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안목이 부실하면, '양'에 의존해서 판단하게 됩니다. 분석적으로 그 구조나 성질을 파악해서 판단하지 못하고, 직관적으로 예민한 감수성과 통찰력을 갖고 판단하지도 못하고, 그저 양으로 신속히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빨리 계산할 수 있는가? 얼마나 어려서 해냈는가? 얼마나 많이 암기하는가? — 이런 걸로 와 천재다! — 이렇게 판단합니다. 안목이 부실하면, 양과 함께 사람들이 의존하게 되는 것은 '브랜드'입니다. 어느 학교 다녀? 어느 기업 다녀? 어느 가문 사람이야? 무슨 상을 탔는데? — 브랜드입니다.
실제로는 누가 천재인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시점에, 그 과정에서 누가 천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천재는 언듯 바보와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능은 경험에 따라서도 많은 발전이 이뤄질 수 있는데, 누가 천재가 될 잠재력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재가 생겨나게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1000명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그중 1명이 나오는 식입니다. 이때 비용이란, 언듯 생각하기에, 장학금이나 연구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 것도 비용이 될 수 있지만, 특별한 비용이 있습니다.
또라이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명의 천재를 길러내기 위해서, 999명의 또라이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또라이로 인해, 소음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골치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위험한 일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게 비용입니다. 그들로 인해 불편하거나 위험합니다. 그걸 감수하는게 비용입니다. 천재 1인에게 비용을 지불하는게 아니라, 광범위하게 1000명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문화와 제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라이를 영어로 crazy one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crazy one 중에서 genius가 생겨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라 해보겠습니다. 그곳에는 철학자만 있던게 아니었습니다. 소피스트가 있었습니다. 관념적인 궤변론자죠. 그런데 소피스트가 허용되었기 때문에, 철학자도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소피스트와 철학자를 분별하는게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인가?' 이걸 판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여러 천재들을 그들이 성과를 내기 이전 시점으로 가서, 과연 그들이 천재인지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지를 공정하게 판단해봐야 합니다. 특허청의 아인슈타인과 점심식사를 했다면, 아마 대부분 그를 또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잡스는 대학에서 맨발로 돌아다닌 걸로 압니다. 냄새난다면서 혐오했을 수 있습니다. 땅은 분명히 움직이지 않는데, 땅이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건 큰일날 소리일 것입니다. 갈릴레이죠. 예전에 빈센트 반 고흐의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풍경화를 그리는데, 똑같이 그려야 하는데, 제 멋대로 그립니다. 그러니 훌륭한 화가라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림도 못 그리는게 괴팍합니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고 조롱합니다.
천재와 또라이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 허용되어야 합니다. 그로인한 비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위험도 비용이죠. 또라이가 허용되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천재가 또라이를 상대하다가, 실력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소피스트를 상대하다가 철학자들이 실력이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궤변은 궤변인데, 그게 궤변이란 것을 논리적으로 밝혀내야 합니다. 그러니 철학이 발전합니다. 또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천재는 다양한 생각재료를 필요로 합니다. 그 다양성이 평범한 사람들로부터는 얻어지기가 곤란합니다. 비록 또라이가 헛소리를 하고 있긴 한데, 그 말속에는 쓸만한 독특한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라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게 있고, 또라이이기 때문에 생각이 미치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천재는 그걸 빼다가 자신의 정신속에 넣고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다양하게 축적하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종합함으로써 탁월한 걸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또라이를 '돌연변이'라 생각해봅시다. 인류가 진화하기 위해서는, 돌연변이 유전자들 5개를 모아야 한다고 해봅시다. 그 유전자 하나만 갖고 있으면 또라이입니다. 다섯 개를 모두 모아야 천재입니다. 다섯 개를 모아야, 결과적으로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진화를 가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재가 생겨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천재가 생겨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안전주의'는 천재의 반대되는 말입니다. '안전'을 위해서 여러 규제를 하고 억압을 하다보면, 그런 사회에서는 탁월한 인재가 나오기 곤란합니다. 계산 잘하는 인재는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인재는 나오지 못합니다. 계산 잘하는 인재는 사회에 끼치는 이로움이 적습니다. 천재는 강력한 외부효과를 갖습니다. 환경오염을 생각해봅시다. 공장은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폐수를 방출합니다. 환경이 오염됩니다. 그로인해 널리 많은 사람들이 해로움을 입게 됩니다. 천재도 이와 마찬가지로 외부효과를 일으킵니다. 긍정적인 외부효과입니다. 사회를 향해 막대한 이로움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비해 자기가 분배받는 몫은 매우 적은 경우가 많습니다.
