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은 해묵은 것이고, 이 대립을 극복하려는 논의 역시 대립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선이나 악이 아니라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제안한 견해일 것이며, 이것이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탓에 오늘날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은 어쩐지 뒷북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똑같은 인간에게서 발현되는 이타적인 면모들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며, 성선설의 주창자들이 인간에게서 발견한 선함의 단서도 실은 이 이타성의 편린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타성마저도 이기심의 발로임을 증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겠지요. 결국 이 지점에서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은 이기심-유일론과 이타심-실재론의 대립으로 사실상 부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둘 중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요. 결론을 확정하는 것은 아직 무리겠지만, 이와 관련하여 눈여겨볼 만한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의 주요 참고문헌이기도 한 『바른 마음』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의 견해입니다. 하이트의 주장은 진화론과 심리학에 기반한 것으로, 간결하면서도 흥미로운 까닭에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 줍니다.
이타성의 합리적 설명, '이집단성'
『바른 마음』은 인간이 분명 이기적(selfish)이지만, 그와 동시에 [ 이집단적(利集團的, groupish) ]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9장 中). 다시 말해 인간은 집단 내부에서의 경쟁(다른 개인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제는 물론, 집단 간의 경쟁(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제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이타적이라고 부르는 행동들은 대개 이집단적인 마음으로 인해 발현되는, 같은 집단 구성원에 대한 '편향적 사랑'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10장 中, 「10장 요약」).
이러한 이집단성을 진화의 결과로 보았던 최초의 인물은 다름 아닌 다윈(Charles Darwin)입니다. 그는 이집단성의 발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자연선택이 작용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 먼 옛날에는 혼자 있기 좋아할수록 포식자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았기에 남들과 잘 무리짓는 자들이 자연선택됩니다. 둘째로, 남을 잘 도와줄수록 남에게 도움을 받을 확률도 높았기에 타인과 곧잘 협력하는 자들이 자연선택됩니다. 그리고 셋째로, 남들로부터 높이 평가받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친구나 배우자로서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에 평판에 민감한 자들이 자연선택됩니다(9장 中, 「승리하는 부족」).
하이트는 이것을 토대로 이기심을 전제하지 않는 순수한 이집단성이 자연선택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합니다. 우선, 인류는 무리짓는 경향으로 인해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게 됩니다. 또한 협력하는 경향으로 인해 남을 돕는 것을 유독 좋아하는 자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집단에 이러한 이집단적인 자들이 높은 평판을 얻는 문화가 존재했다면, 높은 평판을 얻은 자들이 친구나 배우자로서 가장 매력적이므로, 이집단적인 자들이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집단에서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이집단성을 보유한 구성원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며, 그에 따라 이집단성을 숭상하는 문화도 점점 강해지게 됩니다(9장 中, 「증거 C : 유전자와 문화는 함께 진화한다」).
그리고 이집단적 개인들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단결력이 강하며, 따라서 집단 간의 경쟁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과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집단성을 숭상하는 문화를 가지지 못한 집단들은 점차 밀려나거나 정복당했을 것이며,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집단성을 숭상하는 집단들만 지구상에 남았을 것입니다. 한편 이집단성을 숭상하는 집단 내부에서도, 그러한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낮은 평판을 얻었을 것이고, 따라서 남에게 도움을 받거나 배우자를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심한 경우에는 징계를 받거나 추방당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집단 간에서든 집단 내에서든 이집단성이 자연선택되는 압력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게 됩니다(9장 中, 「증거 B :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리기」).
이렇게 하여 형성된 이기적이면서도 이집단적인 인간의 본성을 하이트는 [ '90%는 침팬지와 같지만, 10%는 벌과 같다' ]고 표현합니다(9장 中, 「9장 요약」).
이집단성은 언제 발현되는가
그렇다면 인류의 마음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집단성은 과연 언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남을 위해 희생하거나 집단을 위해 헌신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집단성이 항상 활성화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희생하거나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어쨌든 종종 등장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집단성이 분명 어떤 조건에서는 활성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이 둘을 통속적인 차원과 성스러운 차원으로 분류한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뒤르켐(Émile Durkheim)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일상의 세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아를 잊고 [ '더 크고 고결한 무언가' ]의 일부가 되었던 성스러운 경험을 희구한다고 보았습니다(10장 中, 「많이 모일수록 흥분된다」).
