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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7/05 12:50:53
Name Neuschwanstein
Subject [기타] 이제는 추억이 된 발더스 게이트
이 놀라운 트릴로지가 위세를 떨친지도 어언 10년이네요. 요즘은 발매 후 2,3년만 지나도 고갤떡밥 신세가 되는 세상이지만, 발더스게이트쯤 되면 명실상부한 '고전게임'으로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10여년동안 컴퓨터 기종은 계속 바뀌었고 책장에 쌓아둔 게임CD들은 방청소 때마다 한무더기씩 버려졌습니다만, 아직도 제 하드디스크에는 모드 떡칠한 BGT가 깔려 있고 발더스 시리즈는 촌스러운 종이케이스와 함께 남아 있네요.

제가 어떤 경로로 이 게임을 구입해서 즐기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납니다. 발매하자마자 열광한 부류는 아니었던건 확실합니다. 아주 싼 가격에(쥬얼판이라고 하나요?) 영문판을 어디선가 샀고, 안되는 독해력으로 낑낑대며 열심히 플레이를 했죠. 제 인생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세상을 잊을 정도로 게임에 미쳤던 순간이 두 번 있는데, 발더스 게이트 트릴로지는 엘더스크롤 : 오블리비언과 더불어 그런 게임이었습니다.

파판이니 드퀘니 하는 일본 게임에 익숙했던 많은 한국의 게이머들이 모두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처음 이 게임을 접했을때의 당혹감은 컸습니다. D&D룰(정확히는 AD&D이지만)을 구경도 못해본 사람 입장에선, 단지 룰과 세계관 세팅에 충실했을 뿐인 이 게임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난해했죠. 영어 다이얼로그를 해석하고 말고는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결국은 거기에 적응하고 더 나아가서는 중독되다시피 했지만요.

사실 따져보면 이 게임은 하드코어한 게임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D&D기반의 게임 중에서는 캐쥬얼한 편이라고 봐야 할겁니다. 이제는 소위 '서양RPG'도 거의 예외없이 캐쥬얼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니 구분이 무의미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인피니티 엔진은 CRPG화하기 힘들어보이는 룰과 세계를 상당히 그럴듯하면서도 조작하기 쉽게 한 적절한 틀이었습니다.

물론 홉고블린과 오크를 때려잡고 리치와의 전투에 앞서 메모라이즈를 궁리하는, 그런 재미에서도 발더스 시리즈는 혁신적이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사람들을 미치게 했던 일등공신으로 유려한 스토리를 빼놓을 수는 없을겁니다. 이른바 '바알스폰 사가'가 그것이죠.

'선택받은 운명의 영웅이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다'라는 매우 흔해빠진 모티브로 퉁치고 말기엔, 바알스폰 사가는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맞는데, 문제는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영광으로의 길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파멸이 예정된 비극이라는 것이죠. '특별한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유산을 보장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 자신의 야망을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유산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혈육이랄 수 있는 형제들과 말 그대로 죽음의 경쟁을 해야 했고, 정신적 아버지랄 수 있는 사람을 잃어햐 했습니다. 한편으론 그 유산을 노리는 무지막지한 악인에게 온갖 고통을 당해야 했고, 결정적으로 그런 투쟁의 끝에 기다리는건 파멸 뿐입니다. 이 '아버지'라는 작자의 치밀한 계획하에서 주인공은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합니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닥쳐오는 위협을 견디는 투쟁을 이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거의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 정도의 영웅적 성과를 거듭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의 주민들의 시선은 싸늘합니다. 주인공을 투쟁의 연속에 빠뜨리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하는 힘을 제공한 아버지의 유산 때문이죠. '더러운 피'. 두 나라를 전쟁의 위험에서 구해내고, 한 종족을 파멸시키기 직전까지 갔던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쳐도 주인공의 피에 흐르는 악은 사람들의 혐오와 멸시를 불러올 뿐입니다. (TOB에서 테디르 여왕이 파견한 군대와의 대규모 전투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격정적인 연출이 있었던건 아니지만, 그토록 포가튼 렐름의 평화를 위해 싸웠음에도 모든 학살범죄의 누명을 쓰고 현상금이 걸리는 주인공에 대한 연민..)

