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룬 살별 혜(彗)로 돌아가보자. 彗에서 파생된 한자 중에는 슬기로울 혜(慧)가 있는데, 이 글자와 상통하는 글자로 은혜 혜(惠)가 있다. 음이 같고 뜻이 비슷하다. 慧뿐만이 아니다. 옛 한문에서는 막내 계(季)가 惠 대신 쓰이기도 하고, 별반짝거릴 혜(暳) 대신 쓰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惠가 彗를 성부로 하는 형성자들과 상통해서 쓰일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惠는 실을 잣는 데 쓰이는 도구인 방추를 나타내는 방추 전(叀)과 마음 심(心)이 합한 형성자다.
왼쪽부터 惠의 금문, 설문해자 고문, 설문해자 소전, 현대의 해서. 출처: 小學堂
惠와 叀의 음이 먼데 어떻게 형성자일까? 갑골문에서는 惠 대신 叀을 써서 오직 유(唯)보다도 더 강한 긍정을 표시하는 용법이 있다. 叀이 惠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은 惠의 소리가 叀에서 가져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어쨌든, 뜻은 心에서 가져오고 소리는 叀에서 가져왔으며, 또 실을 잣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는 데에서 슬기롭다는 뜻이 나왔다. 지금 쓰이는 인애, 은혜의 뜻은 슬기로움에서 다시 인신된 것이다.
叀은 실을 잣는 데 쓰이는 방추의 모양을 본뜬 상형자로, 지금은 쓰이지 않으나 오로지 전(專)과 惠에 그 흔적을 남겼다.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현대의 방추, 叀의 갑골문, 방추를 써서 섬유에서 실을 잣는 모습. 오른쪽 그림의 a는 섬유, b는 방추의 회전축, c는 방추의 추에 해당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小學堂
위 그림을 보면 叀의 갑골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위는 방추에 들어오는 섬유, 가운데는 방추의 회전축, 아래는 방추의 추에 해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을 치고 그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는 것이 갑골문이라서 그런지, 叀을 방추의 뜻으로 쓴 용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叀은 후세의 자전에서는 專과 동자로 해설하는데, 이는 설문해자에서 '叀은 오로지의 뜻으로, 조심하고 신중히 한다는 말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오로지'라는 뜻에 집착해 이 글자를 조심하는 모습을 뜻하는 싹날 철(屮)과 작을 요(幺)가 합한 회의자라고 잘못 분석했다.
叀은 방추는 물론이요, '오로지'라는 뜻으로도 쓰인 예가 갑골문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위에서 말했듯 현재 발견된 갑골문에서는 강한 긍정의 의미로 쓰인 예만 있으며, 이 용법은 惠가 계승했다.
'오로지'라는 뜻을 나타내는 專은 지금은 叀과 마디 촌(寸)이 합한 구조로 되어 있지만,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손을 뜻하는 또 우(又)가 寸 대신 들어가 있다. 설문해자에서 又가 寸으로 바뀐 것이 지금까지 내려왔다. 원래는 손으로 방추를 잡고 굴린다는 뜻이었고, 여기에서 지금의 '오로지'라는 뜻이 나왔다. 갑골문에서는 인명이나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왼쪽부터 專의 갑골문, 금문, 소전, 해서. 출처: 小學堂
叀(방추 전, 급수 외 한자)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專(오로지 전): 전용(專用), 독전(獨專) 등. 어문회 급수 4급
惠(은혜 혜): 은혜(恩惠), 혜택(惠澤) 등. 어문회 급수 준4급
專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專+人(사람 인)=傳(전할 전): 전달(傳達), 선전(宣傳) 등. 어문회 급수 준5급
專+囗(에울 위|나라 국): 團(둥글 단): 단체(團體), 경단(瓊團) 등. 어문회 급수 준5급
專+土(흙 토)=塼(벽돌 전): 전곽(塼槨), 전묘(塼墓) 등. 어문회 급수 준특급
專+心(마음 심)=慱(근심할 단): 단단(慱慱) 등. 어문회 급수 특급
專+水(물 수)=漙(이슬많을 단): 노단(露漙), 응단(凝漙) 등. 어문회 급수 특급
專+瓦(기와 와)=甎(벽돌 전): 전탑(甎塔), 모전탑(模甎塔) 등. 급수 외 한자
專+石(돌 석)=磚(벽돌 전): 전장(磚匠), 고전(古磚) 등. 급수 외 한자
專+艸(풀 초)=蓴(순채 순): 순채(蓴菜), 사순(絲蓴) 등. 어문회 급수 준특급
專+車(수레 거/차)=轉(구를 전): 전송(轉送), 회전(回轉/廻轉) 등. 어문회 급수 4급
惠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惠+心(마음 심)=憓(사랑할 혜): 민혜(閔憓), 남혜(南憓) 등. 어문회 급수 특급
惠+禾(벼 화)=穗(이삭 수): 수상(穗狀), 발수(拔穗) 등. 어문회 급수 1급
惠+艸(풀 초)=蕙(난초/혜초 혜): 혜초(蕙草), 난혜(蘭蕙) 등. 어문회 급수 준특급
惠+言(말씀 언)=譓(슬기로울 혜): 왕혜(王譓), 이혜(李譓) 등. 어문회 급수 특급
轉에서 파생된 한자는 다음과 같다.
