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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10 17:59:29
Name 계층방정
Subject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7) 시흥의 아홉째 딸, 서초 (수정됨)

시흥의 열두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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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1)
 서문. 작은 세 고을에서 시흥이 시작되다
 1. 시흥의 맏딸, 영등포

 2. 그때 그랬다면? - 영등포부 승격
 3. 시흥의 둘째 딸, 안양
 4. 시흥의 셋재 딸, 관악
 5. 시흥의 넷째 딸, 구로
 6.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
 7.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
 8. 그때 그랬다면? - 시흥 있는 시흥
 9. 시흥의 일곱째 딸, 안산
10. 시흥의 여덟째 딸, 과천

11. 시흥의 아홉째 딸, 서초

현대 서울 동남부의 강남·서초·송파 3구는 땅값이 높고 부유층이 사는 곳으로 유명해 한데 묶어 강남이라 한다. 이 세 구 중에서도 대표를 꼽는다면 단연 강남구다.

과거로 돌아가면, 강남구와 송파구는 성동구에서 나왔고, 서초구는 한때 성동구에 속하긴 했지만 원래는 영등포구에 속했다. 그런데 이 강남 일대를 옛날에는 영동이라고 일컬었다. 한때 강남구 일대를 관할한 성동구 영동출장소가 있었고, 지금도 영동대교, 영동대로 등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그리고 영동이란 이름의 뜻은 한때 시흥의 중심지였던 영등포의 동쪽이다. 시흥의 딸 도시들 중에 나머지와 어울리지 않고 강남 3구로 묶이는 서초구이지만, 시흥의 흔적은 이렇게 영동이란 이름으로 남은 것이다.

강남 3구의 대부분이 성동구에서 나왔고, 더 거슬러가면 광주군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왜 굳이 강남구 대부분을 관할한 옛 언주면이나 성동구에서 이름을 가져오지 않고 굳이 서초구만을 가리키는 영동이란 이름이 이 지역을 대표하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를 전해 줄 서초구의 역사는 서울의 강남 개발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강남 개발사를 따라가 보자.

서초구는 대강 강남대로를 따라 그 동쪽은 광주군 언주면, 그 서쪽은 시흥군 신동면에서 비롯했다. 서초구의 인구 대부분이 강남대로 서쪽에 살고 있으니 시흥군의 이야기가 결국은 서초구로 이어진다. 그러나 1914년 이전에는 과천군에 속한 시흥군 신동면은 옛 과천군의 중심지도 아니었고,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해 농사 짓기도 좋은 땅도 아니었다. 노량진과 동작진, 한강진 사이의 땅으로 교통의 요충지도 아니었다. 한강진은 조선시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주요 간선도로인 영남대로로 이어지는데, 이 영남대로가 지금의 강남대로에 해당한다. 강남대로는 지금도 서초구와 강남구를 가르는 경계선이듯, 당시에도 시흥군과 광주군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신동면의 특이사항을 굳이 말하자면, 과천군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담배를 많이 생산했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해방 후, 개발 전 강남 역사에서 짚고 넘어갈 만한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1950년 6월 27일 밤,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서빙고와 한남의 나루를 건너 피란했다는 것으로, 장차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었다. 둘째는 신동면과, 이웃한 광주군 언주면 모두 급증하는 서울시민의 채소 공급지가 되면서 주된 농사가 벼농사에서 채소농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963년 1월 1일, 서울 대확장으로 인해 한강 이남의 김포군, 시흥군, 광주군 땅 일부가 서울에 편입되면서, 신동면도 서울 영등포구의 일부가 되었다. 너무나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된 영등포구는 다섯 출장소에 행정기능을 나눠주었는데, 신동면은 신동출장소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이 당시 지금의 서초구가 될 서초동 등 9개 동의 인구는 1만 2,069명에 불과했으며, 강남구가 될 일원동 등 16개 동의 인구도 1만 4,867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막 서울로 편입된 강남과 서초 일대는,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교수의 말에 따르면 “한없이 한적하고 또한 한없이 평화로운 그런 마을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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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와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제3한강교, 지금의 한남대교.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Hannam Bridge in Winter

