열 번이나 여행했다”고 회고하며, 저지대를 단순한 지배 지역이 아닌 자신의 진정한 본령으로 여겼음을 드러냈다.

겐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겐트는 플랑드르에서 브뤼허와 함께 양모 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한때 플랑드르 백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저지대의 경제 중심은 겐트에서 브라반트 공국의 브뤼셀로 옮겨갔지만, 발루아부르고뉴와 그 뒤를 이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저지대 지배가 본래 플랑드르 백국에서 시작한 만큼 수도였던 겐트의 중요성은 여전히 컸다.
그런 만큼 중과세에 맞선 겐트의 반란은 되풀이되었다. 필리프 선량공 시기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으며, 부르고뉴 계승 전쟁 뒤에는 막시밀리안에게 두 차례 도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루아부르고뉴와 합스부르크의 통치자들은 겐트를 떠나지 않았고, 카를 역시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물론 겐트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단호히 진압했다. 겐트의 잦은 반란은 저지대 전역에서 반복된 도시민과 영주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지대 영주와 도시의 간헐적인 갈등은,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1527-1598) 대에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근간은 스페인과 저지대라는 상이한 전통을 지닌 두 정치체가 한 군주의 손에 통치되는 체제였다.

스페인 통치와 네덜란드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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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현대 네덜란드의 국왕최고자문위 소재지인 덴 하흐의 크뇌테르데이크 궁.

카를 5세는 저지대와 스페인을 별개의 두 나라처럼 통치했다. 그는 브뤼셀을 사실상의 수도로 삼고 저지대의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1477년 할머니 마리가 승인한 귀족 특권을 약화하였고, 1528년에는 위트레흐트 주교후국을 세속화하면서 길드장 의회를 폐지하고 국왕 총독에 해당하는 스타트허우더를 설치하였다. 또한 프레덴부르흐 성(Vredenburg Castle)을 건설해 위트레흐트 시민들을 견제하였다. 1531년 카를은 저지대 귀족과 성직자들을 모아 국왕최고자문위(Council of State, Raad van State)를 창설하여, 새 총독으로 임명된 여동생 헝가리의 마리와 그 후계자들의 자문에 응하도록 했다. 저지대의 귀족과 도시민들은 이러한 중앙집권을 경계하였으나, 이 시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저지대 군주의 저지대 관료에 의한 지배였으며, 후대에 펠리페 2세가 시도한 스페인이라는 외래 세력의 간섭과 지배와는 성격이 달랐다.
흥미로운 점은 카를 5세가 설치한 국왕최고자문위가 훗날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 측의 합법적 기구로 기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의 통치가 분명 중앙집권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지대 내부의 제도와 엘리트들에 기반한 지배였음을 보여준다. 이 기구는 현재까지도 네덜란드의 정부 기구로 활동하고 있다.
펠리페 2세도 초기에는 카를 5세의 이런 두 국가 군주 모델을 수용했으나, 펠리페 2세의 개인적인 특징과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얼마 못 가 스페인의 저지대 지배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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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마르틴 루터 초상화, 루카스 크라나흐 작, 1528년. 루터는 종교개혁의 상징적 인물로, 저지대의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50년 ‘피의 칙령’은 이러한 개신교 운동에 대한 카를 5세의 강경 대응을 보여준다.

당시 유럽은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인한 종교적·정치적 갈등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저지대는 도시민이 주축이 되는 사회적 구조 덕분에 개신교 운동이 활발했다. 카를 5세는 가톨릭에 대한 신심이 깊었을 뿐 아니라, 가톨릭 질서에 기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제국 통합을 위해서도 개신교를 탄압했다. 이러한 탄압은 독일뿐 아니라 저지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으며, 특히 저지대에서는 종교개혁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스페인 본토나, 카를의 직할지가 아니었던 오스트리아보다도 행정적으로 더 철저히 집행되었다.
1550년 4월 29일 반포된 ‘피의 칙령’(Bloedplakkaat)은 이단 서적의 인쇄와 소지를 금지하고, 완고한 이단자에게는 화형을, 회개한 자에게는 성별에 따라 참수 또는 산 채 매장을 명하는 등 당시 유럽에서 가장 엄격한 종교 탄압 법령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법령은 브라반트 지방 도시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그해 9월 25일 일부 조항이 완화된 새로운 칙령으로 대체되었다. 이후의 탄압은 주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단으로 간주된 재세례파를 대상으로 집중되었다. 이처럼 카를은 저지대의 종교적 현실에는 무관심했지만, 지배층의 정치적 목소리만큼은 무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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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펠리페 2세의 초상화. 소포니스바 안귀솔라 작, 1565년.

