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딸, F1, 발레리나… 쟁쟁한 영화들이 개봉한 와중, 조용히 CGV 단독 상영으로 걸린 요루시카의 ‘전생' ('전세'로 이야기하는데. cgv에선 '전생'으로 표기해서 '전생'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상영회를 보고 왔습니다. (셋 리스트나 공연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포 방지를 위해 생략하겠습니다. 크크)
요루시카 작사·작곡가인 n-buna(기타도 담당)와 보컬 suis로 구성된 일본의 2인조 록 밴드. 곡 자체만으로도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와 보컬인 suis의 청량하면서도 아련한 음색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 여름의 아련한 감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감성을 상당히 잘 살리는 밴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떠나서 피자에 파인애플, 초코에 민트가 있듯이.. 요루시카의 앨범이나 공연에는 세계관이 있고 그 세계관에서 환생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노래로 풀어내기 때문에 이러한 설정들과 이야기를 함께 알고 감상하면 요루시카 음악들의 맛은 배가 됩니다. 예를 들어 「그래서 나는 음악을 그만두었다」와 「엘마」 앨범은 에이미와 엘마라는 두 인물의 시점이 맞물리며, 각 트랙들이 서로 동치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 그나음그 4번트랙, 시 쓰기와 커피 ↔ 엘마 4번 트랙, 비와 카푸치노처럼 inst. 트랙까지 포함해 1번부터 14번까지 전 곡이 서로 맞물린 구조)
또한 요루시카의 가사들은 시적이면서 은유가 가득한데.. 문학 작품에서 모티프를 따오고, 그 작품들을 가사로 녹여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시를 조금만 들면, - 나는 사랑을 밑이 빠진 국자로 마시고 있어 〈거짓말쟁이 중〉 - 너의 주머니에 밤이 피어나 〈그저 내게 맑아라 중〉 - 자, 오늘마저 내일이면 과거로 바뀌어, 눈을 깜빡이는 것마저 귀찮아 〈봄 도둑 중〉 이런 문장들이 노래 속에 녹아 있어, 가사만 읽어도 하나의 시집 같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세계관이 요루시카의 음악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공연도 그냥 음악만 쭉 나오는 게 아닌 낭독과 음악이 번갈아 진행되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낭독과 함께 노래를 듣다 보면 (물론 낭독 파트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요 ㅠㅠ) 단순한 음악 공연을 넘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번 공연은 '전생'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은 시간을 거슬러 여러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렀던 인연이라면 어떨까요?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다시 만난 두 남녀가 전생의 조각들을 맞춰가며, 잊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질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형태를 바꾸고 시간을 초월해도, 결국 서로를 다시 찾아내는 운명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요.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음악과 영상, 그리고 낭독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감정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고 그 감정은 곧바로 감동으로 밀려옵니다. ‘전생’ 공연은 음악을 넘어서, 짧지만 강렬한 한 편의 소설을 직접 읽고 나온 듯한 체험을 선사합니다. 데이트하려고 영화관에 갔는데 평소에 보던 영화들이 뭔가 끌리지 않는 거 같은데..?? 라는 느낌이 들 때 '전생' 상영회가 보인다면 한 번쯤 감상해 보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흐흐 (참고로 '전생'의 낭독과 노래는 전부 자막이 나옵니다!!) (요루시카도 몰입감을 위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기 때문에 실제 공연에서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점도 유의..) 추천 대상 - 일본 문화에 거부감이 없으신 분 - 일본 음악 좋아하거나 흥미 있으신 분 - 시적인 가사를 좋아하시는 분 - 공연과 이야기의 결합을 좋아하시는 분 비추천 대상 - 일본 문화 싫어하시는 분(+오글거림) - 일본 음악 싫어하시는 분 - 직접적인 표현의 노래들을 좋아하시는 분
입문 추천곡 (라이브가 듣는 맛이 좋아서 최대한 라이브 영상 위주로 넣어봤습니다.+자막)
1. 봄도둑 - 목숨을 벚꽃에 비유한 봄 도둑입니다. (작사, 작곡가인 n-buna는 봄날, 쇼와 기념공원 들판에 한 그루 서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저 느티나무가 벚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걸 벚꽃으로 비유해서 곡을 쓰자. 기왕이면 그 벚꽃도 무언가에 비유하는 것이 좋겠다. 진부하지만 꽃을 생명에 비유하자. 꽃이 수명이라면 바람은 시간이겠지. 그것은 곧 봄바람을 뜻하고, 벚꽃을 흩날려 버리기 때문에 봄 도둑이다."라고 코멘트 했었습니다.) 봄 캐럴 같은 느낌의 밝은 멜로디이지만 가사도 정말 아름답고 곱씹다 보면 매우 슬픈 내용입니다.
2. 좌우맹 -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일본 영화의 OST인 좌우맹 입니다. 상대의 이목구비나 버릇을 점차 잊어가는 것을 빗대어 쓴 노래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을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가사를 곱씹다 보면 소설에 나오는 요소들이 많이 보입니다.
