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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9/20 09:00:56
Name comet21
Subject [역사] 일제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조선인 합격자들 (수정됨)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시행된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조선인 합격자를 주제로 글을 써봤습니다.


- 일제 관료의 등용문 고등문관시험

고등문관시험은 일제가 고급 관료를 충원하기 위해 실시한 선발시험을 말합니다. 고등문관시험은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을 때 비로소 도입된 제도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 국가를 향한 길에 들어선 일본이었지만, 유신 이후 한동안(이라고는 해도 2-30년 간)은 정부에서 일할 인재가 유신의 주역이자, 유신의 과실을 차지한 파벌 출신 인사를 최정점으로, 유신지사-유신지사의 고향 유지-고향 유지가 추천한 인사, 이런 루트로 충원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러한 루트가 여전히 작동함과 동시에, 1880년대에 접어들면 근대 교육기관이 우후죽순 설립되면서 도쿄대학, 법학교, 의학교 등 관립 교육기관을 졸업한 청년들이 정부로 등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직후의 격동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사회가 안정화되고 신 정부도 법과 제도를 통해 자리 잡게 되면서 정부가 커지고 고급 인력 수요는 많아졌으나, 기존의 인맥과 평판 중시의 단발성 채용으로는 양적으로도 커버가 되지 않았고 인재의 질 측면에서도 편차가 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대신할 제도화된, 그리고 일정 수준의 질이 검증된 관료 선발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1887년 '문관시험 시보 및 견습 규칙'이 제정되어 고등시험이 실시되었으며, 1889년 일제 헌법이 공포되었고(시행은 이듬해인 1890년), 1893년부터는 새로이 제정된 "문관임용령"을 기반으로 문관고등시험이 실시되었습니다. 초기의 문관고등시험은 사법성, 외무성을 제외한 일반 행정 부처에 임용될 고급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었고, 사법성에 대해서는 판검사등용시험(일제는 판사와 검사를 모두 사법성에서 관할하였으며, 법원행정 역시 사법성으로 일원화되어 있었습니다.)을, 외무성에 대해서는 외무영사선발시험을 별도로 두었는데, 1920년대 초 고등문관시험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다만, 과科는 구분하였습니다.)


고등시험을 통과한 인력은 관청 수습을 마치고 임용되면 오늘날로 치면 우리나라의 사무관급 이상에 해당하는 고등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일제 당시에 사무관이란, 기술직과 대비되는 행정관료를 가리키는 일반 명칭으로 쓰였습니다. 일제 패망 후, 과장~계장급에 해당하는 사무관은 2급 사무관, 국장 이상은 1급 사무관으로 개칭되었으며, 새 헌법 체계가 들어선 다음에는 모든 행정공무원을 사무관으로, 기술직 공무원은 기관으로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일제 당시의 관청에서는 고등관과 일반 직원 식당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고등시험을 패스하더라도 아직 계급상 고등관 이하인 수습이나, 일반 직원으로 재직 중에 시험을 붙어 아직 임용처도 정해지지 않은 경우에도 고등관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검정고시로 학력 없이 고등시험을 붙거나,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군청, 도청 일반 직원으로 일하다 고등시험을 붙은 사람들의 회고록을 보면 이 식당 에피소드가 꼭 언급되는데,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체험하는 극적인 경험으로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등문관시험은 1943년을 끝으로 일단 중단되었습니다. 이제는 관료를 선발할 행정 역량조차 소진한 것입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잠시 재개되었으나, 일본을 사실상 통치했던 GHQ는 이 시험을 일제의 잔재로 취급하여 1948년 일단 폐지되었습니다. GHQ는 일본의 새로운 공무원 선발 체계로 고등시험 대신 미국식 직위분류제에 입각한 임용제도를 채택하려 했으나, 막상 고등시험을 대체한 공무원 임용시험은 사실상 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강한 경로의존성이 작용한 셈입니다. 고등시험에 해당하는 제1종 공무원시험은 20세기 내내 실시되었고, 종합직 공무원시험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현재도 일본의 고급 관료 선발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5.16 직후 정확히 똑같은 논리로 고등고시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직후 실시된 3급을(당시는 9등급이 아닌 5등급 계급제도)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이 사실상 이전 고등고시 행정과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20여 년의 간격을 두고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 조선인과 고등문관시험