轉+口(입 구)=囀(지저귈 전): 앵전(鶯囀), 춘앵전(春鶯囀) 등. 급수 외 한자
叀에서 파생된 한자들.
방추는 둥글고, 방직을 할 때 이리저리 왕복하며 움직이기 때문에, 둥근 것, 또는 움직이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 뜻은 주로 방추를 손으로 들고 있는 專 계통의 한자들에 남아 있다.
團(둥글 단)은 囗(에울 위|나라 국)이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나라나 경계가 방추처럼 둥글게 감싼다는 뜻을 나타낸다.
塼(벽돌 전)은 土(흙 토)가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흙을 둥글게 뭉쳐서 만든 벽돌을 뜻한다.
漙(이슬많을 단)은 水(물 수)가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물이 둥글게 뭉친 이슬을 뜻한다.
甎(벽돌 전)은 瓦(기와 와)가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둥글게 뭉쳐서 기와같이 구운 벽돌을 뜻한다.
磚(벽돌 전)은 石(돌 석)이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돌처럼 단단하고 둥글게 뭉친 벽돌을 뜻한다.
蓴(순채 순)은 艸(풀 초)가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둥근 풀인 순채를 뜻한다.
傳(전할 전)은 人(사람 인)이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사람이 움직이며 소식을 전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轉(구를 전)은 車(수레 거/차)가 뜻을, 專이 소리를 나타내며, 수레가 방추처럼 움직이며 구른다는 뜻을 나타낸다.
塼, 甎, 磚 이 세 한자는 '벽돌 전'으로는 모두 같은 한자로, 《강희자전》에서는 塼과 磚을 甎과 같다고 풀이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단어마다 한자를 다르게 쓰는 것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벽돌로 지은 무덤인 전묘에서는 塼을 쓰고, 벽돌로 쌓은 탑인 전탑에서는 甎을 쓴다.
惠는 파생된 한자들의 뜻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음이 같은 彗에서 파생된 한자들에 '작다'는 뜻이 있는 것처럼 惠도 그렇다. 譓는 슬기롭다는 뜻이니 생각하는 것이 매우 세밀한 것이고, 穗는 이삭을 뜻하니 곧 벼에서 뾰족한 부분이다.
이상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叀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專과 惠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대부분 원래 그 형태였으나, 穗는 조금 다르다. 穗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거쳤다.
왼쪽부터 穗의 갑골문, 춘추전국시대 진(晉)계 문자, 설문해자 소전, 설문해자 혹체, 설문해자 소전의 해서, 설문해자 혹체의 해서인 현재 형태. 출처: 小學堂
갑골문에서는 惠와는 전혀 관계 없는 형태로, 벼 따위 곡식을 나타내는 벼 화(禾)의 끝 부분을 손을 나타내는 又와 칼 도(刀)로 수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서 곡식에서 수확하는 끝 부분인 이삭을 뜻하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칼은 사라지고 수확하는 손만 남았고 이를 《설문해자》에서 수록했다.
그런데 《설문해자》에서는 표제자 외에 혹체, 곧 다른 형태로 지금의 穗의 형태를 수록했다. 이 한자는 禾가 뜻을 나타내고 惠가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다. 穗 대신 풀 초(艸)가 뜻을, 드디어 수(遂)가 소리를 나타내는 다른 형태의 고자도 있고, 이 글자가 어찌 보면 지금의 穗보다 더 어울리는 성부를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나, 결국은 穗가 세 글자 간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요약
叀(방추 전)은 실을 잣는 데 쓰는 방추의 모양을 본뜬 한자며, 갑골문에서는 惠(은혜 혜)의 뜻인 강한 긍정으로 쓰였다.
叀에서 專(오로지 전)·惠(은혜 혜)가 파생되었고, 專에서 傳(전할 전)·團(둥글 단)·塼(벽돌 전)·慱(근심할 단)·漙(이슬많을 단)·甎(벽돌 전)·磚(벽돌 전)·蓴(순채 순)·轉(구를 전)이, 惠에서 憓(사랑할 혜)·穗(이삭 수)·蕙(난초/혜초 혜)·譓(슬기로울 혜)가, 轉에서 囀(지저귈 전)이 파생되었다.
叀은 파생된 글자들에 둥긂이나 움직임, 작음의 뜻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