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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0/06/03 02:25:36 |
Name |
이쥴레이 |
출처 |
게임잡 |
Link #2 |
http://www.gamejob.co.kr/Community/Talk/Detail?talk_Stat=12&idx=33020&page=1 |
Subject |
[유머] 채용의 추억 |
전 회사 AD에게 전화가 왔다. 괜찮은 작업자가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는 용건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와 함께 했던 4년 전을 떠올렸다.
...
2012년 중순.
직원 30명 남짓의 게임회사의 AD로 근무하고 있는 F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슨 말이 적당할까. '얼음송곳에 팔과 다리가 달려서 걸어다니는 것 같다' 정도면 어떨까. 큰 키에 깡마른 그는 차갑고 날카롭고 예민했다. 보기에는 나름 멋있어 보였지만, 그를 본격적으로 겪게 된 이후로는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밑에서 파트장으로 근무했었다. 당연히 하루하루 고난과 역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 매일이 찔리고 찔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내 아래의 두명은 내가 찔리니까 비교적 덜 아팠으리라.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신규 모바일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예상보다 이른 결정이어서 F와 나는 당황했다.
우리도 다른 팀들처럼 인원을 더 뽑아야 해서 채용공고를 올렸고, F와 나는 매일같이 이력서와 포폴을 받거나 혹은 찾고 있었다. 나름대로 알려진 회사였고 인기 직군이었기 때문에 대략 200부는 받았던 것 같다. 정신이 아득했다.
F는 역시나 까다로웠다. 내가 거의 초등학생 수준의 포트폴리오 같은 것들은 빼고 그에게 전달하면, 그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모두 '쳐냈다'.
- 포트폴리오 스타일이 균일하지가 않다. 남이 해준게 분명하다.
- 포트폴리오가 지나치게 학원풍이다. 너무 싫다.
- 포트폴리오 대용으로 쓴 블로그에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치적 견해가 나와 다르다.
- 포트폴리오 페이지가 트래픽 초과로 열람이 되지 않는다. 실무에서도 이런 실수를 할 것이 분명하므로 탈락.
- 포트폴리오에 '모에한 여캐'만 바글바글하다. 체리피커(?)마냥 맞는 일만 하려고 들 것이 뻔하다.
- 포트폴리오가 그냥 기준 미달이다.
- 포트폴리오가 좋긴 한데 아무튼 내 취향이 아니다.
- 포트폴리오 주소를 토대로 구글링해보니 트위터가 나왔는데 너무 트윗질을 열심히 한다.
- 포트폴리오 주소를 토대로 구글링해보니 모 사이트 회원임이 드러났다. 그 사이트를 하는 XX들은 다 XXXX해야 한다.
- 포트폴리오 주소를 토대로 구글링해보니 모 전 대통령을 비방한 글을 찾았다. 이런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
- 포트폴리오 주소를 토대로 구글링해보니 게이를 좋아하는 동인녀임이 드러났다. 말할 가치도 없다.
- 나이가 너무 많다
- 나이가 너무 적다
- 남성인데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 남자는 자고로 군대를 꼭 다녀와야 한다. 공익 면제 안된다(그런데 F는 '소집해제'된지 4년 정도 지났다고 분명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 증명사진 해상도는 맞는데 선명도가 낮다. 이런 것도 깔끔하게 못 내는 사람은 이미지를 다룰 자격이 없다.
- 자기소개서의 시작을 '저는 자애로운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같은 식으로 상투적으로 시작했다. 창의성이 없다.
- 자기소개서에 2군데 정도의 오타가 있다. 이런 사람은 회사생활도 오타처럼 할 것이 분명하다.
- 자기소개서가 세 줄 정도로 너무 짧다.
- 자기소개서를 HWP로 보냈다.
- 경력 공백이 너무 길다. 게으른 성격이 의심된다.
- 땡땡 회사 출신은 뽑지 않는다. 이유는 묻지 말아달라. 그냥 뽑기 싫다.
