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고예나의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에 등장하는 통일교 이야기를 읽고 적어봤습니다.
이주 배경 청년인 고예나가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라면서 느낀 점을 쓴 에세이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어서 그런지, 한국 사회에서 받게 된 차별뿐만 아니라
통일교에 대해 쓴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저의 선입견과의 갭도 있고 해서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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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고예나의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를 읽고
—이주배경 여성에게 통일교회란?
천 년대를 마감하던 1999년, 나는 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세기말은 종말론 특수를 누려야 하는 때이므로 우리 교회에서도 이단(異端) 특강을 했다. 여러 사이비를 다뤘는데, 가장 소름 끼쳤던 종교는 통일교다. 사춘기가 깊어 가던 중3이었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을 숭상하던 우리였다. 그런데 통일교의 신자들은 교주의 입맛대로 짝을 짓고 집단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큐피드(Cupid)의 운명적 화살을 기다리던 우리에게 이 사이비 무리는 세뇌에 뇌가 절어 인간적 마음을 버린 끔찍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훌쩍 지났다. 세기말도 갔고, 2000년대도 갔고, 2010년대도 갔고, 2020년대도 반이 지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 통일교는 그 집단 짝짓기의 소름 끼치는 장면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짝짓기의 결실이 쓴 글을 읽게 되었다. ‘다문화 사회가 된 한국’이라는 특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다.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위고, 2024)는 이주배경 청년인 고예나가 쓴 자전 에세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문화가정 자녀’대신 ‘이주배경청년’으로 지칭한다. 사실 ‘다문화’라는 개념은 ‘코시안(Kosian)’과 같은 용어가 차별적이라는 점에서 달리 채택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문화’ 역시 차별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고예나는 말하며, 자신을 ‘이주배경청년’으로 소개한다.
고예나는 한국인이다.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한국이다. 하지만 ‘피’로 따지면 필리핀 엄마에게 받은 절반의 피가 있다. 그래서 “혹시 외국인이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저 한국인인데요”라고 대답하기 망설인다. 여러 부연을 해야 하는 탓이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자신을 긍정하지도 못한다.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 자연스럽지 않게 이루어졌고, 따라서 나의 출생도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12)
고예나의 엄마는 통일교의 주선으로 아빠를 만났고, 교리에 따라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녀는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 같았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 개인적으로도 이상한 선택이지만,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다.”(15)
고예나는 단 하나의 버스만, 그것도 하루에 네 번만 들어오는 전라도의 깊은 시골에서 자란다. 젊은 사람은 다 떠나고 어르신과 떠나지 못한 중년만 있던 그 마을은 2000년 전후로 통일교, 결혼 중개 업체 등의 주선으로 일본, 필리핀, 몽골, 베트남 등 가까운 나라에서 다양한 국적의 젊은 여성들이 들어온다.
고예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집에서, 또 동남아라는 지칭이 멸칭이 되는 학교에서 10대 시절을 보낸다. 고예나의 엄마는 한국에서 24년을 살면서 아이 셋을 낳아 키웠다. 그녀는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의 전통과 생활양식을 따랐다. 한국 음식을 능숙하게 해서 이제 한국인이 다 됐다는 소리도 듣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 고예나의 어머니에게 한국집은 “상처를 받은 공간”이다. 물론 이 나라를 선택한 건 자신이고, 그 선택에 책임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딸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딸은 엄마가 더 나은 한국 생활을 할 수 없었음이 안타깝다.
“할머니가 엄마를 ‘한국인 며느리’처럼 대했더라면, 아빠가 엄마에게 더 살가웠더라면, 시골과 도시의 접근성이 좋았더라면, 사회가 가사 노동과 농사의 가치를 알아줬더라면, 결혼이주여성을 존중했더라면, 엄마는 상처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93~94)
하지만 이런 엄마에게도 더 없이 소중한 장소가 있다. 바로 ‘통일교회’다. 고예나 본인도 통일교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외국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을 주선하는 사이비 종교다. 그것이 자신을 부정하는 정체성의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통일교는 고마운 곳이다. 덕분에 아빠를 만나고 아이들을 낳아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통일교회는 타국에서 온 여러 이주배경 여성들이 함께 교류하고 우정을 쌓을 수 있게 한 소중한 공동체였다. 고예나의 엄마는 한국에 온 이래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 통일교회에서 보낸 시간이라고 딸에게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를 읽으면서 이주배경 청년의 아픈 성장기를 보았고, 이입했고 응원했다.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통일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합동결혼식에 참석한 이들은 교주 문선명의 노예가 아니었고, 오히려 꿈을 좇아 도전하는 용감한 영혼이었다. 통일교회는 전재산을 바치게 하기 위해 세뇌하는 곳이 아니라, 낯선 땅에 온 이들에게 쉼과 위로가 된 장소였다. 고예나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태생이 문제가 아님을 자각한다. 그녀 역시 통일교회에서 같은 이주배경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좋은 추억을 많이 쌓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노니는 예쁘고 반짝이는 자신의 동생들을 보면 절대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서 통일교를 긍정할 수 없다. 사이비라고 생각하며, 정치적 현황이 되고 있는 여러 문제도 떠오른 상황이 아니던가. 국제결혼의 경우도 고예나의 엄마와는 달리 여러 후유증과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근본 있는 잘난 교회가 놓치고 있는 영혼이 숱하게 있고, 이들에게 큰 위안과 힘이 되고 있는 이단이 있다는 점은 자성을 촉구한다. 언제나 타지에 있다고 여기는 영혼을 위해, 어떤 교회가 필요한 지 고민해야 한다. 사이비라고 낙인찍고 치워버리는 일은 너무 쉽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그리 치워지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