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te |
2012/09/21 17:45:47 |
Name |
PoeticWolf |
Subject |
엄마는 그때 웃을 수가 없었다 |
“아, 거참 엄마, 좀 웃어 보세요.”
“알았어, 알았어.”
마치 사정이라도 봐주는 것처럼 엄마의 입 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가 하나 둘을 외치자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엄마! 좀!”
“그냥 찍어라. 얼른 하고 치우자. 시간만 간다.”
“모처럼 아들하고 며느리하고 놀러 나왔는데, 기분 안 좋아?”
“아냐, 그런 거.”
그렇게 엄마의 무표정으로부터 전염된 딱딱함은 마치 유전자처럼 여행 사진 전부에 물들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사진을 되돌려보다가 불쑥 짜증이 났다. 고부간의 갈등이 시작되려는 것일까, 그동안 잘 지내온 두 여자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없는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남자라서 느끼기 힘들었던 것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와 아내는 여행 내내 친 모녀 같지는 않았어도 서로를 크게 어려워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같이 사진을 보던 아내 역시 엄마의 표정을 짚어냈다.
“어머니 표정이 안 좋으시네. 몸이 안 좋으셨나.”
“그랬나봐. 기분은 괜찮으셨잖아?”
“내가 느끼기엔 그랬는데, 또 모르지. 오빠라도 웃지 그랬어. 뭘 같이 짜증을 내냐, 엄마한테.”
“그러게.”
아내도 모르고 있다. 도대체 엄마는 왜 웃지 않았던 것일까.
임신 초반 아내는 여느 고등학생 같았다. 배가 불러오니 타이트한 옷들이 맞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옷에 몸을 힙겹게 끼워 맞추며 괜한 위기감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인터넷 유머처럼 떠돌던 “오빠, 나 살찐 거 같아?”라는 질문을 수차례 받곤 했다. 그러나 내 대답이 무엇이든 아내는 여전히 찌지도 않은 살을 가지고 고민했다. 뱃속의 아이 때문에 식이요법이나 격한 운동을 하지는 못하고 서서히 부어오르는 자신의 몸을 지켜 볼 수밖에 없어 더 속상해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초음파를 찍으러 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 아이를 잘 보았다는 말 꼬리가 흐렸다.
“목소리가 왜 그래?”
“아니.... 아이가 손을 빨고 있더라고.”
“으하하하. 빨 손가락이 벌써 생겼어? 상상만 해도 이쁜 걸?”
“근데 옆에 간호 보시던 분이 ‘애기가 배가 고픈가 보다.’라고 하시는 거야. 나 그래서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어. 그래서 그냥 오늘부턴 아이한테 좋은 거 많이 먹을려고.”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그리고 배고파서 손 빨고 있던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농담하신거야.”
“그래도 애기한테 너무 미안해.”
그리고 아내는 그때부터 몸이 D형으로 무럭무럭 변해갔다. 신기하게도 거울을 보는 아내의 표정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척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속상하지 않은가보네, 이젠?”
“난 지금 내 몸이 너무 예뻐 보여. 진심이야.”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웃기시네.”
아름다운 대화였다. 모성애라는 걸 처음 온 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한 여자를 눈앞에서 보는 게 눈이 아프도록 아름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뱃속의 딸 아이가 세상에 나와 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리를 천천히 잡아갈 때 우리는 또 어떤 사랑의 배를 불리게 될까. 그때 우리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기쁘게 잃게 될까. 자기 안의 ‘여자’를 기꺼이 잃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구나.”
그런데 의외로 그 말이 그리 기쁜 거 같지는 않았다.
“오빠한테 그런 말 듣는 건 좀 별로야. 난 그래도 여자라고, 특히나 남편한텐. 여자는 죽을 때까지 여자이고 싶단 말이야.”
쌜쭉하게 다시 거울을 보는 아내를 보며 여자, 참 오묘하다,란 생각을 했다.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가지고 예비 할머니가 된 엄마를 찾았다. 배가 많이 나왔구나, 엄마는 며느리가 대견한 건지 그 안에 있는 미래 손녀가 벌써 예쁜 건지 환하게 웃었다. 주름이 여기저기 눈에 띄게 패였다. 저 작고 약한 몸에서 나 같은 덩치가 나왔다는 게 괜히 미안하다. 엄마도 지금 아내와 같은 나이를 살았었다는 게 신비로웠다. 그때 엄마는 무슨 표정을 짓고 여자에서 엄마가 되셨던 것일까? 이젠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이 세상 수많은 엄마들의 과거에 대한 기록은 내 피를 따라 지금 내 아내 안에서 움트고 있는 것이겠지. 그 핏자국은 너무나 희미해 발견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리라. 세 여자를 지켜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 솟아올라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제 사진 좀 찍으면 그렇게 웃으시란 말예요.”
“내가 웃지, 우니?”
“그때 여행 갔을 때 말이야. 그렇게 안 웃어서 나랑 싸웠으면서.”
“아, 그때. 넌 아마 평생 모를 거다. 여자 마음에 그런 게 있어.”
“무슨 일 있었어? 혹시 그게 고부간의 그 거시기 한 그거야?”
엄마는 그냥 웃기만 했다. 나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
그런데 아내는 조금 알 거 같았나보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가만히 내 옆에 앉았다.
“나 어머니가 그 때 왜 안 웃으셨는지 알 거 같아.”
“역시... 드디어 나에게도 고부 문제가 닥치는구나.”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임신하고 배 나오기 시작했을 때 밖에 나가서 사람 만나기도 싫고 사진도 찍기 싫고 그랬었어. 못생겨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더라고. 어머니도 아마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스스로 싫어서 그러셨던 걸 거야. 웃으면 사진에 주름이 많이 나오니까. 여자 마음이 다 그렇다우. 나도 애 낳을 때 되니까 알겠어, 그 마음.”
여자, 참 오묘하다,란 생각을 했다. 아들로서 ‘엄마’를 ‘여자’로 대입하는 게 어색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생 여자이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남자라면, 평생 여자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 또한 알 수 없는 게 아들일 거 같았다. 그 평생 소원을 나 때문에 잃어준 것이 그래서 이 나이 때까지 와 닿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내 옆에 아내를 보며 엄마가 잃어간 것을 느리게 느리게 배우게 될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가지면서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 드디어 자식이 되어간다. 하긴, 그게 올바른 순서지. 부디 세상 모든 아들들이 늦지 않기를.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10-09 09:58)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