3. 그래서 나는 음악을 그만두었다 - 엘마와 에이미의 방대한 스토리의 시작이죠. 그래서 나는 음악을 그만두었다.입니다. 앨범 자체가 콘셉트 앨범이고 숨겨진 설정들이 너무 많은 관계로 아쉽지만 생략하고.. (다 적으려면 글 하나 써야 될 판이라.. 흐흐) 창작에 대한 고뇌, 자기혐오, 예술에 대한 본질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 말해줘 - 발랄한 멜로디와 대조되는 가사의 말 해줘. (요루시카의 특징) 꽤 유명한 곡이라 얼핏 들어보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이별(죽음) 한 사실을 본인인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믿지 않겠다는..
5. 꽃에 망령(자막 on) - 애니메이션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의 주제곡인 꽃에 망령입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어~라는 가사를 보듯이 여름과 너무나 어울리는 느낌의 곡입니다 흐흐 (노래가 좋다 생각되면 같은 애니메이션의 곡인 '거짓말쟁이'도 들어보시는 걸 추천)
6. 맑은 날 -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1기'의 오프닝인 맑은 날입니다. 이 곡도 아마 애니 자체가 인기가 많다 보니 들어보신 분들이 꽤나 많을 거 같네요 작곡가인 n-buna는 이 곡은 맑음을 쓴 곡입니다. 정확히는 맑지 않은 상태에서 맑은 날씨를 바라는 곡입니다. 이 곡이 프리렌의 세계와 그들의 여행에 꽃을 더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었는데요. 곡명인 '하루(晴る)'도 일상적인 하레(晴れ)를 사용하는 대신, '하루(晴る)'를 사용하여 봄(春)을 연상하게 만드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곡 속에서 晴る와 春을 바꿔 읽으면 힘멜과의 부재와 추억이 더 깊게 드러남.) -봄(春)으로서의 '하루': 이 노래의 화자(프리렌)에게 '봄'은 바람처럼 다가와 마음 속 차가움을 녹여주고 희망(푸름)을 싹 틔워준 너'(힘멜)를 의미합니다. -맑음(晴る)으로서의 '하루': 이제 '너'(힘멜)라는 봄은 더 이상 곁에 없지만, 그 기억 덕분에 프리렌은 '맑은 날'을 바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이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봄바람'이 된 것. 이 노래의 화자인 '프리렌'은 '얼다'라는 뜻의 독일어 'Frieren'처럼 차가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늘'(독일어 명사)을 뜻하는 '힘멜(Himmel)'이라는 존재가 다가와 녹여주었고. 결국 프리렌은 혼자 남게 되었지만, 슬픔에 잠기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마지막 무반주 부분은 혼자 남은 프리렌이 홀로 맑은 날을 바라며, 다른 이들에게 봄을 전하는 '봄바람'이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고 이 노래는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7. 화성인(자막 on) - 애니메이션 '소시민 시리즈 2기'의 오프닝인 화성인입니다. 이 노래도 가사를 뜯어보면 상당한 은유와 비유들이 들어가 있는 거 같습니다만... 설명하면 너무 길어질 거 같고. (요루시카의 배경 설정들도 알아야 되고 화성인 뮤비 자체도 오마주한 부분이 많이 들어있음.) n-buna의 코멘트만 보셔도 이해하는게 크게 무리는 없어보입니다. 소시민적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고 하는 자의식의 높이를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것이 코바토와 코사나이가 안고 있는 매력이며(애니의 등장인물), 소시민이라고 하는 소설 시리즈가 가지는 큰 인력이라고 느낍니다. 화성인이라는 악곡에 있어서의 "화성"은 동경이자 이상이고 화성인은 그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화성에 가고 싶다는 곡입니다. 가사에 나오는 '똑바로 세운 꼬리 끝에서 실의 초승달이 스치고 있다'는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고양이라는 시에서입니다. 그 구절을 본 노래를 부르는 느낌으로 인용을 했습니다. 조금씩 형태를 바꿔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원전 시가 나오는 형태의 작사입니다. 그 원전이 저에게는 화성입니다. (화성인이 마음에 드신다면 브레멘-루바토-화성인 이렇게 반복해서 들으시면 좋습니다 흐흐)
요루시카의 세계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으신 분들은 유튜버 중에 '김요팬'이라는 분의 채널을 가보시면 좋으며 공연도 맛보기로 즐겨 보고 싶으신 분들은 요루시카 공식 유튜브 채널에 [月と猫のダンス - 달과 고양이의 댄스] 공연 전부를 올려놓았으니(2시간여 분량) 한번 감상해 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위의 추천곡 말고도 추천할 만한 다른곡들도 많은데 이번 기회에 요루시카의 음악으로 피지알러분들의 여름 플레이리스트를 채워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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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모든 앨범에 세계관이 있고..
모든 곡의 가사들도 허투루 쓴 게 없어서..
(다 쓰다 보면 너무 길어져서 글을 따로 써야 될 판이니..
봄 도둑 같은 경우도 가사가 진짜 아름답습니다.. 크크)
그런 점들도 알고 들으시면 더 흥미롭게 듣지 않을까.. 싶어서 써봤습니다!
새로운 매력을 알아가셔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