불경스러운 말일 수 있는데,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배가 몇 척 되지도 않은데, 일본 대군을 상대하겠다고 하는게 crazy한 거라 생각합니다. 육군에 합류하라 했는데 말도 듣지 않습니다. 이자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또한 이렇습니다. 멀쩡하게 한자가 있는데, 한글을 만든다고 합니다. 유교 경전이 다 한자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신성한 것인데, 한글을 만든다고 합니다. crazy한 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니 뭐라 할 수도 없어 그리 된 거지, 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님도 이순신 장군님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상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crazy one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천재도 나오고 영웅도 나옵니다.
왜 미국은 흥하고, 유럽은 그렇지 못한가. 앞으로 중국의 미래를 밝게 보기가 곤란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도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위험을 감수하는 나라입니다. 그 위험속에서 탁월한 인재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잠재력이 큰 인재들이, 미국으로 오게 됩니다. 유럽에 있으면 온갖 규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재능과 열정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미국은 위험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탁월한 인재에게 막대한 보상을 주기도 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이들을 영웅처럼 바라보고 존경합니다. 미국에 별 괴상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인재들도 나올 수 있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탁월성을 향한 강한 낭만이 있기 때문에, 그 과정 또한 높이 평가합니다. 그들 대화에 그런게 상당히 녹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를 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실패는 오히려 멋지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시 투자가 이뤄지기도 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그들의 경험을 높이 사며 기꺼이 고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실패해도 다시 기회를 얻기 때문에, 더더욱 도전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경험과 역사에 의해서, 안목까지도 높아지게 됩니다. 또라이와 천재를 많이 보다보니, 그들도 확신까지는 못해도, 확률높게 분별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목을 높인 사람들 중에,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과감하게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그중에 일부가 크게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합니다.
탁월성을 향한 욕망이 강렬한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누구를 사귈지'를 결정할 때,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강렬히 선호하게 되기 쉽습니다. 발전욕이 없으면, 그런 기준은 약화됩니다. 내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괴짜라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새로운 생각으로 나를 이끌어줄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와달리, 그저 뻔한 얘기만 늘어놓는다면, 사귈 이유는 없는 겁니다. 사회적 가치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다보니, 사람들은 타인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말들을 열정적으로 쏟아내게 됩니다. 그럴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평판이 높아집니다. 그 말들이 반드시 도움이 되란 법은 없습니다. 확률적인 것입니다.
반대로 탁월성을 향한 욕망이 없는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선호합니다. 그래야 불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안하고 안전한게 최고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늘어놓으면, 불편해지고, 그래서 추방하거나 억압하게 됩니다. — 뿐만 아니라 발전욕이 사라지면, 질투심이 강렬해지기 쉬운 거라 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발전욕은 내가 발전해서 밝은 미래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질투심은 남을 짓밟아서 밝은 미래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저 인간만 없어지면, 내가 돈을 더 벌거나,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질투심이 일어나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봅니다. 그러나 발전욕이 강하다면, 그런 질투심은 없거나 약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감사해 할 수도 있습니다.
탁월성을 향한 욕망이 없으면, 글이 있을 때, 그 글을 내가 이해를 못하면, 내 잘못이 아닙니다. 글쓴 사람 잘못입니다. 글은 반드시 모든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합니다. 불편하지 않게 잘 이해되게 써야 합니다. 수능국어 6등급 맞는 사람이, 글을 읽더니 오독을 해놓고, 되려 자기가 성질을 냅니다. 시험장에서는 글을 이해를 못하면, 이해 못한 사람 잘못이지만, 시험장 밖에서는 글을 이해를 못하면, 글쓴 사람 잘못입니다. 탁월성을 향한 욕망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힘이 강화됩니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더 하향평준화됩니다.
