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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3/18 11:36:20 |
Name |
Sickal |
Subject |
아, 끝났다. |
부시시한 머리를 한 채로 눈을 뜬다. 눈곱을 닦고, 하품을 한다. 잠이 덜 깼다. 일어나던 그 자세 그대로 넉다운. 그 뒤로 한 시간쯤 있다가 더이상 잠이 오지 않아 다시 눈을 뜬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양치질? 세수? 머리 감기? 일단 일이 급하다. 컴퓨터는 늘 켜져 있다. 밤새도록 돌렸던 WOW는 어느덧 로그아웃 상태. 와우를 끄자마자 바탕 화면에는 엑셀파일과 한글 문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다.
일단 저장들을 하고 로그 오프를 한다. 그 동안 냉장고에서 물을 한 컵 떠온다. 위장으로 차가운 물이 주르륵 흘러가는 느낌에 드디어 잠이 확 깬다. 이 기분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때다. 어제 일을 하다 지겨워서 와우를 하던 부분까지는 기억이 난다. 선수들의 경기를 찾고, 데이터 값을 입력해 결과를 도출해 낸다. 그것을 자료에 옮겨 적고 틀린 것이 있나 체크 한다. 한 때 이 작업을 소홀히 했다가 방송 CG가 대박으로 틀린 경우가 있어 그 뒤로는 늘 조심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 이상 앞으로도 틀릴 가능성은 언제나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한참을 엑셀과 한글문서와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덧 자료가 완성되어 간다. 피지알, 스갤, 우주, 파포, 비타넷을 동시에 켠다. 바탕화면에는 모든 사이트의 바로가기가 존재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드래그 하고 엔터 치는 것도 나름대로 재밌다.
(겜큐가 살아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늘 하곤 한다.)
TV가 없는 집에 사는 나로선, 최근 무슨 경기가 있었는지 팬들의 생각은 어떤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업무다. 물론 이 중요한 업무는 종종 웹서핑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오늘은 시간이 없다. 재빨리 상대 방송사에서 무슨 경기가 있었고, 내가 체크하지 못한 우리 방송사의 경기들을 체크 한다.
자료에는 많은 내용이 추가된다. 선수의 최근 5경기 전적, 10경기 전적, 종족별 전적, 맵 별 전적, 상대 선수와의 전적, 팀과의 관계, 최근의 기세, 경기 내용, 그 선수의 최근 분위기, 이겨야 하는 이유, 패배할 시의 불이익, 리벤지인지 라이벌전인지...
오타가 없나 확인하고 앞서 만든 자료와 후다닥 글을 합친다. 자료 완성.
하지만 아직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중계진들에게 줄 대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대본 자체는 자료 보다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종종 날짜를 틀린다거나 하면 큰일난다. 지난주도 그래서 철민 캐스터께서 헷갈려 하셨다. 철민 캐스터께서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신다.
대본을 쓰고나니, 어느새 출근해야 할 시간이다. 어제 와우를 조금만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다 자업자득. 대충 씻고, 머리를 턴 다음 바로 집 밖으로 튀어나왔다. 택시를 잡고 하는 멘트는 언제나 똑같다.
"여의도 MBC 경영센터요."
...멘트 좀 바꿀까.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선다. 대본과 자료를 출력하고 그것을 복사한다. 이 복사기 참 말썽도 많고 애착도 많았다. 툭하면 종이가 걸리질 않나, 잉크가 떨어져 흐리게 나오질 않나...한 때 x블 A 라는 종이를 썼을 때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나만 그렇게 느꼈나.
멍하게 있다보니 어느새 복사가 끝났다. 스텝들이 볼 대본과 자료는 스테이플러로 대충 때려 박는다. 하지만 중계진에게 줄 대본과 자료는 클립으로 갈무리 한다. 스테이플러를 일일이 뜯기 힘들다는 건의 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된 분류 작업이다. 나도 뜯어봤는데...정말 짜증나겠더라..그래서 얼마전에 세중에 황금색으로 큼직한 클립을 한 통 사 놓았다. 5천원이나 하더라...눈물날 정도로 비쌌다.
어쨌든 시간은 슬슬 가고, 이제 세중으로 출발할 시간이다. 언제나 선택은 강변. 다소 늦게 출발해도, 다소 막혀도, 강변은 우리를 배신한적이 없었다. 언제나 처럼 코엑스 후문으로 도착하면 흡연자들은 잠시 담배 버프 타임을 갖는다.
...아 이놈의 게임화 사고.