사람들이 '더 크고 고결한 무언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는 예의 순간이 바로 이집단성이 이기심을 누르고 전면에 나서는 때입니다. 이것은 자연 속에 들어가기, 명상에 잠기기, 합창단에서 노래하기, 정치 집회에 참석하기, 설교 듣기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체험 가능하며, 이때 사람들은 어떤 고양감과 함께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10장 中, 「'나'를 버리고 '우리'로 들어가는 다양한 방법」). 다만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호르몬은 옥시토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옥시토신은 사람들을 같은 집단 구성원들과 결속시켜줄 뿐 인류 전체에 엮어주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희구하는 '더 크고 고결한 무언가'의 범위는 결국 자신이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에 한정되는 것입니다(10장 中, 「인간의 군집 스위치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이집단성을 끌어올려 집단의 단결력을 강화시키는 각종 행사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스포츠 경기는 선수들은 물론 관중까지도 자신이 그저 '전체의 일부'라고 느끼도록 만들며, '성스러운 고차원의 세계'를 체험하게 합니다. 이를 계기로 공동체의 결속은 한층 강화되고 또 재확인되며, 구성원들은 영적인 것에 대한 갈증을 채우는 동시에 공동체를 좀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11장 中). 앞서 언급한 정치 집회나 합창은 물론 대형 공연, 기념식, 그리고 종교의식 또한 사회에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행사들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와 같은 경험을 통해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며, 그래서 상징과 표시를 통해 자신이 특정 집단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곤 합니다(9장 中, 「증거 C : 유전자와 문화는 함께 진화한다」).
하나의 규범을 공유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이렇게 이집단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왜 사람들이 소속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친해지고 도움을 주고받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충분히 강한 인간은 자신을 전체의 일부분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일부분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신뢰를 보내며 곧잘 협력하게 되는 것이죠. 그 타인이 자신과 같은 가치와 규범을 따르는, 자신의 확장이자 분신이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이집단성의 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집단의 가치와 규범은 구성원들 사이에서 실제로 널리 공유되며,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다면 신성시되기도 합니다. 어떤 규칙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의 약속이고 자신은 공동체의 일원이므로 '당연히' 그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인류학자 로이 라파포트(Roy Rappaport)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 "사회적 규약에 신성함을 부여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가진 자의성을 필요성의 망토로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11장 中, 「더 조리 있는 설 : 종교 역시 인간이 선택한 것」)
이처럼 신성화를 통해 규칙에 당위를 부여하는 것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질서와 규범을 유지하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11장 中, 「더 조리 있는 설 : 종교 역시 인간이 선택한 것」). 만일 규칙의 타당성을 개개인에게 논리적으로 납득시키려고 시도한다면, 사람들은 똑같이 개인 차원의 합리성을 동원하여 자신의 득실을 근거로 규칙의 준수 여부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규칙을 신성화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만든다면, 사람들은 득실을 따지는 대신 '원래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규칙을 준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집단성은 소속감을 낳고, 소속감은 자신이 '더 크고 고결한 무언가'의 일원이라는 믿음을 낳고, 그 믿음에서 이기심이 배제된 행위가 나온다는 것이죠(11장 中, 「뒤르켐의 설 : 공동체를 이끄는 강력한 힘」).
따라서 사람들의 이기심을 일깨우지 않으려면 합리성보다는 성스러움에 호소해야 하며, 다수의 개인들에게 하나의 규범을 관철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자본의 두 기반, 종교와 국가
그리하여 대부분의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단일한 정체성, 가치, 규범 등을 공유하도록 만들고 싶어하고, 이것이 성공할 때 공동체는 도덕원칙을 정립하고 무임승차자들을 제재하며 구성원 간의 협력은 증진함으로써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 도덕원칙이 늘 객관적으로 정의로운 도덕원칙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도덕원칙이 잘 지켜지는 공동체가 그렇지 않은 공동체보다 더 단결되어 있고 윤택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겠지요. 하이트가 공동체의 도덕성을 지탱해 주는 사회문화적 자원을 [ '도덕적 자본' ]이라고 부르며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12장 中, 「공동체를 지탱하는 도덕적 자본의 힘」).