읽는 사람이 불편하다고 하니, 안 불편하게 하려면, 방어적으로 글을 길게 써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여럿이고 그들의 이해관계, 취향, 가치관이 다릅니다. 누구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 더더욱 길어집니다. 글이 길어지자, 아무도 안 읽습니다. 글을 줄이자, 불편한 사람이 생겨납니다. 그들이 그냥 안 넘어갑니다. 따져댑니다. 혹은 엉터리로 읽어놓고 비난을 퍼붓습니다. 수능국어 6등급인 사람이 어디서 자신감이 샘솟는지, 내가 이해를 못하면, 글쓴 사람이 멍청이거나, 혹은 악한 의도가 있다고 추정해버립니다. 그들이 비난을 쏟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혹은 뻔한 글만 씁니다. 혹은 얕은 글만 씁니다. 뻗한 글과 얕은 글은 잘 이해가 됩니다. 혹은 듣기 좋은 달콤한 얘기만 씁니다. 듣기 좋으니 뭔 소리인지 잘 몰라도 넘어갑니다. 아무튼 착한 사람 같습니다. 혹은 저 바깥에 다른 타겟을 설정하고 이를 악하게 그려냄으로써, 내가 공격받는 걸 방지합니다. 화내느라 정신없습니다. 아무튼 내편 같습니다.
안전주의와 천재는 양립불가능합니다. 과거에 스페인이 최강국일 때,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유대인등을 탄압한 걸로 압니다. 그걸 바꿔 말하자면, '안전'을 위해서 탄압한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이 탄압하자, 인재들이 네덜란드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흥하게 됩니다. 그런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거라 봅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내부에서 인재가 자라나기 힘들고, 있던 인재도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인재들이 그곳에 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저에게 화낼 분들이 계시겠지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란에는 도덕경찰이 있습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1~2만명 된다고 해봅시다. 그들은 돈 받고 일할 것입니다. 한국에는 돈 안 받고 일하는 도덕경찰이 수백만명이 있는 거라 해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도덕은 공동체 전체에 의해 합의된 도덕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유리한대로, 자신과 친한 사람들 유리한대로 만들어진 도덕입니다. 비슷하거나 친하면 자기들끼리 공감이 잘 되고, 그 공감에 의해 정당성을 얻게 된 도덕들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들어놓고, 그중 일부는 자기들도 안 지킵니다. 돈 안 받고 일하는 도덕경찰 수백만명에 의해 집단감시체제가 가동됩니다. 이런 곳에서 또라이는 가만두지 않습니다. 또라이는 이 집단과 저 집단, 서로 다른 도덕체계 모두에게 억압받을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 또라이로 인해 정말로 위험해지는 사회가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위험입니다. 그러면 그 사회의 자기보존을 위해서는, 또라이를 억압하거나 추방하는게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인데,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불안 때문에, 과도한 혐오 때문에, 혹은 그런 역사로 인한 관성 때문에, 지나치게 안전을 택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국의 노자를 좋아합니다. 도덕경은 제게 영향을 많이 준 책입니다. 그리고 삼국지의 여러 인물들을 좋아합니다. 중국에 대해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중국에 훌륭한 사람이 없는게 아니라 봅니다. 일부만 보고 전체를 단정해선 곤란하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의 발전을 향한 열정, 간결한 언어, 그리고 리더로서 자신감. 그는 외모가 뛰어나지 않고, 체구도 작지만, 통이 크고 패기가 있는 인물이라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중국 정부가 마윈 회장을 탄압한 걸로 압니다. 중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 또라이인 것이지요. 마윈 회장이 어느날 어디갔는지 사라져버렸습니다.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게 바로 중국이 망하는 변곡점이 되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상징적으로 저 사건을 중국에 망조가 든 거라, 훗날 역사가들이 해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전체주의 국가는 불안한게 많고,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그래서 인재가 성장하지 못하며, 있던 인재들도 해외로 나가버리기 쉬운 거라 봅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탁월한 인재가 나오기도 힘들지만, 일반적인 사람들도 똑똑해지기 힘듭니다. 지능이란 것은 선택 행위를 하고, 그에따른 책임을 지면서 발전하는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사람들이 지능이 높아지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발전욕, 정직성, 용감함입니다. 지능은 머릿속에 거짓이 많으면, 높아지기 곤란한 거라 봅니다. 아이큐 테스트와 다릅니다. 아이큐 테스트는 지능 중 일부를 측정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큐 테스트에는 정직성의 문제가 전혀 측정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여러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그것 하나하나에 정직성 문제가 걸려있게 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뇌속에 거짓이 많아지면, 지능은 떨어집니다. 지능만 떨어지는게 아니라, 인격적인 문제도 겪게 되기 쉬운 거라 봅니다. 인간의 욕구란 것은 그냥 생겨나는게 아니라, 신경조직을 거치면서 생겨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생리를 근본으로 하여, 신경조직을 거쳐서 생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신경조직이 거짓에 의해 엉터리로 연결되어 있다면 어찌될까요? — 그렇다면 진정한 나를 반영하지 않는, 거짓된 의지가 솟아나기 쉬울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의 욕구일 수도 있고, 그저 오류인 욕구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나의 취향이 곧 신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취향이 내 취향이 아닌 것입니다. 머릿속에 거짓이 많다면, 내 취향이 진정한 나의 취향인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거짓을 투과해서 올라온 욕구, 거짓을 투과해서 올라온 기분. 이게 과연 나인지 장담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한마디로 인격장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머릿속에 거짓이 많아지면, 지능장애가 생기거나, 인격장애가 생길 수 있습니다.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성능이 떨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득이 남을 속이는 일은 있어도, 내가 나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은, 기초적인 윤리라 생각합니다. 그 윤리를 어기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능이 떨어지고, 인격이 병들게 되는 벌입니다. 그건 나만 해치는게 아니라,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해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내가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려면,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비겁하기 때문에, 거짓이 들어서는 거라 봅니다. 용감함과 유사한 것은, 평정심입니다. 평정심을 잃은 경우에도 거짓이 들어서기 쉬운 거라 봅니다.
