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시절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자는 윤씨 할아버지였다.
항상 하얀 모시에 노란 모자를 쓰고 다니던 할아버지는 오래된 소나타를 타고 갈색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멀리 땅을 보러가거나 일이 있을 때는 자기 차는 두고 부동산 아저씨 차를 얻어타고 다녀 있는 사람이 더하다며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도 있었지만 땅을 사고 팔기를 잘 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큰 돈도 빌려 주며 당시에도 수십억대 부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윤씨 할아버지에게도 고민이 있었으니 늦으막히 낳은 윤씨 아저씨 였다. 윤씨 할아버지가 왜 늦은 나이에 아들만 하나 낳았는지는 모르지만 (재혼 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듣기는 했다.) 끔직히도 아끼는 아들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좀 못 미더웠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윤씨 아저씨는 항상 술자리 분위기 메이커였다. 젊은 시절에는 나름 사업한다고 이런 저런 일들도 벌여 보기도 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본인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무리지어 낚시를 다니고 술마시는 게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함께 어울리는 무리 중 하나 였는데 술자리에 심부름을 가면 윤씨 아저씨는 용돈도 시원시원하게 주고 항상 즐거워보이셨다.
그런 아들을 둔 윤씨 할아버지는 걱정이 많았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라도 잃는 것는 쉬운 일이다. 그래서 윤씨 할아버지는 며느리 감을 직접 골랐다. 이 근방에서 예쁘지는 않아도 제일 야무지고 똘똘한 아가씨로.
윤씨 할아버지는 믿음직한 며느리에게 시내 큰 식당을 차려주었다. 윤씨 아저씨는 가게에 가끔 얼굴이나 비추고는 말았지만 아주머니는 식당을 잘 운영했고 이내 사람들이 넘쳐났다.
시간이 흘러 윤씨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가 윤씨 아저씨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절대 사업 같은거 하지 마라.’ 였다고 한다.
자식들도 잘 되었다.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야무진 엄마를 닮아서인지 아들은 명문대를 나와 변호사가 되었고, 딸은 학교 선생님이 되어 의사랑 결혼했다.
윤씨 아저씨는 그냥 매일이 즐거운 술자리 이었다. 항상 그렇게 취해있는 사람의 몸이 멀쩡할리 없었다.
요새 나이로는 젊은 60대에 간암 판정을 받고는 얼마지못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그래도 윤씨 아저씨는 ‘세상 가장 편하고 즐겁게 인생 살다 간 사람’ 일 거라고 한다.
‘인생이란 참 고행이다‘ 라고들 한다.
부자집 외동 아들에 잘 된 자식들. 아저씨는 그래도 참 편한 길을 걸으셨다.
하지만 그 인생이 썩 부러운 인생은 아닌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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