흥미로운 점은, 그럼에도 주인공에게(결국은 플레이어에게) 이 장구한 비극의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지를 결정할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저는 트릴로지의 대단원인 '바알의 왕좌'편을 가장 좋아합니다. 주인공 일행이 신에 필적하는(물론 CRPG적인 한계를 고려해야겠습니다만) 강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순수한 컴퓨터 게임으로서의 재미는 떨어지지만요. TOB에 이르면 주인공은 신들이 주목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친아버지'의 사악한 계획이 실현 직전까지 왔지만, 신들의 관심사는 그런게 아닙니다. 사실상 승자는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주인공으로 결정되었고, 관건은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아 그대로 아버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버지의 사악한 길을 포기하지만 그 힘을 가지고 신의 반열에 들 것인가. 선택지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온전한 한 사람의 필멸자로 남을 것인가. 그리고 이 선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수많은 질문들을 통해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멋진 이야기의 공식 소설은 세계의 팬들이 공인(?)하는 흑역사로 남게 되었습니다만... 바알스폰 사가는 그저 게임시리즈로 즐기면 족합니다.

이젠 아무도 이런 게임을 만들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그럴거구요. 이 정도의 시리어스함을 추구할거라면 그 장르는 RPG가 아니라 FPS같은 다른 장르가 되겠죠. 그럼에도 미련을 떨칠 수가 없네요. 무수히 많은 눈 튀어나올 정도의 화려한 게임들이 엄청난 자본을 업고 출시되고 있지만, 저에겐 여전히 인생 최고의 게임은 발더스 게이트 트릴로지입니다.

벌써 몇번째 이 게임을 '새로 시작'했는지 셀 수가 없습니다. 매번 새로운 캐릭터의 이름을 짓고, 종족과 클래스를 정할때마다 느껴지는 설렘은 새롭습니다. TRPG를 해본적은 없지만, 새 캐릭터시트를 만드는 플레이어의 기분이 이런 것이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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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13/07/05 13:13
수정 아이콘
그 놈의 셀레스테알 퓨리 때문에 어떻게든 카타나를 찍었던 기억이 나네요..
13/07/05 13:16
수정 아이콘
주사위를 잘 굴려야...
13/07/05 13:20
수정 아이콘
제 인생을 바꾼 게임이죠...

발더스게이트 개발진이 한국에 방문했을때 같이 찍은 사진과 싸인들은 가보중 하나입니다. 흐흐흐..

그때 영어를 좀 잘했더라면.. 대화도 많이 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크게 남긴 하지만..
리니시아
13/07/05 13:21
수정 아이콘
힘 18/00 였던가요?? 찍으려고 주사위 무쟈게 굴렸었죠 크크크
트릴비
13/07/05 13:21
수정 아이콘
흑흑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발더스게이트
중학교때였는지 고등학교때였는지 어쩌다 꽃혀서 1, 2 확장판 패키지로 다 사고, 아이스 윈드 데일도 사고, 네버윈터나이츠도 사고..
D&D 계열 나왔던건 모조리 사서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네요 크크

파이어와인 D&D 렐름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약간 어이없이 망하면서 애정이 많이 식긴 했는데..
지금도 처음부터 재미있게 플레이 할 수 있네요 크크크
위로의 여신
13/07/05 13:22
수정 아이콘
몇 번이나 이 게임을 '새로 시작'했었는지 셀 수 없는 사람이 여기 또 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원채 판타지 세계관을 좋아했었는데 게임잡지에서 이 게임에 대한 정보를 보고 정말 하고싶다고 생각하던 중
1년 정도 뒤에 발더스게이트1 한글판 발매소식을 듣고 없는 돈을 모아 바로 정품을 구입했었죠.
당시 중학생이던 저에게는 조금 어려운 게임이었습니다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1,2 합쳐서 몇 번을 클리어 했는지 모르겠네요.
동료를 바꿔서 하고 직업을 바꿔서 하고 다른 방식으로 플래이해보고 숨겨진 아이템이나 퀘스트를 찾아보고 몇 번을 반복해도 재미있는 게임이죠.
게임을 멀리하는 중이라 안 한지 몇 년은 됐습니다만 제 인생의 최고의 게임이 뭐냐면 늘 먼저 꼽는 게임입니다.

이제는 아무도 이런 게임을 만들지 않습니다. 라는 말에도 동감합니다. 발더스 게이트의 제작자조차도
자신이 다시는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없을거라고 언급했었던 걸 본 기억이 있네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발전하면서 게임이 점점 더 캐쥬얼해지고 있죠. d&d 기반의 게임들도 마찬가지고요.
유저 중심의 편리한 시스템이 된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게임의 볼륨도 줄어들었죠.