어떤 사회에서, 발전욕 ・ 정직성 ・ 용감함이 길러질 수 있는지 문제됩니다.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사회입니다. 안전에 대한 과도한 지향은, 저 세 가지를 모두 해치기 쉬운 거라 봅니다. 혹은 거꾸로 저 세 가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안전주의가 강화될 수도 있습니다.
불안은 물론이고, 혐오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A → B → C → D → 위험( 고통, 손상, 상실, 추방, 감금, 사망 )
이런 인과관계가 있다고 해봅시다. D 지점에서는 공포를 느낀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D를 차단하는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민감성이 강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D에 앞서 C를 차단하고자 하게 됩니다. 이때 공포가 아니라, 혐오로써 그렇게 하기 쉬운 거라 봅니다. 혐오는 공포에서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사전 차단하고자 하는 감정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을 거란 것입니다. 공포를 향해가는 온갖 징후들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혐오가 일어나는 겁니다. 민감성이 더 심해지면, B를 차단하려 할 것입니다. C가 아니라, B부터 이미 혐오가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감함은 단지 두려움하고만 관련된게 아니라 봅니다. 그것을 심리분석해서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그건 혐오와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정직성은 불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머릿속에 거짓이 많으면, 나의 말과 행동을 타인이 신뢰할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당장은 믿었을지 모르지만, 거짓이 발각되거나 혹은 거짓을 명시적으로 짚어내진 못했으나, 점점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걸 겪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신뢰 상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내가 나를 잘 모르고 말을 했을 때, 타인이 이를 먼저 알아차리고, 이 인간은 기만적인 몹쓸 인간이라 판단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과 혐오를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거짓과 비겁의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하자면 —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탁월한 인재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인재들이 자기 인생을 열고 열정적으로 발전해나갈 때, 평범한 사람들이 보다 여유롭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라 봅니다. 그런 인재들이 없으면, 노동시간을 줄일 수 없습니다. 학생들 공부시간도 줄일 수 없습니다. 탁월한 인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선진국에 비해 불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 봅니다.
