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복학생인 나는 학교에 친구가 별로 없다.
전공 팀플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곤란할 때가 많다. 뭐 혼자 밥먹는게 창피한건 아니지만 날씨도 쌀쌀해지고
뭔가 외로움이 스며든다..
학교에서 혼자 밥을 먹는 중에 괜히 뻘쭘해서 핸드폰을 본다. 카톡온 게 없다.
뉴스를 보고, 페이스북을 본다. 그러던중 알림이 뜬다. 배터리 20% 남음. 아 충전기 안 가지고 왔는데..
나는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 우리집에 들어가려면 키가 2개가 필요한데 하나는 큰 대문키, 하나는 우리집 키이다.
요 며칠간 친구가 서울에 올라와서 같이 살고있다. 키가 1세트 밖에 없어서 오늘은 그 친구가 키를 가지고 집에 있다.
끝나고 집에 갈 때 연락하면 그 친구가 대문을 열어주기로 했는데 폰 배터리가 나갈거 같다.
좀 아날로그틱 하지만 쪽지에 친구 전화번호를 적어논다. 집 근처에서 사람들한테 폰 빌려서 전화해야겠다.
취업준비생인 학교동기한테 연락이 왔다. 술 한잔하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안 그래도 외로웠던 나는 오케이한다. 하지만 내일 아침수업이라 많이는 못 마실듯..
친구도 내일 아침에 공부한다고 한다. 오케이 고고.
누구누구는 어디 취업했다더라.. 누구누구는 이번에 토익 만점 떴다더라.. 누구누구는 무슨 시험 준비한다더라 블라블라~
어제 초딩 동창을 만났는데 이뻐졌더라.. 소개팅한 여자가 연락을 씹는다. 전 여친한테 실수로 보이스톡 했다. 블라블라~
둘 다 외롭고 심심했던 터라 술도 술술들어가고 오랜만에 재밌는 시간이었다. 평소같았으면 2차,3차를 갔을텐데 서로 다음날 일정이 있어서
적당히 11시쯤에 헤어지고 서로 집으로 향했다.
4호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에 내려 버스를 기다린다. 금방온다. 굿 타이밍.!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창가에 기대서 집에가는 중에 핸드폰을 꺼내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배터리가 나갔다. 친구한테 연락해야되는데..
뒤를 돌아본다. 3명이 있다. 양쪽 사이드에 아저씨 2분, 맨 뒷자석에 어떤 여자분. 근데...!! 여자분이 이쁘다.
아저씨 두 분은 이어폰을 낀채 DMB를 보고 있었다. 여자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갈까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몸이 먼저 움직인다. 술 기운인가? 이 용기는??
저기요..
- 네??
죄송한데 폰 배터리가 나가서 전화 한 통만 할 수 있을까요??
- 아, 네 잠시만요..(폰 잠금을 푼다.)
아니 그냥 이 번호로 전화좀 해주세요.. (아까 번호 적어놓은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꼬깃꼬깃 더럽다 -_-;;)
술 냄새나는 모르는 남자가 자기 옆으로 다가와서 주머니에서 꼬질꼬질한 쪽지를 건네며 전화좀 빌려달라는 상황이 웃긴지 그녀는 웃는다.
왠지 귀엽다... 그녀는 내가 보여준 번호를 찍고 통화버튼을 눌러 나에게 준다.
여보세요?
- 야, 나야. 지금 배터리 없어서 어떤 분 전화 빌려서 하는거야. 나 10분 후 쯤 도착하니까 집 앞에 나와있어
어, 알았다. 뚝.
잘 썼습니다. 전화를 건네준다. 용무를 마치고 원래 내가 앉아있던 앞 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창 밖을 보고 앉아서 가고 있는데 버스가 신호에 걸려서 멈춘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다. 그녀를 본다.
이쁘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가방을 챙겨 그녀 옆으로 간다.
저기요..
-네??
아깐 정말 고마웠습니다. 제가 집 키를 안가져와서 친구가 가지고 있거든요. 그쪽 아니었으면 집에 못 들어갈뻔 했어요.
-아 네,, 크크 어디 사세요??
아 저는 XX대 앞에 살아요.
-아 XX대 학생이세요??
아뇨 저는 OO대 학생이에요. 크크 어디 사세요??
-저는 MM동 살아요, 청량리에서 내려서 갈아타요..
아, 그러시구나~~
나도 모르게 셀프 소개팅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말을 건다.
내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잘 받아준다. 착하기까지..
몇 살이세요?
-24살이요. 그쪽은요..?
아 저는 26살이에요.. 24살이면 학생이시겠네요?
-네 학생이에요~
왜 이렇게 늦게 다녀요?? 12시가 다 됐는데.
-아, 음악회 갔다 오느라고 늦게가요 흐흐.
아~ 남자친구랑 갔다왔구나??!! (미쳤나보다.... 초면에 이런 멍멍이 소리를 하다니)
-크크크 아니에요~
이렇게 10분정도 이야기하니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술기운이 살짝 올라오는 거 같다.
그녀가 묻는다.
어제 노래방에서 광란의 밤을 보낸 후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왠 술취한 남자가 휴대폰을 빌려달란다.
겁에 질려 빌려주니 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쪽지를 꺼내 전화를 하는데,
여자 친구나 아내에게 하는 전화같은데, 전화기를 돌려주면서 묻지도 않은 이야길 한다. 친구에게 걸었다나.
아무래도 위험한 사람인 것 같아 어디에 사는지 물어보니 우리집이랑 가깝다, 낭패인데...따라와서 해꼬지 하면 어쩌지?
차라리 몇정거장 앞에 내려서 좀 걸어가야 겠다.
보아하니 술 꽤나 취한 거 같은데, 이것저것 별 관심없는 이야길 한다. 내가 12시에 집에 들어가건 말건.
도망치듯 몇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휴...안주로 뭘 먹은 거야.
그런데 오늘, 모르는 번호로 카톡이 하나 와있다.
어제 휴대폰 빌려줘서 고맙다며 그 남자가 연락을 해왔다.
아...괜한 일에 엮인거 같은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