또한 발더스 게이트는 그래픽으로 표현된 crpg이지만 텍스트의 중요성이 커서 마치 소설을 읽듯이 텍스트를 읽으며
영웅들의 모험을 상상하게 되는 맛이 있었는데...
요즘 게임들은 이 부분이 멋진 그래픽으로, 시각적으로 더욱 완벽하게 표현되면서
텍스트를 읽으며 느끼는 상상의 영역에 대한 재미는 다소 부족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도 발더스게이트 다시 시작해볼까 하는 욕구를 참고 있어요.
납뜩이
13/07/05 13:26
수정 아이콘
RPG라는 장르의 가장 큰 묘미는 탄탄한 스토리라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대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임이었죠.
발더스 진짜 미친듯이 했었는데...그 어마어마한 플레이타임에도 불구하고..
흐콰한다
13/07/05 13:39
수정 아이콘
전 오직 그것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13/07/05 13:39
수정 아이콘
아직까지 저에게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게임이죠.. 그래서 제아이디도 kivan입니다..
아무도 기억못하는 bg1의 엑스트라 레인져죠. 그래도 초상화는 멋있었습니다 흐흐
Waldstein
13/07/05 13:39
수정 아이콘
드루이드/메이지 멀티클래스가 없는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드루이드는 15렙 되면서 메모라이즈가 뻥튀기 되는데 메이지와 결합되어

마기스태프와 베크나 로브를 끼고 민첩성향상을 시전한 후에 엘레멘탈 왕자를 소환한다면...
KalStyner
13/07/05 13:46
수정 아이콘
PPZ에서 두달인가 세달에 걸쳐 본게임 4장+확장팩 1장까지 5장을 번들로 뿌리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내일의 香氣
13/07/05 14:34
수정 아이콘
민식이와 코베라스(나름 스포방지) 보는 재미로 발더스1부터 해서 바알의 왕좌까지 해본 사람입니다.. 크크크...
어릴때 시작한 터라... 드리즈트 잡을 때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났었는데...
지금은 왜그랬었지 싶을 정도로 괜한 고생했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크크크..
최종병기캐리어
13/07/05 14:36
수정 아이콘
친구 두놈과 멀티로 했는데,

전 메이지, 한명은 씨프, 한명은 카타나 이도류....

카타나 이도류로 무쌍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내일의 香氣
13/07/05 14:44
수정 아이콘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내 캐릭터가 강해지고 좋은 아이템을 얻은걸 느낄때 정말 희열을 느꼈죠...
그러나 실력이 고만고만해서 늘상 한번 게임하면 깰때까지 되게 오래걸렸었는데....
그래서 가끔씩은 스피드런 영상을 보면서 "나도 저랬으면..."이라고 땅을 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크크크..

혹시라도 발더스의 향수를 빠른 시간 안에 느끼고 싶으신 분들은 스피드런(타임어택) 영상이나 보면서 갈증을 해소하길 바랍니다.
막상 추억을 회상하고 싶더라도.. 나름 볼륨이 큰 게임이라서 접근하기 왠지 꺼려질 듯한 느낌이 있으실 분들을 위해...

http://speeddemosarchive.com/BaldursGate.html (발더스 1) [21분 31초]
http://speeddemosarchive.com/BaldursGateTotSC.html (발더스 : 소드 오브 코스트) [14분 36초]
http://speeddemosarchive.com/BaldursGate2.html (발더스 2 : 앰의 그림자) [23분 9초]
http://speeddemosarchive.com/BaldursGate2ToB.html (발더스 2 : 바알의 왕좌) [5분 11초]
http://speeddemosarchive.com/BaldursGateDA.html (발더스 : 다크 얼라이언스) [59분 4초]
쑥호랑이
13/07/05 15:56
수정 아이콘
모든 건 포트레이트에서 시작됩니다.
샤르미에티미
13/07/05 16:05
수정 아이콘
완성도가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게임이죠.
13/07/05 16:10
수정 아이콘
발더스 이이 버젼은 평이 어떤가요?
오카링
13/07/05 16:50
수정 아이콘
와 발더스게이트 글을 여기서 보니까 왠지모를 향수와 감동이; 오랜만에 발게이랑 토먼트 또 해보고 싶네요
13/07/05 17:34
수정 아이콘
게임게시판에 있는 lol,스2 관련 글을 거의 안 보는 입장에서 이런 글은 언제나 반갑네요.
13/07/05 19:54
수정 아이콘
발더스 게이트, 토먼트, 아케이넘, 폴아웃 등의 개발자, 작가들이 킥스타터로 이터니티와 웨이스트랜드 2 라는 신작을 개발하고 있으니 기대해보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김민규
13/07/05 19:56
수정 아이콘
발더스가 이번에 재발매했다해서 예전에 재미를 못느꼈던 게임을 재시도 해봤지만
전 아무리봐도 서양식rpg는 취향이 아닌가봐요 너무 졸려서 급포기 했던 기억이 나네요
발더스1은 발매하고 바로샀으나 바로 봉인...
그냥 열심히 파판같은거나 해야겠어요
13/07/05 23:17
수정 아이콘
인생은 주사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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