아무튼 흡연자들이 버프를 하고 나서, 우리는 오늘도 생방송을 하기 위해 세중으로 들어선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세중의자에 붙어있는 '자리 있음' 관련 종이를 수거하는 일이다. 이 일로 예전에는 한 여성 팬과 크게 싸울뻔 하기도 했다. 옛날에는 가방, 우산, 노트, 심지어는 껌종이, 먹다 남은 컵까지 놓고 자리를 맏기도 했었다. 나는 그런 것을 싹 무시하고 모든 가방과 노트와 기타 등등을 한 구석으로 몰아버렸다.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소릴 들었으나...3살 버릇 여든간다고, 고친적은 없는 것 같다. 이 행동 덕분에 세중에 오는 사람이 좀 줄었나...하는 생각도 한다. (누군가 옆에서 "너 때문이었군!" 하고 외친다...)
중계진들이 도착하고 간단하게 자료와 대본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거 틀린거 아니에요?"
...아뿔싸, 맵 전적이 틀렸다. 그럼 그렇지...황급히 엑셀 파일을 열어 맵 전적을 찾아 낸 후 대본과 자료에 일일이 줄을 긋고 숫자를 정정해 준다. 오늘도 한 건 할 뻔 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서 생방송이 시작된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몇번이나 CG를 확인 했기 때문에 CG에 대해선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틀린게 없으려나 보다. 옛날엔 맞는 CG가 없을 정도로 삽질의 연속이었는데...
여담이지만, 나는 그래도 꽤 자막의 오타를 잘 보는 편이다.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다. 물론 나조차도 3,4번을 봐도 놓치는 오타가 있지만...그정도는 인간이면 하는 실수다. 문제는 그렇게 오타를 잘 보면서 자료는 엉망인 경우가 많다는 것...
얘기가 딴 데로 샌 사이 경기가 시작했다.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화면이 암전 했다 밝아지면 나는 재빨리 선수들의 위치와 색깔을 확인한다. 몇 백번이 넘게 해온 일이지만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주황색과 갈색 구분하기는 무진장 어렵다. 동족전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특히 저그vs저그인 날에는 틀릴 확률이 배로 뛴다.하늘색과 teal 색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 색 뿐 아니라 위치도 틀릴 수 있다. 특히 7시와 5시를 엇갈려 부를 때가 많다. 요즘에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왜 7시와 5시가 유독 헷갈리는지... 게다가 팀플인 경우에는 그 난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처음에는 아예 밖에 나가서 선수들 화면을 보고 들어와서 자막을 작업해야 했을 정도였다. 지금에야 10초면 모든게 완벽하게 처리되지만...
한때 스타팅 포인트가 애매했던 맵을 쓰던 시절에는 문제는 더 했다.
9시다, 10시다, 아니다 9시 반이다. 그냥 8시로 하자....(짐레이너스 메모리)
이걸 무슨 수로 위치를 표시해!!!(패러랠 라인즈 처음 나왔을 때)
결국 왠만하면 우리는 홀수로 가기로 했다...
어쩌면 엠겜 맵의 모양이 어느정도 균일화 된 건 이러한 이유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농담이다.
어느새 경기들이 끝났다. 마지막이라고 방심하면 안된다. 경기결과도 실시간으로 정리해야 하고, 다음 주 리그 예고, 주간 방송 예고도 틀린 자막이 있으면 안된다.
오늘은 운이 좋으려나? 다행히 오타 없이 방송이 끝났다. 컴퓨터 세팅 문제도 별로 없었다.
한 때 정말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을 정도로 컴퓨터 문제가 많이 났던 시절이 있었다. 원인도 모르고 대처 방법도 없었다. 결국 용산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해 컴퓨터를 완전 기초부터 밀어내는 작업을 하고 여차했을 경우의 대처 매뉴얼을 작성했을 정도로 고생을 하고 난 뒤부터는,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가끔 마우스와 충돌 일으키는 것 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컴퓨터를 지정해서 쓰기도 했다.
녹초가 되어 나오는 중계진들, 기술 스텝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하지만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다.
컴퓨터와 장비, 선등을 다시 정리해야 하기 때문. 오늘은 특히 경기가 짧았기 때문에 그나마 좀 낫다. 옛날엔 코엑스에서 전원을 내려버린 일도 있었고, 지금도 시간이 늦어지면 어두컴컴해지면서 셔터가 내려와 을씨년 스럽다. 늘 이맘때면 등장하시는 청소 아주머니...오늘도 손과 쓰레기통에는 각종 전단지, 음료수 컵, 햄버거 종이 등 쓰레기가 한 가득이다.
정리가 끝났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오늘은 무사히 끝난 하루, 하지만 다음주에는, 또 그 다음 주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 생각해보니 오늘은 레이드 뛰는 날인가. 대기자 좀 줄여야 할 텐데...
어쨌든, 오늘 방송은 끝났다. 지금은 쉬고 싶겠지만, 일이 없으면 또 몸이 근질근질 하겠지...그게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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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픽션이 다소 가미되어 있습니다.
* 메딕아빠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3-2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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