강남 개발의 시초는 지금의 한남대교인 제3한강교 건설이었다. 조선일보 1966년 1월 7일자 기사에서는 서울시의 “강남개발구상”을 보도하고 있다. 서울시는 도시 인구를 교외로 분산하기 위해, 동작동에서 뚝섬까지 이르는 3,500만평의 방대한 구역을 개발해 12만호 60여만명이 이주할 수 있도록 한다는 도시개발 계획이었다. 이에 따르면 제3한강교는 강남을 개발하고자 만들어진 다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강남개발구상은 박흥식이 경영하는 화신산업에 의한 민간 개발계획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박흥식의 남서울 개발계획 이전에 서울시가 먼저 개발계획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실은 이 서울시의 강남개발구상은 제3한강교 건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랴부랴 발표한 엉성한 계획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3한강교가 먼저 있었고 이후에 경부고속도로와 강남개발이 뒤따르는 것이다. 제3한강교가 1966년 1월 19일에 착공될 때 서울시민 중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신문에도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제3한강교는 강남개발구상에서 말한 것처럼 남서울을 개발하기 위해 지은 다리가 아니었다. 6.25 전쟁 때 제1한강교와 광진교 두 개의 다리만으로 고생고생하며 피란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울시민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을 아픈 순간이 있다. 이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날까 염려해, 만약의 경우에 강을 건너 피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리인 것이다.

제3한강교는 지어질 당시 폭 20m, 4차선 교량으로 지어졌으나, 북한에서 평양 대동강에 폭 25m의 다리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설부 국토보전국장 서정우의 명령으로 25m보다 1m 더 넓은 26m로 변경되었다. 당시에는 아무 쓸데없는 자존심 대결이라고 생각되었던 이 결정 덕분에 경부고속도로의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66164f1195a6e.jpg?imgSeq=204452020년 1월 찍은, 오랫동안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었던 한남대교 남단. 출처: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6.25 전쟁을 계기로 서초구를 지나게 지은 제3한강교는 또 다른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경부고속도로다.

경부고속도로는 당시 공업국가로 발돋움하는 대한민국의 물류 수송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 개발도상국으로 자동차도 적은데 자동차 전용도로가 필요한가, 그리고 이미 경부선도 있는데 또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교통로를 만들어야 하는가 등의 반대가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해 아우토반에 큰 감명을 받았고, 당시 독일 수상인 에르하르트가 기간시설을 정비해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부고속도로는 제3한강교 때문에 지금의 서초구를 지나는 도로가 되었다.


그러나 제3한강교의 개발은 생각보다 지지부진했는데, 당시 서울시장인 김현옥이 강남 개발에 의욕적이지 않았고 김현옥과 사이가 나쁜 장기영 부총리가 말죽거리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어 제3한강교가 완공되면 큰 이득을 볼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옥은 서울시 단독으로 제3한강교를 짓는 것에 반대했고 1968년에는 예산으로 1,000만원밖에 주지 않았다.


1967년 11월 14일, 고속도로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박 대통령은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다른 노선에 앞서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조사단을 구성해 고속도로의 경로를 논의했고, 네 가지 안 중에서 서울의 제3한강교 남단에서 시작해 수원으로 향하는 현재의 노선이 결정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공식적인 착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었으나, 서울~오산간 공사는 이미 1967년 11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렇게 서두른 것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원맨쇼’로 이끈 박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울~수원간은 1968년 12월 21일에 가장 먼저 개통되었는데, 이는 경인고속도로의 완공과 같은 날이다.

이렇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빠르게 진행되자 곤란해진 것은 제3한강교 건설을 방해하고 있던 김현옥이었다. 당시는 여의도 윤중제 건설 때문에 서울시도 돈이 부족해 김현옥이 마음을 바꾼다고 곧바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1969년에는 서울시 예산 5억 5,000만원에 국고 3억원에 철근 차관까지 박박 긁어모아 겨우 12월 26일에 공사를 끝낼 수 있었으니, 경부고속도로 최종 준공일인 12월 29일에 아슬아슬하게 맞춘 것이었다.