스페인은 달랐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 즉 이슬람 지배 지역을 기독교가 되찾는다는 회복운동으로 세워진 나라로,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카탈루냐 등 다양한 지역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로 묶인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가톨릭 신앙을 잃는 것은 곧 나라를 잃는 것이었다.
펠리페 2세는 이런 스페인 왕의 관점으로 저지대를 바라보았다. 부왕의 개신교 박해를 더욱 강화했고, 이를 위해 스페인 군대까지 저지대에 투입했다. 부왕이 설치한 국왕최고자문위에서는 스페인 군 투입을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였고, 외국 군까지 투입한 개신교 박해를 저지대의 종교와 사회 현실을 외면한 비현실적 정책으로 보아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펠리페는 듣지 않았다. 부왕 카를 5세도 스페인 군대를 신성 로마 제국의 종교전쟁에 투입한 일로 인망을 상실했는데, 펠리페 역시 이 과오를 반복했다.
펠리페 2세의 관료제 통치도 문제를 일으켰다. 카를은 장기간 고모와 여동생을 총독으로 앉혀 놓았지만, 저지대에서 태어났고 자주 저지대를 방문하며 귀족들과 군주의 유대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펠리페는 스페인에서조차 지방을 거의 순회하지 않고, 마드리드의 궁궐에 앉아서 각지에서 올라오는 서류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펠리페 2세를 ‘서류왕’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저지대와 마드리드의 먼 거리는 서류 기반의 행정에 잦은 지연을 일으켰다. 더욱이 “마드리드에 틀어박혀서 오지도 않는 군주”라는 이미지는 펠리페를 저지대 군주가 아닌 스페인 왕으로만 여기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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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제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의 초상화. 빌럼 케이(Willem Key) 작, 1568년경. 알바 공작은 1567년 저지대에 부임하자마자 ‘국가 반역 및 이단 심사회(일명 피의 법정)’를 설치하여, 개신교도와 반란 귀족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저지대 귀족들은 펠리페 2세의 극심한 탄압으로도 개신교 운동을 근절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본인의 신앙과 별개로 개신교에 유화적인 정책을 폈으며 저지대 개신교도들과 펠리페 사이를 화해하게 하려 꾀했다. 그러나 1566년 마침내 개신교 주민들이 성상파괴운동을 일으키자, 속된 말로 펠리페의 “뚜껑이 열렸다”. 펠리페는 “알바 공” 곧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1507-1582)가 이끄는 군을 파견해 “피의 법정”이라는 종교재판을 벌였고, 개신교도들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유화적인 귀족들까지 처형했다.
카를 5세 때에 개신교 문제는 일부 시민들의 종교적 문제에 불과했지만, 펠리페 2세 시대에 이르러는 저지대의 자체 질서를 허물고 스페인에 종속시키려는 구조적 충돌로 번졌다. 이것이 곧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었다.


그림 출처

그림 1: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그림 2: 위키미디어 공용 ), Marco Zanoli (sidonius), CC BY-SA 4.0.
그림 3: 위키미디어 공용 ), Barjimoa, CC BY-SA 4.0.
그림 4: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ocator_Burgundian_Circle.svg), Sir Iain, CC BY-SA 3.0.
그림 5: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panish_Netherlands.svg), David Descamps, CC BY 3.0.
그림 6: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그림 8: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그림 9: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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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en One
25/10/3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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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저지대라고 해서, 어떤 지형이 낮은 지역인가 보다 했는 데, 네덜란드 쪽 지역들을 저지대라고 불렀더군요. 영어로 Low countries라고 불리고, 이를 직역한 단어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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