유럽에 규제가 많아졌고, 그로인해 미국으로 인재유출이 이뤄졌는데, 왜 유럽은 여유롭고 안락하게 생활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지만, 그들 조상님들은 위험을 감수했죠. 그 유산으로 먹고 살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 조상님이 해놓은 게 많이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고, 농지가 비옥한 것도 아닙니다. 원자재와 석유를 수입해서 써야 합니다. 식량에 많은 돈을 써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AI의 발전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결국 3가지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첫째로 AI 과학기술에 있어서 첨단을 달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탁월한 인재들이 있냐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본주의가 발달해서 많은 돈이 투자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로 땅이 많냐는 것입니다. AI와 로봇이 발달하고, 그것의 가격이 저렴해질 경우, 지금까지는 비용 때문에 개척되지 못했던 땅들이 개발될 수 있는 거라 봅니다. 수익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나 캐나다를 탐내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 봅니다. 땅은 크고, 인구는 적은 곳. 그런 곳이 탐나는 것입니다. 춥더라도 좋습니다. AI와 로봇은 춥더라도 얼마든지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교, 병원, 극장, 박물관이 없더라도 기꺼이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원 개발하고, 발전소에 데이터센터를 건설한다면, 냉각에 오히려 이점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한국은 AI에 첨단을 달리고 있나요? 아니죠. 산업용 로봇은 많습니다. 지금까지 그걸로 국제경쟁력을 만들어왔던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로봇의 생산성 때문에, 노동자에게 임금을 많이 줄 수 있습니다. 산업용 로봇은 매우 많으나, AI는 이거 포기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AI를 하려면, 발전소도 짓고, 데이터센터도 짓고, 대학에 인재 키우라고 과감히 지원도 하고, 정부 데이터도 풀고, 규제들도 과감히 풀어주고 이래야 하는데 뭐 그런 거 없죠. 국내 1위 IT대기업이란 곳은 센터장이 나와서, 생성형 AI는 한국이 3위라느니 정신승리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가 발달해서 많은 돈이 투자될 수 있나요? 아니죠. 이것도 결국 '안전'을 위해서 자본시장을 규제하고 있는 거라 알고 있습니다. 대기업 경영권을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잘 발달했으면, 삼성전자도 주가가 이렇게 떨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진정으로 자본주의가 잘 된다는 것은 '은행'이 아니라, '주식'이 잘 되어야 합니다. 자금 조달을 은행에 의존하는게 아니라, 주식시장에 의존하는게 자본주의라 생각합니다. 은행가의 판단력에 따라서 자본이 굴러가는게 아니라,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들의 안목에 따라서 자본이 굴러가게 하는게 막강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될 기업은 망하게 하고, 잘 될 기업은 크게 흥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좋은 기업 만들어서, 외국인들 투자하게 하고, 자본 많아진 걸로, 일자리도 늘리는 것입니다.
AI가 첨단이 아니고, 자본주의도 발달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땅이 매우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땅에서 나온 지하자원을 개발하여, 그걸로 기본소득도 제공하고, 비옥한 대형 농장에서 기계화로 식량을 풍부히 수확해 시장에 저렴하게 제공하고, 남은 땅에 풍력, 수력, 태양광 발전소도 세워서 값싼 전기로 살면 될 것입니다 — 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국은 땅이 좋지 않습니다. 자원도 없고, 농지도 비옥하지 않습니다. 땅이 크지 않은데, 그마저도 산지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투자를 해야 합니다. 투자는 무엇일까요? 위험을 감수하는게 투자입니다. 위험감수성향이 사회곳곳에 퍼져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줘야 하는 거라 봅니다. 경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유럽은 규제주의이고, 일본은 민주화가 잘 되지 않아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중국은 정치적 문제로 위험회피성향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말해, 위험을 감수하는 곳은 미국뿐입니다. 설마 미래에 오직 미국만 잘 되진 않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도 기회는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기회를 갖게 될까요?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위험을 감수한 국가가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법과 제도도, 그리고 문화도 위험을 감수하고, 발전욕 ・ 정직성 ・ 용감함을 키워야 합니다. 또라이들이 허용될 수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중에 탁월한 인재도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비난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우리나라가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전환이 잘 안 되거나, 혹은 그것에 시간이 걸린다고 할 때, 우리나라의 인재들이 트위터로 미국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봅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지적 발전을 위해서 좋은 수단이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지적 발전은 글에 의하는 겁니다. 이에 트위터가 유리합니다. 미국에서 똑똑한 사람들 트위터로 사람들과 활발히 소통합니다. 뛰어난 학자들, 뛰어난 기업가들, 뛰어난 예술가들, 강력한 정치인들. 그들을 팔로잉하고, 그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그러다 적응하면, 자신의 생각도 올리면서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태도가 전파될 것입니다.
언어장벽은 사라졌습니다. ChatGPT 등 AI로 번역하시면 됩니다. 약간의 수고스러움만 있을 뿐인데, 그걸 장벽이라 하기 곤란합니다. 그저 5cm 턱에 불과합니다.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기회입니다. 언어장벽이 사라졌다는게, 한국으로서 기회입니다. 트위터를 통해서, '배울 게 있는 사람들', '내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팔로잉하시길 권합니다. 설령 그들이 불편한 얘기를 하더라도, 나와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더라도, 그속에서 발전의 기회를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미국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우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이 빠르게 개혁되기 곤란하다면, 여기에서 머물게 아니라, 영어권 사람들과 활발히 소통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