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3/12/06 11:13:54
Name 미리내
Subject 그냥. 이윤열 선수.
올해 봄, 유선방송 시청이 가능해지면서 스타리그에 입문하게 되었지만 그전부터 '이윤열'이라는 이름 석자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작년에 친구 놈 집에서 종종 새벽에 라면을 먹게 되었는데 옆에 볼게 없으면 심심한지라 내키진 않으면서도 스타중계를 보곤 했다. 고등학교때 나도 유행따라 피시방에서 스타크를 하곤 했고, 학교에선 '쌈장이 쇼다운에서 배럭 날렸다.' 같은 걸로 친구들이랑 시끄럽게 떠들곤 했던 기억은 나지만 그 시절 이상한 복장을 하고 메퀘한 무대에서 하는 스타중계에 영 감흥이 생겨나진 않았었다.

그래도 기숙사 룸메이트 형이 보여주던 코카콜라배 결승 때문에 임요환, 홍진호 등의 이름을 기억하며 스타리그에 대한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진 않고 있었다. 얘기는 길어졌지만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인해 나는 야심한 새벽에 라면을 먹으며 이윤열의 플레이를 보게 됐다. 쏟아지는 메카닉 부대로 상대를 압도하는 전투는 스타를 잘 모르는 내 입에서도 우와~ 라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윤열 선수는 정말 앳되어 보였다. 역설적으로 게임 속에서 이윤열 선수의 플레이는 너무 강했다.  

그래서였을까. 스타리그에 입문하게 된 후에 이윤열 선수를 응원하기가 싫었다. 그냥 그랬다. 그는 너무 강했다. 많은 선수들이 패배 끝에 힘겨운 1승을 올릴때 그는 너무 쉽게 이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래 보였다. 내눈에 그는 앳된 얼굴로 도도하게 웃음 지었다. 그는 전무후무한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그는 승리자였다. 승리자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순수함을 믿기 힘들었다. 어째서 그의 천재성이 내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을까.

스타우트배에서 응원하던 전태규 선수가 어이없이 무너졌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그날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는 이윤열 선수를 전태규 선수가 무의식 중으로 동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들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중계약 파문이 일어났다. 처음엔 이윤열 선수가 돈 때문에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련된 정확한 사실을 난 알 수 없었다. 알 길조차 별로 없었다.

이윤열 선수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타리그의 산업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 큰 이유가 되었기에 누구에게 잘잘못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이윤열 선수를 욕하였고 많은 이들이 이윤열 선수를 변호하였다. 이윤열 선수의 은퇴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윤열 선수는 팬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그저 게임만 열심히 하면 될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윤열 선수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가 아직 어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 속에 이윤열 선수는 강민선수에게 힘없이 졌다고 했다. 난 그때 딴 약속이 있었는지 결승전을 보지 못했다. 그 후로 올림푸스 배에서 16강 탈락, 팀리그에서 최연성 선수에게 물량으로 압도 당한 충격의 패배. 이윤열 선수에 관한 기억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이윤열 선수는 많은 승리의 희생자가 되었다. 언제나 승리자 일 수는 없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이윤열 선수 역시 프로로서 패배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윤열 선수는 여전히 강하다. 그리고 아직 정상에 서있다. 현재 비기배에서는 놀라운 연승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이윤열 선수를 볼 때 강하게 인식되었던 그떄의 모습은 아니다. 얼핏 승리자의 도도함을 내비추던 그때의 모습은 아니다.  

어제 조 추첨식에서 이윤열 선수는 정말 수줍어했다. 무엇이 그를 수줍게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수줍음 속에서 한마디 얘기를 꺼냈다.

"이제 저도 다 컸어요."

엄재경 위원이 크게 웃어넘긴 걸로 보아 그냥 농담이겠고, 온전히 저렇게 말했는지도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난 저렇게 들렸다. 그냥 한마디의 말이지만 게임 외적으로, 내적으로 패배라는 것을 경험한 이윤열 선수이기에. 언제나 승리자였던 그. 였기에. 또다시 16강에서 탈락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의 말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동안의 아픔들을 내게 항변하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세상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들의 수 많은 사연들 역시 존재한다. 어제는 이윤열이라는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난 것 같다. 스타리그에서 이윤열 선수를 응원하지는 않겠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에서 이윤열 선수가 자신에게 승리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뭐. 다 컸다니 크게 걱정은 않지만.


뱀발.
밑에 이윤열 선수 글이 있어 끄적여봤습니다. 쓰고 보니 중복이군요. 아아...나도 어서 커야할텐데...에휴..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류지훈
03/12/06 12:18
수정 아이콘
윗분처럼 맛갈나게 글쓰시는 분 보면 참 부러워요..
특별한 내용도.. 그러타고 특별한 잔 재주를 부린것도 아닌데..
글이 어쩜 저리 간결하면서도 부드럽고 맛있을까요?
동네양아치
03/12/06 15:11
수정 아이콘
엠비씨 최연성선수와의 4경기에서의 이윤열 선수의 모습은 물량으로 절대 밀리지 않았덤 모습이었습니다. 때론 더 뛰어난 물량을 보여주기도 했죠. 같은 자원 먹곤 이윤열은 물량 절대 안진다고 생각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공지] 몇가지 변동 사항입니다. [11] homy 03/09/09 39452
공지 채널에 관한 공지입니다. [23] homy 02/10/08 37847
15604 테란과 프로토스를 1가지씩만 수정하면 어떨까요? [2] 하드코어질럿44564 03/12/19 44564
15601 To. 정수영감독님께... 다크고스트44346 03/12/07 44346
15600 123! Means36083 03/12/07 36083
15599 KT Megapass Nespot 프리미어 리그 포스트시즌 정리 [4] Altair~★34132 03/12/06 34132
15597 AMD선수와 KTF감독님의 글에 대해서... [8] JJuniE40834 03/12/06 40834
15595 [장진수]안녕하세요 [113] 장진수55185 03/12/06 55185
15594 박정석 선수와 박상익 선수의 프리미어리그 판정패 관련 글입니다. [31] 졸린눈41587 03/12/06 41587
15593 연리지(連理枝) 이야기 [1] 총알이모자라..32259 03/12/06 32259
15592 [잡담] 누가 조종 하는것 같아요. [3] 햇빛이좋아36415 03/12/06 36415
15591 물량의 비밀? [13] 마술사38955 03/12/06 38955
15590 [농] 남자이야기 & 흘러가는 잡담 [4] 용살해자34465 03/12/06 34465
15589 3인 중계방송에 대한 생각..... [9] 청개구리34234 03/12/06 34234
15586 [문자중계]KT Megapass Nespot 프리미어 리그 10주차 [227] DoL39944 03/12/06 39944
15585 pgr21 처음 쓰는 글 [1] 토스황제성춘31702 03/12/06 31702
15584 [글자중계] 피망 온게임넷 프로리그 [280] Ace of Base36101 03/12/06 36101
15583 pgr 게시판이... [13] 로또리버31984 03/12/06 31984
15582 [잡담]내가 생각하는 올한해 명경기 best 5 [49] kmimi00037322 03/12/06 37322
15580 그냥. 이윤열 선수. [2] 미리내33629 03/12/06 33629
15579 이재훈 선수가 꿈에 나왔습니다-_- [15] 이카루스테란33229 03/12/06 33229
15578 술이 들어가니 불효자도 어머니 생각... 오크히어로35480 03/12/06 35480
15576 너무 빨리 하는 OSL 8강 진출자 예상-_-v [39] 지붕위100459209 03/12/06 5920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