역사의 우연 때문에 영등포구 동쪽 땅, 즉 영동에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게 되었다. 이제 영동은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발전이 눈앞에 있는 땅이 되었다. 정부 당국은 영동 땅값은 어차피 뛸 것이니 미리 토지를 구매했다가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영동을 개발하기로 했다.


따라서 강남 개발의 순서는 이렇다. 유사시에 서울에서 피란하기 위해 제3한강교를 놓았고, 박 대통령의 우연한 구상 때문에 제3한강교에서부터 경부고속도로를 놓았고, 이왕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강남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먼저 강남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놓고, 이를 위해 제3한강교를 설치한 게 아니다.

앞서 말한 건설조사단은 노선뿐만 아니라 노선이 지나갈 토지 관리까지 맡아, 서울시에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갈 땅에 대규모 구획정리사업을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계획에 없던 일어었으나 박 대통령의 지시에 어떻게 저항하랴. 서울시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영등포구 동쪽 땅만으로 최소한의 구획정리를 하고자 했으나 7.6 km나 되는 고속도로를 만들어야 하니 결국 1,033만 4,641 제곱미터(약 313만평)에 달하는 넓은 땅이 들어갔다. 이렇게 1968년 2월 2일에는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공고되었다. 그러나 이미 고속도로만으로 9만 2,000평이 들어갔기 때문에 나머지 땅으로는 도로·공원·학교용지를 다 부담할 수 없어, 영등포구를 넘어가 성동구의 528만 제곱미터가 새로 편입되어 최종적으로는 1,417만 1,133 제곱미터(약 428만 6,768평)가 되었다. 이는 1969년 11월 28일에 공고되었다.


결국은 왜 강남이 영동이냐는 해답이 나온 셈이다. 본래 영등포구의 동쪽 땅만을 개발하고자 했으나 땅이 모자라서 성동구 서쪽 땅까지 넘어갔다. 그래서 이 개발지구는 영등포구의 동쪽, 즉 영동이 된 것이고, 영동지구가 성동구까지 확장된 것이다. 개발을 마치고 나니 성동구에서 비롯한 강남구가 강남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개발의 시작은 영등포구 동쪽, 즉 영동의 서초구였다.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나왔지만, 강남구의 시초도 서초구인 것이다. 서초구는 당당한 시흥의 딸이자, 강남 개발의 맏이다.


66164f433c505.jpg?imgSeq=20446삼성동의 구 한국전력 본사. 삼성동을 중심으로 한 영동제2지구 개발은 강남의 중심지가 서초구에서 강남구로 옮겨가는 계기가 된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Kepco 2.

그렇지만 누누이 말하듯이 지금 강남의 중심은 강남구다. 서초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은 영동제1지구구획정리에 포함되는데, 이 지역 개발계획은 당시에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듣지는 못했다. 강남구 일대가 개발되는 영동제2지구기본계획을 통해 1970년 11월 5일 남서울계획의 전모가 발표되는데, 이 남서울개발에서는 영동 제2지구인 삼성동·청담동·압구정동·학동 일대가 중심지가 되어 봉은사 남쪽 삼성동 부지에 12개 국영기업체가 들어갈 청사를 건축하기로 했다. 이렇게 강남 개발의 중심지는 처음으로 개발된 서초구에서 2차로 개발된 강남구로 넘어갔다.


굳이 영동제2지구가 중심지로 선정된 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윤진우 도시계획국장이 박 대통령의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비밀리에 매입한 땅이 바로 영동제2지구 봉은사 앞에 있던 것이다. 왜 하필 봉은사 앞 땅이었냐면, 비밀리에 상공부단지 10만평을 지을 대규모 땅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한 곳에 집중된 땅을 사야 했고 그게 봉은사에 속한 전답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강남 투기사건이 드러나면서 윤진우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고, 윤진우가 추가로 구입한 상공부주택단지는 결국 무산되었다.