도덕적 자본이란 어떤 공동체가 가진 가치, 미덕, 규범, 관습, 정체성, 제도, 첨단 기술 등이 진화한 심리 기제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이 도덕적 체계로서 함께 작용하여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거나 규제하며, 나아가 협동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 도덕적 자본의 형성에는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들의 소속감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컨대 종교가 이루어내는 도덕적 선행은 종교적 믿음보다는 종교적 소속감에 의한 것이며, 사람들은 (믿음의 깊이와는 별개로) 동료 종교인과의 관계가 깊을수록 이타적인 행동에 적극적인 경향을 보입니다(11장 中, 「신은 과연 선한가 악한가」).
그렇기에 우리는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대해 가지는 소속감이 강할수록 그 공동체에 도덕적 자본이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이나 중동이나 아메리카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 종교 ]가 깊숙이 침투해 있는 지역에서는 종교적 소속감이 실제로 도덕적 자본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구성원들의 상호 동질감과 신뢰, 소속감의 원천이 종교생활에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는 달리 탈종교성이 강한 지역, 대표적으로 동아시아와 같은 지역에서는 사회가 종교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대신에 이러한 지역에서 소속감의 원천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마도 [ 국가 ]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하이트는 기본적으로 미국 사회를 겨냥해 『바른 마음』을 썼기에 탈종교적인 사회에 대해 많은 서술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파시스트 국가 역시 막대한 도덕적 자본을 쌓는 것이 가능하다는 12장의 언급을 고려한다면,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근거한 소속감 역시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도덕원칙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12장 中, 「공동체를 지탱하는 도덕적 자본의 힘」). 게다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유교의 관심사도 신이 아니라 국가였지요. 결국 이러한 지역에서 공동체를 통합하고 소속감을 부여하는 것은 종교보다는 국가적 권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 자본은 '같은 종교를 믿기 때문에' 느껴지는 동질감 또는 '같은 나라 사람이기에' 느껴지는 동질감에 의해 형성되며, 탈종교적인 사회에서는 후자에 의한 소속감이 특히 중요할 것입니다.
Insight: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마치 종교처럼 신성하다
그리고 여기까지 논의했을 때, 우리는 왜 유독 동아시아에서 역사의식이 민감한 화두가 되고 또 역사 분쟁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거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가 구성원들에게 나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북돋아줄 수 있는 두 가지 축은 곧 [ '영광스러운 과거' ]와 '번영하는 현재'이며,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국민들의 소속감이 약화되어 사회의 도덕적 자본이 감소할 위험이 있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은 늘 자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위인들을 성대하게 기념하며, 이것이 특히 절실한 동아시아에서는 탈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이 적극적으로 배격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동아시아 문화권이 서양에 비해 역사왜곡에 민감하다던가, 역사적 인물의 문화적 변용에 엄격하다던가, 혹은 민족주의적 열정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종교적인 문화권에서도 국가와 민족이 소속감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종교에 비하면 그 비중은 낮습니다. 반면에 탈종교적인 문화권에서는 소속감 유발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므로, 자연스럽게 국가와 민족이 그 위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 동아시아 문화권의 역사관은 다른 문화권의 역사관과 일대일로 대응되기보다는, 차라리 종교관과 대응된다 ]고 보아야 하는 것이죠.
물론 동아시아라고 모두 이러한 경향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교문화권 중에서도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그동안 모호했던 많은 것들이 잘 설명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역사의식을 두고 벌어지는 첨예한 대립과 역사적 경쟁관계에 대한 깊은 감정, 국사관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가지기 마련인 혼란과 분노에 대해서도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유효할 것입니다. 그야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굳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반응을 내보일 수 있겠지만, 그 동기와 강도에 대해서 해명해야 한다면 보다 심층적인 통찰이 필요할 테니 말이지요.
『바른 마음』을 읽고 나니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어서, 정리해볼 겸 잡상이나마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