식민지인에게도 고등문관시험 응시 기회가 있었습니다. (단, 시험은 도쿄에서 실시) 조선인, 타이완인 중에서도 합격자가 나왔는데, 조선에서는 일제의 식민 통치가 안정궤도에 들어선 1920년대 중반부터 합격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1930-1940년대에는 전체 합격자 중 5% 내외가 조선인이었습니다. (1943년 합격자가 많아 보이지만 선발인원도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어난 500명대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고등시험은 우리의 행정고시 제도와 달리 정부 부처에 고등관으로 들어갈 자격을 주는 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합격을 하더라도 가고자 하는 부처(총독부 포함)의 문을 합격자가 직접 두드려야 했고, 부처의 인사 담당자는 지원자의 고등시험 성적, 학력,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출신과 인맥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 지원자를 임용할지, 말지를 정하는 명백한 “갑”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런 점도 작용하여 고등시험 행정과를 합격한 조선인은 일본 본토의 부처보다는 고향, 그리고 임용 시의 차별 등을 이유로 절대다수가 조선총독부 임용을 택했고, 이들은 수습을 거쳐, 군수로 발령, 이후 도청, 총독부 본부 등의 국/과장으로 이어지는 보직 경로를 밟았습니다. 그리고 사법과를 합격한 조선인은 사법관시보를 거쳐, 조선 소재 법원에서 법관 또는 법원 검사국의 검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로 접어들자 다소간의 변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일본 본토에 사람은 부족해지는데, 일제의 지배 영역이 각지로 확장되고 전시 행정 수요가 늘어나면서 절대적인 갑이었던 일본 본토의 부처들이 아쉬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940년대 합격자의 경우, 조선인이라도 상당한 비중으로 일본 본토의 부처에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시보가 끝날 때쯤 일제의 패망을 맞게 되었으며, 나중에 한국의 국무총리가 되는 신현확처럼 일본 상공성에서 수습을 받고 있었으나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고 수습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잠적해버린 사례도 있었습니다.


- 조선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자 일람

조선인 고등문관시험 명단은 사실 100% 정확히 복원된 자료가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창씨개명입니다.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사이 일제의 폭압적인 개명 강요 정책으로 거의 모든 조선인이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게 되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고등문관시험 합격과 부일 경력을 치부로 여겨서 그런 게 아닌가 싶지만, 사실 고등문관시험 합격 자체는 적어도 이 사람들이 생존하고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만 해도 자랑거리에 가까웠기 때문에 고등문관시험 합격 자체를 숨기는 예는 없었습니다.(창씨는 치부로 여겼지만요.) 그러나 1940년대 개명하고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분단으로 인한 월북, 납북, 6.25 전쟁 당시 피살, 병사 등의 이유로 행적을 알 수 없어 자기가 고등문관시험을 붙었다는 걸 외부에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경우, 창씨명 합격자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타이완인지 파악하는 데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도 행정과의 경우, 일본에서 고등시험 행정과 합격자 전원의 명단 및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입직한 부처, 일제 패망 전 최종 경력, 출신(일본, 조선, 타이완) 등을 조사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이 자료도 일부 조선인 개명자를 일본인으로 파악하는 등의 오류는 있어, 아래 명단은 그러한 오류를 보완한 것으로 대체로 큰 오차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사법과의 경우, 관보 등을 통해 1930년대까지는 복원이 가능하나, 40년대의 경우, 창씨개명한 인사의 조선인 여부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개개인의 증언에 의존해야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가능한 한도 내에서 복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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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울 수 없는 부일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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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모두 친일파이다. (이항녕, 1991)”

고등시험 합격과 일제 하에서 고등관으로 재직한 경력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이들 합격자의 생존 당시, 그리고 활발히 활동할 적에는 대개 본인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징표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배에서 갓 독립하여 국가 체계를 갖추기 위해 모든 정력을 쏟아야 했던 대한민국이 아닌, 해방 후 4-50년이 지나 중견국으로 자리 잡게 된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그렇게만 기억될 수는 없었습니다.


