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3/12/11 14:53:17
Name 영호충
File #1 IMG_2747.jpeg (267.9 KB), Download : 8390
Subject 비가 온다


비가 온다.
비오는 걸 좋아했다. 밖은 눅눅하고, 축축하지만 나는 비맞을 일이 없으니, 상대적인 안락함이 좋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냥 이유를 붙인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이유가 필요하니까.

비오는 날, 행선지 모르는 버스를 타고 기사님 운전석 뒷자리에 앉는다. 버스안에서 그자리가 가장 라디오 소리가 잘들린다. 라디오 진행자는 말한다. '대전은 오후부터 밤까지 점점 빗발이 거세질 것이고, 어쩌고 저쩌고~' 시간은 점심 쯤. 타고 내리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아서 딱 좋다. 어둑함이 배어있는 시내를 목적지 없이 달린다. 빗방울이 굵어질 수록 밖의 풍경이 다이나믹 해진다. 미소가 번진다. 우산을 쓰고 달리는 사람과 쓰지 않고 달리는 사람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폭우속에서 우산은 의미가 퇴색된다. 오토바이를 탄 배달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안쓰럽군..'
콜로세움에서 관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희열은 상대적 안락함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죽음의 기로에서 동분사주하는 경기장 안의 모습과 안전하게 관람하는 사람의 사정은 180도 다르니말이다. 비오는 와중에 난감한 사람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어떻게 보면 심술궂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벌 받으려나?

라는 생각을 했을법도 하다. 10년도 더 예전에 어느날 나는 말이다. 물론 안했을 수도 있다.  

지금 그 죄값을 치르고 있는 중인것 같다. 내가 마트에서 일을 할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비오는데 의미없는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를 달린다.  온몸에 물기는 마를 새가 없다.  저기 보이는 버스 안에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않은 한 남자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안쓰럽군..' 하면서 말이다. 배달을 마치고 나는 또 밖으로 나가 바깥에 진열해 놓은 물건이 젖는지 확인하고, 비를 덜맞는 차양 안으로 끙끙대며 옮기는 중이다. 홀딱 젖은 몸에 초겨울 추위는 살인적이다. '의식을 잃으면 안돼!! '라고 되내이는 나는 죽음의 기로에 서있다.

위에 비오는 날, 버스안에서 비맞는 사람들을 보며 비웃는 얘기는 방금 지어낸 얘기다. 지금 하늘을 원망하며 비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내가 과거에 죄를 지어서 이런 시련이 닥친거라는 식으로.  그냥 이유를 붙여 본 것이다. 사람은 이유가 필요하니까.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5-04-08 12:0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12/11 15:1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지그제프
23/12/11 16:03
수정 아이콘
어릴땐 비 맞는게 좋아서 일부러 비맞으러 나가 길에 패인 웅덩이에 신발 참방거리고 그랬었는데, 늙으니까 비맞는거 극혐요.
내년엔아마독수리
23/12/11 18:28
수정 아이콘
안녕하새요. 재택 프리랜서입니다.
올해는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헤헤
23/12/12 01:13
수정 아이콘
그래서 비가 오는 걸 좋아합니다. 이유가 필요한 사람도 흐릿해지니까.
귓가를 흐르는 노래에 떠밀려 당신도, 나도 서서히 번져가기를.
영호충
25/04/09 11:29
수정 아이콘
추천게시판에 올라가는게 오래걸리는군요. 쓴것도 까먹었어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추천게시판을 재가동합니다. [6] 노틸러스 23/06/01 31709
3840 두 돌이 된 아이는 너무 귀엽고, 부부의 낙은 모르겠다 (육아일기) [29] 두괴즐9824 23/12/13 9824
3839 한미일 의료현장 비교 [36] 경계인9562 23/12/12 9562
3838 비가 온다 [5] 영호충8830 23/12/11 8830
3837 유정란이 몸에 좋아 [56] 겨울삼각형9143 23/12/11 9143
3836 유료화 직전 웹툰 추천-위아더좀비 [18] lasd2418956 23/12/09 8956
3835 [일상글] 인생 확장팩 36+1개월 플레이 후기 [40] Hammuzzi11964 23/12/08 11964
3834 민들레 [18] 민머리요정11012 23/12/07 11012
3833 [서평] 보이지 않는 중국, 중진국 함정을 가장 잘 설명한 책 [39] 사람되고싶다11463 23/12/06 11463
3832 [LOL] 2023 여름, 울프와 함께하는 희노애락 [80] roqur11031 23/12/03 11031
3831 커피를 마시면 똥이 마렵다? [36] 피우피우11323 23/12/02 11323
3825 [역사] 최초가 아니면 최초를 사면 되지 / BIC의 역사 [6] Fig.112727 23/11/28 12727
3824 [LOL] Trying to win the last game of the season [40] becker11906 23/11/24 11906
3823 [LOL] LPL, 적으로 대하지만, 동지애도 느끼다. [15] 마트과자12002 23/11/20 12002
3822 [LOL] 마침내 우승을 목격하다 [15] 풍경11891 23/11/19 11891
3821 [LOL] 흥미진진했던 2023 월즈를 돌아보며 (및 숭배글) [25] 원장11689 23/11/19 11689
3820 아들녀석의 입시가 끝났습니다. [63] 퀘이샤13870 23/11/21 13870
3819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질 우리에게 (feat. 결혼기념일) [7] 간옹손건미축12173 23/11/19 12173
3818 [육아] 같이놀면되지 [55] Restar12409 23/11/17 12409
3817 [기타] 내가 사랑하는 이 곳이 오래오래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 [22] 노틸러스12051 23/11/17 12051
3816 적당히 살다 적당히 가는 인생은 어떠한가 [17] 방구차야12282 23/11/17 12282
3815 엄마 아파? 밴드 붙여 [19] 사랑해 Ji14358 23/11/16 14358
3814 나의 보드게임 제작 일지 ① [16] bongfka13722 23/11/16 1372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