이제 영동제1·2지구 개발의 초점은 서초구를 떠나 강남구로 향한다. 1970년대 서울시는 돈이 부족해 영동지구 개발을 적극적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원래의 계획은 지구 땅을 팔아서(체비지 매각) 번 돈으로 개발하겠다는 것이었으나 그것도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71년 하반기부터 여의도 땅이 팔리면서 영동지구를 개발할 여력이 생겼고, 첫 시도가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를 지은 것이었다. 그 다음은 1972년 발표한 영동지구 주택건립계획으로, 1,396동의 시영주택을 지어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 들이닥친 석유파동으로 인해 토지거래가 끊기다시피 하자, 정부는 각종 면세정책과 자금지원으로 강남 개발을 후원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1973년 6월 27일 고시된 영동1·2구획정리사업지구 개발촉진지구 지정으로 영동지구는 급격하게 개발되어 1973년 7월 1일에는 영동출장소가 설치되었고, 2년 후인 1975년 10월 1일에는 성동구를 분리해 강남구를 신설하기에 이른다. 1975년부터는 체비지 매각이 활성화되어 개발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72년부터 강북의 부도심 개발을 억제하는 정책이 잇따라 발표되어 생활편익시설을 강남으로 이전하도록 조치했다. 1979년에는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분구되었고, 1980년에는 방배동과 반포본동을 관악구에서 편입했다.

앞서 소개한 영동1·2지구의 인구는 1963년에 2만 6,936명에 불과했고, 1973년 말에도 5만 3,554명으로 2배 증가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개발촉진지구 효력이 끝나는 1978년 말에는 무려 21만 6,797명으로 5년 만에 4배 이상 증가했다.

1976년부터는 구도심의 명문 고등학교들을 강남으로 옮겨가게 해, 지금의 강남 8학군이 대표하는 교육의 중심지 강남을 낳는다. 대부분의 고등학교들은 강남구로 이전했지만, 서초구에도 1980년 서울고와 1986년 동덕여고가 이전해 와 강남구로 이전한 다른 고등학교들과 함께 강남 8학군을 형성한다. 아직 이때에는 서초구가 없었기에 학군의 이름은 강남이 되었고, 지금도 강남 8학군은 서초구와 강남구 둘을 함께 관할한다.


66164f7b34bfc.png?imgSeq=20447서초구의 주요 시설인 고속버스터미널(왼쪽)과 대법원(오른쪽). 출처는 각각 위키미디어 커먼즈 Seoul Express Bus Terminal,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한편 서울시는 주요 관공서와 금융기관의 본점을 강남으로 옮기려 했으나, 관련 기관과 협의 없이 발표했기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강남으로 이전한 관공서는 대법원과 검찰청인데,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된 이후에야 이전을 끝낼 수 있었다.

당시 서초구에 이전한 또 다른 주요 시설은 버스터미널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이 지금의 서초구 땅에 지어지기 전에는 버스터미널이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이 터미널들을 모아 1975년까지는 종합터미널을 건설하도록 교통부·건설부·서울시가 합의했다. 손정목 도시계획국장은 도심 근처인 의주로에 종합터미널을 짓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으나, 도시기능 분산을 목표로 하는 다른 당국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교통경제연구실에 용역을 맡긴 결과 도심에 하나, 영등포에 하나, 강남에 하나 이렇게 세 터미널을 짓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고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옮기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으므로, 서울시장 구자춘은 고속버스뿐만 아니라 시외버스도 전부 강남의 반포동 한 곳에 몰아넣기로 결정했다. 일단 만들어진 터미널에 버스회사들이 입주하지 않고 기존 터미널을 고수하려 하자, 구 시장은 잠수교와 남산 제3호 터널을 짓고 1977년에는 교통부장관 명의로 강북의 모든 터미널을 폐쇄하고 강남터미널로 강제로 옮겨가게 했다.

이 조치는 상당한 불편을 불러왔다. 당시에는 잠수교와 남산 제3호 터널이 완공되지 않았을 때였다. 시내버스와 택시는 횡포를 부렸고 1978년 4월 1일자 한국일보에서는 하루 10만명이 드나드는 강남터미널의 혼란상을 보도했다. 더구나 구 시장이 고속버스터미널과 함께 지어지는 2호선을 터미널을 지나지 않게 했기 때문에, 고속터미널역이 지어지는 3호선 영업이 되려면 아직도 7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결국 시외버스터미널까지 한 곳에 몰아넣은 것은 무리였음이 드러났고, 지금의 남부터미널 자리에 시외버스터미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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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시흥의 아홉 딸과 서초구.