위 말을 한 이항녕은 1939년 고등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고, 총독부에 임용되어 하동군수를 역임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관료 생활을 그만두고 학계로 이직, 법철학자로 평생을 몸담은 인물로, 김앤장 법률사무소 이재후 변호사의 부친이기도 합니다. 그는 말년에 비록 20대에 3-4년 남짓 고등관 생활을 했을 뿐이지만, 일제 당시의 군수 등 고등관의 위상을 감안하면, 고등관 중 말단이라도 적극적으로 본인이 시험에 응시하고 임용된 이상, 부일 행적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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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의 경북도청 청사

최초의 고등시험 행정과 합격자는 이창근(1900~?)입니다. 이창근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 고등시험 행정과에 합격, 조선총독부에 임용되었고, 일제 패망 직전에는 총독부 관료로서는 사실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경북도지사에 이르렀습니다. 2호인 장윤식(1901~1949) 역시 총독부에 임용, 해방 당시 총독부의 친일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반민특위에 입건되었는데(장윤식은 자수), 조선인 출신 대표적인 총독부 최고위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밖에도 초급 관료 시절부터 적극적 친일 행위에 나선 정용신 같은 이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망명하는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대부분의 조선인 출신 고등시험 합격자는 고등시험 실시 중지 직전인 1942년 임용자까지 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또 일부는 경찰관료로서 경찰서장을 역임하는 등, 최고위가 아닐뿐, 젊은 나이에 합격했을지라도 충분히 당시의 식민지 사회에서는 총독부의 고위 관료로서 봉직했습니다. 이렇게 고등관이 된 조선인들은, 조선인이었으나, 총독부 관료 사회 내에서는 그 정체성 이상으로 ‘고등시험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더욱 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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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황산덕(1917~1989, 전 법무부 장관)의 관료 생활 회고입니다.

“내무부장 구라시마 이따루는 총독부의 정보과장, 다시 말해 지금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다가 이리로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요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도청에는 소위 고등관 식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도지사와 각부의 부장, 과장 그리고 나 같은 고문합격자가 가서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사람들을 식당원이라 불렀다.


그런데 구라시마 부장은 식당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보위원회를 구성하여 식당원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직접 나와 당시의 정확한 전황을 알려 주었다. 신문에 보도되는 소위 대본당 발표에서는 진 싸움을 이겼다고 거짓 발표하였지만 이 자리에서는 솔직하게 전쟁에서 졌다고 정확히 알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이 위원회가 열리는 날에는 식당에 갔던 것이다.

정오가 될 무렵 청내방송으로 점심시간에 정보위원회를 소집하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우리들은 커다란 호기심을 가지고 식당에 모여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구라시마 부장이 발언을 시작하는데 그는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사실을 과감하게 폭로하였다. 동경의 대본당 발표는 모두 거짓말이고 일본은 지금 전쟁에 지고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듣는 우리들은 모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모두 걱정하는 표정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한결 같이 올 것이 온다 라는 표정들이었다. (중략)