그렇게 그는 내가 간추린 백여부 정도의 이력서를 모두 쳐냈다. 여기까지 대략 2주 정도가 소요되었다.
나는 정말 짜증이 고름처럼 눈 밖으로 손톱 아래로 찍찍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내일 당장 뽑는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저 미친놈은 대체 뭐하는 걸까. 다른 팀이 최소 서너명의 인원을 더 뽑을 동안 우리는 단 한명도 뽑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대표가 F를 호출했고, 잠시 후 F는 자기가 쳐냈던 이력서 중 제일 준수한 다섯명의 폴더를 압축해서 내게 보내왔다.
F는 내게 면접시기를 잡으라고 했다. 나는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대략 이틀동안 허겁지겁 면접을 봤다. 하지만 역시 F는 F였다. 5명의 지원자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때의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간다. 게으른 것이 분명하다.
- 면접 시간에 너무 일찍 왔다. 경력자 주제에 사회초년생같이 경직된 모습이 싫다.
- 면접 시간에 적당히 왔다. 신입 주제에 긴장해서 빨리 와야 할거 아니냐.
- 질의할때 대답이 너무 짧았다. 최소 열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니냐.
-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왔다. 정장은 아니라도 단정히는 입고 와야 하는거 아니냐.
- 면접 중간에 재미없는 농담을 했다. 면접을 우습게 보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저 개인업무만 진행하고 있었다. 게임잡 게시판에 '우리 회사에서 면접봤는데 한마디로 삐-같았다. 절대 가지마라'는 글이 두 개 올라왔다. F에게 알려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될대로 되라고. 되버리라고.
프로젝트 시작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대표가 다시 손을 썼다. 대표가 나와 F를 불러놓고 말했다.
'알음알음으로 정말 괜찮은 작업자를 소개받았는데, 나는 이 사람을 꼭 쓰고 싶다. F가 싫어해도 나는 쓸 생각이다. 대학 선배의 와이프다. 경력도 오래 되었고 성격도 좋으신 분이라고 한다. 나이가 많은게 흠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런게 싫으면 나가라. 하지만 절차상 면접은 봐라. F의 자존심을 고려한 결정이다.'
그래서 나와 F는 사실상 채용이 약속된 면접을 진행하게 되었다. 형식적인 면접은 빨리 끝났다. 채용예정자가 돌아간 후, F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대표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하이톤이고 말이 빨라서 작업할 때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하이톤이고 말이 빨라서 작업할 때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하이톤이고 말이 빨라서 작업할 때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F를 보자마자 '어때? 마음에 들지?'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 분명했던 대표는 가만히 F를 째려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옆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서 F의 발치에 세게 던졌다. 재떨이가 퍼석 하는 소리를 내면서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 몇몇이 일을 멈추고 빼꼼이 고개를 들어 대표실을 쳐다보았다.
대표는 한숨을 쉬더니 밖으로 나가서 빗자루를 들고 돌아왔다. 말없이 재떨이의 잔해를 쓸어담으면서 F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가. 뽑지 마 그냥.
...
다시 2016년으로 의식이 돌아온 나는 대충 '네.네.괜찮은 분 있으면 소개시켜드릴께요' 라고 대답한 다음에, 휴대폰을 소파에 던지고 드러누웠다.
F는 왜 아무도 뽑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단순히 까칠해서? 아니면 정치적으로 적이 생길까봐? 아니면 둘 다? 그냥 사람을 심하게 가려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회사에 대한 테러였을까?
우리는 회사가 막 시작할 때 왔기 때문에 입사일자 상으로는 F와 동기이고, 대표와의 면접만 치르거나 혹은 면접도 안 보고 그냥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불운이었을까?
F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 지경이 되었을까?...
알게 뭐람. 뉴스나 보다가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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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블라인드에 올라왔다가 게임잡으로 다시 올라온
경험 수필글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네요.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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