서초구가 강남구에서 분리되는 것은 1987년에 결정된다. 이 당시 강남구의 인구가 무려 85만 1,055명에 달해, 처음 서울에 편입된 1963년과 비교하면 무려 30배 이상 증가했다. 신설 구의 이름으로는 강남 개발의 서막을 연 반포동에서 딴 반포구, 옛 행정구역인 신동면에서 따온 신동구 등도 제안되었으나 구의 중심에 있는 서초동의 이름을 따서 서초구로 이름이 지어졌다. 분리된 서초구의 인구는 1988년에는 40만 4,600명, 1989년에는 38만 183명이었는데, 1989년 서초구 도곡동이 강남구로 옮겨간 영향이다. 1988년과 1989년 서초구 소개 기사에서는 예술의전당, 법조타운, 버스터미널 등을 서초구의 주요 시설로 언급해 서울의 남부 관문이라고 묘사한다. 또 유흥업소가 밀집해 신임 구청장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는다고 전한다. 구 청사는 이름에 걸맞게 서초동에 지어졌다.

시흥의 아홉째 딸, 서초구는 이렇게 1988년 1월 1일 태어났다.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


참고문헌


分区(분구)대상5개区() 이름 결정 조선일보 | 1987.12.22 기사(뉴스)


서울5개區() 새해부터 分區(분구) 동아일보 | 1987.12.19 기사(뉴스)


新設(신설) 새區廳長(구청장)에 듣는다 (2) 瑞草區(서초구) "「情()나누는 이웃」캠페인 펼터" 동아일보 | 1988.01.27 기사(기획/연재)


새해 새区政(구정) (3) 瑞草區(서초구) 매일경제 | 1989.02.16 기사(칼럼/논단)


https://seoulsolution.kr/ko/content/%EA%B0%95%EB%82%A8%EA%B0%9C%EB%B0%9C%EA%B3%84%ED%9A%8D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01100067

손정목: 〈강남개발계획의 전개(I) : 1ㆍ제2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국토》 1998, 205, 87-99

손정목: 강남개발계획의 전개(II) : 1ㆍ제2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국토》 1998, 206, 106-119

손정목: 강남개발계획의 전개(III) : 1ㆍ제2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 《국토》 1999, 207, 110-122

손정목: 강남개발계획의 전개(IV) : 1ㆍ제2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 《국토》 1999, 208, 82-95

손정목: 다핵도시구상의 파급효과: 강남개발이 마무리되는 과정(II), 《국토》 1999, 214, 1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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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0 19:07
수정 아이콘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저 어릴 적만 해도 영동이라는 지명이 많았고 또 자주 쓰였었죠. 그런데 당시 90년대였는데 돌이켜보면 이미 영동이란 지역의 의미는 역삼 도곡 논현(굳이 더하면 양재) 정도로 축소된 것 같기도 해요.
계층방정
24/04/11 10:26
수정 아이콘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찾아보니 논현역 자리가 옛날에는 영동사거리였고, 역삼에는 영동아파트가 있군요. 영동의 의미 축소 과정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감히 추측컨대, 예전에는 영동이라고 이름 붙은 자리들에 새로운 시설이 들어설 때마다 영동 대신 새 이름을 붙여주면서 영동이란 이름이 밀려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동사거리에 논현역이 들어서면서 논현역사거리로 이름이 바뀐 것에서 착안한 추측입니다.
24/04/11 18:05
수정 아이콘
(수정됨) 논현역 사거리 인근에 있는 영동시장은 지금도 그대로 성업중입니다. 그 외에 강남구청역 인근에는 영동고가, 뱅뱅사거리와 양재역 사이에는 영동중이 있었는데 영동중은 우면동으로 이전해서 이름의 의미가 퇴색되긴 했군요.
기적의양
24/04/11 10:46
수정 아이콘
어릴 때는 영동을 청담동 등의 동과 같은 것인줄 알고 여기도 영동, 저기도 영동이라 하니 영동은 도대체 어디인가 참 어리둥절했었습니다.
계층방정
24/04/11 14:09
수정 아이콘
하필 강남에 한 글자 동인 학동이 있다 보니 더 헷갈릴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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