정보위원회는 일본이 패망하는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구라시마는 내일로서 천황폐하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할 것이며 이제 우리 정보위원회는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각자 몸조심하기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 엘리트로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조선인 고등시험 합격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새 세상이 열렸습니다. 아무리 일제가 조선인이라도 고등시험 합격자면 고등관으로 대우를 해줬다고 해봐야, 조선인에게 일본은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였고, 고등시험을 붙은 조선인조차 일본 내 부처에 임용되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걸 자각하고 지방 관청격인 총독부가 현실적인 한계라 선을 긋고 있었던 게 현실이었습니다. 식민지의, 식민지 출신 엘리트였을 뿐, 본토의 엘리트가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신생 국가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백지에서 시작해야 했고, 정부는 출범했지만 정부를 구성할 내용물을 급하게 충원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20대 후반, 또는 갓 30이 될랑말랑한 고시 합격자들은 우선, 임시정부계의 신익희가 급조한 행정연구회에 영입되어 헌법을 비롯해, 각종 행정법령의 초안을 기초하였고, 일단 정부가 출범하자 정부 각 부처의 국장으로 충원되었습니다. 일제 때는 일본 본토의 중앙부처가 결정한 시책을 따라 집행하는 데 불과했던 처지에서, 단숨에 신생 국가의 국정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내용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결정하는 위치로 바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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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1920~2007, 전 국무총리)

이러한 유형의 전형이 신현확입니다. 1943년 일제 패망 전 최후의 고등시험을 붙고 일본 본토의 군수성에 수습으로 배치된 신현확은 해방 직전 일본을 탈출, 고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훗날 TK인맥의 대부로 불리는 신현확은 잠시 고향 대구의 대구대학(영남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곧바로 정부에 임용되었고 전쟁 중인 1951년 상공부 공정(工政)과장을 거쳐 고속 승진, 1957년에는 부흥부 차관, 급기야 1959년에는 부흥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40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4.19, 5.16을 거치며 많은 고위관료가 관계를 떠나고 신현확도 관계를 떠나지만 10여 년간의 기업에서의 야인생활을 끝으로 박정희 정권에 발탁하여 화려하게 권부로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사부 장관 역임 당시에는 제4공화국 최대 치적인 의료보험 도입에 성공하였으며, 박정희 사망 당시에는 경제부총리른 맡았습니다.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이 된 최규하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가 되었는데, 신군부 입장에서는 유약한 최규하보다 훨씬 더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꼽혔고, 이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TK라는 점에 비롯한 것이기도 했습니다.(신현확은 경북중 출신이자, 막내동생이 노태우와 경북중 동창) 신군부에 의해 물러난 뒤에도 역시 동향인 이병철의 삼성물산 회장으로 기용, 이건희 체제 확립에도 기여하는 등, 정계와 관계, 그리고 재계, 곳곳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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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중(1916~2001, 전 국회부의장)

한편, 분명 광의로는 이 유형에 포함되는데 디테일이 조금 다른 유형의 인물도 있습니다. 윤길중은 독학으로 보통문관시험(지금의 7, 9급 공무원시험격)에 합격하여 면 서기로 있다가 역시 독학으로 조선변호사시험(일본 본토는 법조인 양성이 고등시험 사법과로 일원화되었으나 식민지 조선은 식민지만 통용되는 조선변호사시험을 따로 실시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이 조선변호사시험 필기시험일이었는데 그날 해방되어 응시자 전원에게 수험표만 있으면 모두 변호사 자격을 부여했다는 나름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을 붙고는 니혼대학 전문부 재학 중 1939년 고등시험 행정과와 사법과를 모두 패스했습니다. 일제 때 군수를 지내다 해방되자 신생 한국의 법제 정비에 참여하는 것까진 타 합격자들과 비슷한데 그는 여기서부터 다른 길을 걷습니다. 정부에 남지 않고 1950년 바로 정계로 진출한 것입니다. 정계로 진출한 그는 조봉암과 함께 사회주의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진보당 간사장을 맡다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1959년 최종 무죄) 4.19, 5.16 이후에도 윤길중은 대표적인, 그리고 사실상 유일한 원내의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61년 5.16 직후 체포되어 7년 간 옥고를 치르자마자 총선에 출마하여 8대 국회에 등원하였으며(이미 2, 5대 국회에서 당선되어 보기드문 3선), 유신에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제5공화국 출범 후에는 전두환 정권에 적극 협력하는 정치노선의 대전환을 시도하였고 총 6선, 국회부의장을 역임하는 것을 끝으로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정부에 임용되고 6.25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40대 장/차관이 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국회로 진출하여 29명이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2명의 국무총리도 나왔습니다. 동시기 고등시험에 합격한 일본인 대부분이 겪을 수 없는 영화를 누렸던 셈입니다.


- 학계로 간 인사들

일단 해방을 맞자, 정부가 아닌 대학에서 한국 학계의 기초를 닦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고등시험 응시 동기에는 입신양명도 있었지만, 1930년대 후반~1940년대의 경우, 직업이 없는 경우, 대학 졸업자라도 사실상 강제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므로, 시험에 붙어 직업을 만들어서 징집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원래가 정부 일이란 자기 성향에 안 맞는 일이었고, 마침 해방이 되고 일제 때는 식민지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뿐 아니라, 무수한 대학이 각지에서 신설되자 학계로 전직하였습니다.


친일 행적을 반성한 이항녕은 법철학자로서 고려대 교수로, 박일경은 헌법학자로서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거쳐 명지대로, 황산덕은 법철학자로서 서울대 교수로, 박재섭은 국제법학자로서 고려대 교수로, 윤태림은 교육학자로서 서울대 교수로, 김준보는 경제학자로서 서울대 농경제학과와 고려대 통계학과 교수로 전업했습니다. 그리고 유신헌법을 기초한 헌법학자 한태연 역시 1943년 합격자로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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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국(1909~1979, 전 서울대 법대 학장)

이러한 유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고병국도 학계의 대표적인 인사입니다. 도쿄제대 법과 출신인 고병국은 고문 양과를 합격했지만 임용을 택하지 않고 학계에 남았는데, 해방 전에는 연희전문 교수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을 맡던 중 국대안으로 설립된 서울대학교로 법전이 통폐합되면서 서울대 법대의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서울법대의 동대파 학맥을 주도한 인물로 꼽히기도 합니다.


- 북으로 간, 북으로 끌려간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분명 해방이 기회였고, 특히 고등시험 합격자들에게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의 재능을 온전히, 아니 그 이상으로 펼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경우에야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해방 전이나 해방 후나 고등시험 합격자들은 분명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특혜 받은 사람들이었고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시대 상황은 그런 사람들조차 앞날을 알 수 없는 엄혹한 상황이었습니다.


145명+a 합격자 중 48명이 해방 전후 요절, 실종, 6.25 전쟁 전 월북, 6.25 전쟁 중 납북, 간첩으로 처형, 6.25 전쟁 후 행적 불명 등의 운명을 겪었습니다. 무려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납북자는 25명으로, 고등시험 행정과 출신 상당수가 정부 부처 국장 인사로, 전쟁이 발발하고도 피난하지 않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주요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북으로 끌려갔고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월북하거나 북한 정권에 협조하여 간첩 등의 공작을 벌인 인사도 10명입니다. 이 중 김정제(1913~1961)는 일제 때는 파주군수,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내무부 보안과장 등 경찰 간부로 있다가 6.25 전쟁 후 정계 진출을 위해 집권 여당인 자유당 인사에게 로비하는 등, 거물급 인사였는데 간첩임이 밝혀져 세간을 놀라게 했고 1961년 처형되었습니다. 김호수(1915~?)는 해방 전 일본 내무성에 입성, 도쿄부에 배치되었고, 해방 후에는 월북했으나 북한 정권에서 다시 남파, 그리고 적발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케이스입니다. 본인은 사회주의 신념에 따라 월북했으나 북한 정권에 의해 출신 성분이 불순해 얼른 버릴 장기말로 이용되는 데 불과했을 따름입니다. 장수길 등 월북자 대부분이 월북 이후 행적을 알 수 없어 비슷한 처지에 놓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윤종화(1908~) 역시 혼란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사례입니다. 규슈제대 법과 출신으로 1934년 고등시험에 합격한 그는 김해군수, 종로경찰서장을 거쳐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황해도 지역의 경찰총수인 황해도 경찰부장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일제 패망 후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소군정에 의해 억류되었고 급기야 시베리아로 이송되었으며 이후의 생사는 불명입니다. 아들 윤석순(1937~2021)은 부산대를 나와 중앙정보부 공채로 입사, 5공때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등원하였으며, 현 여당의 거물 윤상현은 윤종화의 종손자입니다.


- 사법과 양과 합격자들

고등시험 사법과 양과 합격자는 24명입니다. 이 중 법조인의 길을 택한 인사는 6명입니다. 고등시험 행정과와 사법과, 둘을 놓고 보면 일본 본토에서는 전반적으로 행정과의 선호가 높은 편이었고, 출신 대학도 행정과 쪽이 명문 대학이 더 많아 사법과 대비 순도가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는 조선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법과 합격자는 대학이 아닌 법학전문 출신도 많았고, 특정한 해는 법전 출신이 경성제대 출신보다 많아 기사가 나오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습니다. 고등시험은 기본적으로 자격시험이었기 때문에 실제 임용 여부는 각 부처의 전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회고를 종합해보면, 법원 쪽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훨씬 더 철저한 신원 검증에 나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학교나 대학 재학 시절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입건된 경력이 있더라도, 행정관료가 되기를 희망하는 경우, ‘고등시험도 합격했으니‘라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반면에,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경우에는 과거의 전력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존재했습니다.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을 기소하고 재판하는 역할을 맡기기에는 일제 당국이 불안했던 것일까요?


회고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지는 별론으로 하고, 양과 합격자인 황산덕의 경우, 부친의 3.1 운동 경력을 이유로 총독부 법원으로부터 지원서가 반려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양과 합격자인 김영재의 경우, 큰아버지 김응섭이 일제에 항거하다 만주로 망명했고, 같은 집안의 숙부뻘이자 할아버지 밑에서 같이 살고 배우던 김지섭은 천황 황궁에 폭탄을 던지려다 체포, 옥사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처음 사법과를 합격했을 때에는 집안 문제로 임용이 안 되었다가, 이듬해 행정과를 합격하여 당국에 충성(?)을 입증한 다음에야 총독부 검사로 임용되었습니다. 양과 합격자의 행정관료 편향을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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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1935~ , 전 감사원장)

그렇지만 어쨌든 행정과 출신의 순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양과 합격자가 아닌 행정과 합격자들도 대한민국 정부에 변호사 자격 부여를 요구하였습니다. 감사원장과 헌법재판관을 지낸 법학자 이시윤은 “행정과 출신들이 더 어려운 시험을 붙었으니 변호사 자격을 달라고 요구하여 행정사법 양과 불문 고등시험 합격자이기만 하면 변호사 자격증이 주어졌으나, 민사소송법을 치르지 않아 민사재판의 기초도 모르는 변호사들이 많았다”라고 초창기의 법조 분위기를 꼬집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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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09:13
수정 아이콘
잘 보았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시면 이법회 관련해서도 한 번 글을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일제가 대한민국 법조계에 뿌리고 간 마지막 엄청난 뿌직뿌직 똥(?)인데도 다들 잘 모르시더군요
22/09/20 13:4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본문에 짤막히 언급했지만 일제 치하의 최후의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들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겠지요.
SAS Tony Parker
22/09/20 10:02
수정 아이콘
레퍼런스가 워낙 좋아서 기다리게 되는 글들입니다
22/09/20 13:4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2/09/20 13:1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22/09/20 13:44
수정 아이콘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2/09/20 13:28
수정 아이콘
잘 보고 있습니다.
22/09/20 13:4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12년째도피중
22/09/20 19:25
수정 아이콘
그저 공부하는 마음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CapitalismHO
22/09/21 18:2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시리즈 너무 재밌네요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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